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 상처투성이 인간들, 그들이 만나는 이유

까칠부 2020. 6. 29. 21:36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마지막 기댈 곳이어야 한다. 해가 저물고 하늘이 어둑해지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처럼. 밖에서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든 집에만 돌아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오로지 자신의 편이 되어 억울함도 들어줄 것이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며 달래주기도 할 것이다. 배부르게 먹고 따뜻한 품에 안겨 마음놓고 있으면 어느새 새록새록 잠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당연한 것 같은 행복이 모든 사람들에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차라리 집에서 나와 도망치고 싶다. 위험해야 할 집밖에 더 안전하고, 마음놓여야 할 집이 더 두렵기만 하다. 마지막에 돌아가 안겨야 할 부모의 품이, 가족이란 울타리가 오히려 차가운 가시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을 헤집는다. 집을 나선다고 숨거나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집을 벗어나면 전혀 모르는 타인이란 공포가 자신을 에워쌀 것이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아무리 가깝고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은 사람도 결국은 상관없는 타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돌아갈 곳을 스스로 만들거나 찾을 때까지 그래서 사람들은 끝없이 떠돌아야만 한다. 상처투성이인 자신을 감추고 도망치며 그런 떠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업까지 내팽개치고 친구랍시고 자신을 돕기 위해 벌써 몇 년 째 따라다니고 있는 조재수의 존재는 그런 점에서 기댈 곳 없는 문강태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재수 하나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자신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언제나 자기가 편이 되어 주어야 하는 형 상태의 존재가 문강태에게는 살아갈 이유가 되어 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형이 있었다. 자기만 바라보고 자기에 기대며 자기와 언제나 함께 해주는 형의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형과 함께 있는 그곳이 그의 집이다. 그때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형마저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면 문강태는 과연 어디를 집으로 돌아가야 했을까?

 

그럼에도 형이 있었고, 그럼에도 살아생전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해주던 어머니의 기억이 있었기에 그는 버틸 수 있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조차, 다 버리고 도망쳐버리고 싶을 때조차, 너무 힘들어서 약해질 때마저, 그러니까 자신은 형을 위해 아직은 더 힘겹게 버틸 수 있다. 아직 어머니와의 기억을 위해 조금은 더 아파하며 견딜 수 있다. 그러면 고문영은? 고문영의 기억 속에 부모란 그렇게 따뜻한 존재가 아니다. 어머니는 망령이 되었고, 아버지는 자신을 보자 죽이려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로 돌아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일까? 아마 그것이야 말로 고문영이 문강태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시 문강태라면 부모처럼 가족처럼, 그를 지탱하는 그것들처럼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갖지 못한, 그래서 몸서리쳐지도록 간절히 갖고 싶은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그라면.

 

문강태는 고문영에게서 자유를 보고, 고문영은 문강태에게서 돌아갈 곳을 찾는다.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도 저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문강태라면 자신을 안전하게 편안하게 따뜻하게 구속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차라리 어머니로부터 맞는 매가 따뜻하게 느껴진다. 자신을 구속하고 억압하고 때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조차 사실은 가족이라는 굴레의 확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은 어머니에 속한다. 아버지는 자신을 정면으로 돌아봐주지조차 않는다. 누군가는 어머니에게 맞은 뺨에 오히려 설레어 하고, 누군가는 아버지로부터 목이 졸리고 다시 절망에 헤매고 만다. 그리고 그런 고문영을 문강태가 찾아낸다. 그의 차, 그의 품, 그의 매몰찬 말들까지.

 

동화가 의미하는 것도 결국 엄마가 해주는 그 무엇보다 엄마의 품이 주는 따뜻함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아이를 위하느라 엄마는 그동안 한 번도 아이를 안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팔과 다리를 모두 잘라주고 몸만 남았을 때야 비로소 엄마는 아이를 위해 자신의 품을 내주었고 아이는 엄마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냥 따뜻했으면. 그냥 따뜻하기만 했으면. 그래서 엄마고, 그래서 그들은 아이다. 그리고 이제 누구도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다.

 

자신은 없는 것이기에.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이기에. 자신에게 허락되지 못한 그것을 인간은 누구나 간절히 탐욕한다. 고문영의 영혼에 새겨진 상처와 문강태에게 지워진 삶의 고단함이 서로를 향해 마주 달려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과연 어떤 진실을, 그리고 그 진실속에 자신을 만나게 될까?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린 듯한 그런 꿈결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흥미롭다. 상처가 인간을 만든다. 상처투성이가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