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으면 시간도 함께 멈추게 된다. 까마득한 오래전 일들도 바로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남아 때때로 자신을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족쇄라는 것이다. 마치 시간속에 갇혀서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영화속 이야기처럼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영영 그 시간에 갇혀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된다. 그래서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아 버리는 경우마저 있다. 차라리 다른 시간 다른 공간 속에 다른 사람으로 살면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오래전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 때문에. 아니 무심히 들었던 말 한 마디가 원인이 되어서. 그런데도 뿌리칠 수 없는 것은 더이상 뿌리칠 대상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잘못했단 말도 할 수 없고 미안했단 말도 들을 수 없다. 사과할 수도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래서 끝나지 않는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도 전해지지 않을 그 말을 자기에게라도 할 수 있어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다. 딸에 대한 미안함이, 그런 모진 말을 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이, 그래서 그 원인이 되어 딸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과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하나로 모인 듯한 숄을 넘겨주고서야 비로소 홀가분함을 느끼게 된다. 차마 버릴 수 없었기에 그러나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떠올리지 않는다면 이제는 잊을 수 있다. 그저 죽은 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만 남긴 채. 마음에 묻는 것 아니던가.
강태에게도 그런 어릴 적 기억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 같지 않은 형 상태를 위해 강태를 낳았다. 그러니 강태는 상태를 위해 살아야 한다. 엄마에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일까. 말처럼 그저 형을 돌보라고 낳고 기른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이 형 상태의 말을 통해 다시 기억속에 떠오른다. 형은 짬뽕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짬뽕을 좋아한 것은 자신이었었다. 단지 자기에게 짬뽕을 사주기 위해 형을 이용했을 뿐. 형을 위해서 동생인 자신을 이용하고, 동생인 자신을 위해서는 형을 이용하고. 엄마는 참 교활하다. 너무 어렸을 적이라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이 비로소 머리가 크고 나서 마음으로 느껴진다. 엄마는 형과 자신을 무척 사랑하셨다.
그러고보면 강태가 고문영에게 집착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형을 위한 자신이 아닌 오롯이 자신만을 보아주고 필요하다 말해줄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왔던 것이었다. 그래서 형을 버릴 수 없었고, 그래서 고문영의 고독과 절망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어느새 족쇄가 풀리며 강태 역시 고문영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고문영 역시 강태의 존재로 인해 그동안 자신을 옭아매던 족쇄를 스스로 풀고 오롯이 홀로 설 수 있게 되었다. 고문영이 어머니의 그림자를 벗어던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아직까지 어머니를 실종상태로 그리고 주술처럼 어머니의 말에 사로잡혀 지내게 만들었던 것일까? 머리는 잘랐지만 기억까지는 자르지 못했다. 그래도 한 발 앞으로 내딛을 수는 있었다. 강태가 있었다. 다만 한 사람 자신이 믿고 기댈 수 있는 그가 있었다.
과연 상태를 괴롭히는 기억의 정체는 무엇일 것인가. 무엇이 강태형제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또 고문영의 아직 드러나지 어머니의 기억 속에는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을 것인가. 사랑이라기에는 너무 처절하다. 그만큼 막다른 궁지에 몰린 두 사람이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서로를 부여잡는 듯한 모습인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끼어들 여지조차 없다. 그리고 그 모든 비밀은 그들의 과거에 있다. 아직 시작도 않은 것 같다. 이제 비로소 첫 단추를 꿰기 시작한 것일까.
서지예를 다시 본다. 캐릭터의 개성이 강한데 휘둘리기보다 그를 자신만의 존재감으로 만들어낸다. 예전 다른 드라마에서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타이틀롤이란 말이 딱 그대로 어울린다. 김수현이야 말할 것도 없고. 보는 즐거움이 있다.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자연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매력적인 배우다. 연기도 자연스럽고 탁월하다. 물론 고문영의 말처럼 김수현의 존재가 바로 가까이 있기는 하다. 배우가 즐거워서도 드라마가 재미있다.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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