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 엄마 도희재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 어쩌면 제목의 의미

까칠부 2020. 8. 10. 17:06

마지막회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도희재에게도 가족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자기가 남들과, 심지어 가족들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 줄곧 간절하게 바라왔을 것이다. 자신과 똑같은, 그래서 온전히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를 가지고 싶다. 그것이 도희재에게 가족의 의미였을 것이다.

 

어째서 남편에게 살해당할 뻔한 뒤 얼굴까지 고치고 성진시로 돌아와 남편과 딸의 주위를 맴돌았던 것일까? 굳이 정체를 숨기겠다고 간호사가 되어 아예 병원에 눌러앉을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단지 가까이서 머물며 감시하려고만 했으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남편에게 자신을 죽이려 한 복수를 하려 했어도 기회는 많았었다. 하지만 도희재가 남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것은 아무 여한도 없다며 자신의 존재마저 머리에서 지운 듯한 모습을 보고 나서였었다. 차라리 원망이더라도, 차라리 증오와 공포라 할지라도 남편이 죽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죽고 나서도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랬으니 간호사로서도 모두가 신뢰를 보낼 만큼 충실한 모습을 보여 왔을 것이었다. 도희재가 간호사로서 담당했던 환자 가운데는 남편 고대환도 포함되어 있었다.

 

딸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자유로워지려 한다. 혼자만 남겨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진짜 가족은 자기인데. 딸에게 진짜 가족은 자기 뿐이어야 했을 텐데. 그런데 생뚱맞게도 문강태와 문상태를 가족이라며 기대려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딸을 되찾아야 한다. 도희재가 문상태를 납치한 이유였다. 문강태에게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이 자신임을 굳이 밝히려 한 이유였다. 문강태에게 죽으려 했었다. 문강태가 자신을 죽인다면 고문영은 영영 그와 가족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죽어 세상에 없더라도 고문영에게 가족은 남편 고대환과 자신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니면 자기 손으로 문강태와 문상태 모두를 죽이던가. 그래서 도희재가 문강태 형제의 어머니를 살해한 이유에 관심이 가는 것이다. 자신이 딸을 기르는 방식에 감히 간섭하려 하고 있었다. 딸을 자신으로부터 떼어 놓으려 하고 있었다.

 

결국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동안 문강태의 머릿속을 짓누르던 한 마디였을 것이다. 형을 위해 어머니는 자신을 낳았다. 자신은 형 문상태를 위한 존재일 뿐이었다. 어머니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어머니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문강태는 형 문상태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지금껏 살아왔었다. 형 문상태를 위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기만 하는 사랑은 쉽게 지치고, 받기만 하는 사랑도 너무 쉽게 익숙해진다. 때로 그런 형의 존재가 거추장스러우면서도, 족쇄처럼 숨막히도록 버거운 와중에도, 그러나 저버릴 수 없기에 그저 인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저 상대의 존재를 인내하기만 하는 것이 과연 사랑이고 가족일 것인가. 

 

그래서 형과 싸워야 했다.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부딪혀야만 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저 형을 지키기만 해 온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형을 지켜왔던 것처럼 형 역시 자신을 지켜왔던 것이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형에 대한 집착을, 형으로 인한 구속을 잠시 벗어던지고 나니 형을 향하는 자신의 마음 만큼 자신을 향한 형의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진다. 가족이란 구속이 아니다. 당연히 소유같은 건 더더욱 아니다. 반드시 같아서만이 아닌 다르기 때문에도 그들은 서로 가족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노력해가며,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더 오래 함께하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멀어질 수도 있어야 한다. 설사 도희재가 딸 고문영을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길렀어도 엄마인 이상 고문영은 도희재를 이해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도희재가 고문영을 가족으로 여기는 이상 고문영 역시 엄마인 도희재를 영영 저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도희재의 과거에 가족들과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도희재가 자기 가족들과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 데에도 당시의 경험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죽은 것으로 위장한 뒤에도 얼굴과 이름까지 바꿔가며 남편의 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항상 남편과 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잔혹할 정도의 서러움이다. 애처로울 정도의 나약함이다.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다. 유혹에 약하고, 충동에 약하고, 욕망에 약하고, 정에 약하다. 마지막까지 도희재가 딸 고문영에게 호소하는 것은 고문영에게 가족은 자신 뿐이라는 자신이 믿고 있는 한 가지 사실 뿐이었다. 그러나 고문영에게는 이미 도희재 말고도 문강태와 문상태라는 가족이 생겨난 뒤였다. 항상 함께여서가 아니라 언젠가 돌아갈 수 있는 장소로써의 가족이었다. 때로 무심하게 서로 상처주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가족이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라는 제목은 그런 점에서 어쩌면 고문영이 엄마 도희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한 마디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일없었으면 고문영이 엄마 도희재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을 지 모르겠다. 문강태가 고문영에게 그러는 것처럼. 심지어 어느새 고문영과 닮아가는 그 모습 그대로. 그러니까 사이코더라도 가족이니까 자기에게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이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뭐라 불리든 자기와 무슨 상관인가. 

 

마지막회야 말로 드라마의 주제를 고스란히 녹여 눌러담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엄마와 딸이, 형과 동생이,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그러니까 괜찮다. 그러니까 상관없다. 남들 보기에 어떻든, 남들이 무어라 하든 그래도 내 가족이기 때문이다. 내 부모, 내 자식, 내 형제, 내 연인,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