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만화가들이 들으면 기함할 노릇이다. 황미나 작가가 유독 싫어하는 자기 작품이 있었다. 아마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였던가? 작품 자체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작품을 내놓기까지 심의기관과 드잡이질하는 과정들이 끔찍했다 말했었다. 가난한 달동네가 주로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담도 미국처럼 목제담으로, 단칸방도 절대 안 되니 가족들도 각방을 쓰고 등등등등... 진짜 거지 발싸개같은 기준을 모두 충족하느라 원래 작품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헷갈리더라고.
그런 예가 많았었다. 초등학생이 도둑을 잡으려 쫓아가더라도 감히 나이많은 어른에게 반말을 할 수 없으니 존댓말을 써야만 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부모자식간이나 형제자매간에도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해도 심의가 그를 틀어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놓고는 또 SF는 허무맹랑하다며 규제대상에 올리고 했었으니. 참다 못해 70년대 어느 원로만화가가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다 때려죽이겠다며 야구방망이 들고 쳐들어갔더니 아르바이트하는 여고생들이 자기 원고를 뒤적이고 있다나 뭐라나. 어이없어서 만화를 그만두려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5월이면 만화책 모아서 불태우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어 있었다. 그 행사를 주최한 당사자가 바로 지금도 이름높은 YMCA와 YWCA였다. 둘리도 고길동을 만년과장이라며 놀렸다가 과장을 비하했다는 이유로 경고를 먹곤 하던 시절이었었다. 그 연장에서 1990년대 시끄러웠던 청소년보호법 파동이 있었다. 그래도 민주화의 결과로 사전검열이 사라지자 사후검열로 청소년에 유해할 수 있는 시설과 매체, 행위들을 금지시켜야 한다. 만화도 당연히 여기 포함되었고 그래서 많은 만화가들이 그를 막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가고 했었다.
이게 불과 수 십 년 전의 이야기란 것이다. 아마 현역 만화가 가운데 윤태호나 문정후 정도가 이 모든 것에 살짝 걸치고 있을 것이다. 원수연이 한창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기 청소년보호법 파동이 있었다. 그보다 한 세대 전에 사전심의로 인한 문제들이 있었다. 그 전에는 합동만화라는 것이 있어서 만화가들을 옭죄고 있었다. 땡이 시리즈의 임창이 이때 절필하고 미국으로 떠났을 것이다. 김수정이 만화가로는 못살겠다고 외판원하던 시절이다. 그런 시절을 거쳐 온 원로만화가들이 보기에 만화가 스스로가 만화가의 작품을 검열하고 창작 자체를 금지하려는 행동들이 어떻게 비치겠는가.
여혐이라고? 여성주의가 그리 문제라면 당연히 아직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던 시절에 어른인 도둑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도, 가난한 가족이 단칸방에서 남녀 구분없이 손잡고 함께 자는 것도 금지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반공이 아직 절대적인 시절이었다면 혹시라도 북한체제에 유리할 수 있게 한국사회의 가난하고 고단한 현실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도 규제하는 것이 옳았던 것이었다. 청소년을 보호해야 하지 않은가. 사회의 미풍양속도 지켜야 하지 않은가. 국가의 질서와 체제 역시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선배 만화가들이 필사적으로 싸워서 지금의 창작의 자유를 지켜냈더니만 같은 만화가가 다른 만화가를 퇴출시키려 행동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하긴 만화가 뿐일까? 긴급조치 시절에나 있었을 법한 기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가 기자 자신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여성은 반공이 되고 사회의 미풍양속이 되고 체제의 질서와 안정이 되고 말았다. 당시 딱 그 이유들로 표현의 자유는 철저히 억압될 수 있었다. 괜히 많은 사람들이 최근의 극렬한 여성주의에 대해 파시즘까지 떠올리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까지 억압해야 하는 여성주의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인 것인가. 그것은 진정 여성을 위하는 것이기는 한가. 그를 위해서 계약직 여성 방송인마저 직장을 잃어야 했었다.
아무튼 만화계의 역사를 아는 입장에서 최근 만화가들이 한 만화가를 지목해서 여혐을 들먹이며 퇴출을 주장하는 모습이 그저 어이없을 뿐이다. 웹툰을 잘 보지 않기에 사실 거의 관심이 없었는데 원수연 작가의 글을 보고서 도대체 요즘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미쳐 돌아가는 것이다. 하긴 그래서 민주주의는 개에게나 주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인가. 80년대 이전으로 돌아간다. 미친 여성주의로 인해.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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