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를 사랑한 스파이 - 무박자와 엇박자, 절묘한 줄타기의 미학

까칠부 2020. 10. 26. 07:41

처음 눈길을 잡아끈 것은 초반 정지훈이 일식집에서 CIA요원과 벌였단 어이없을 정도의 난장판 액션이었다. 마치 재키 찬의 액션을 연상시키는, 그러나 그와는 전혀 다른 엉망진창의 리듬이 오히려 사실적이면서 만화적이었던 독특한 느낌의 연출이었었다. 이후로도 강아름과 처음 만나던 순간을 회상하면서 또다른 산업스파이를 체포하는 장면에서 같은 방식의 연출을 선보였는데, 그야말로 계획은 창대하지만 현실은 그를 따르지 못하는 모순의 결정이었다. 원래 현실의 싸움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던가. 시작은 멋있어도 결국은 같이 땅바닥을 뒹구는 개싸움으로 끝나는 것이다.

 

뭔가 한 마디씩 어긋나는 엇박자의 리듬이 무척 흥미로웠다. 유인나라는 배우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다. 사랑스러운 여인을 가장 사랑스럽게 연기할 줄 아는 배우일 것이다.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처연하고 때로는 매섭고 때로는 냉정하면서 때로는 따뜻한 사랑스러움 그 자체를 보여주는 배우다. 그리고 로맨스라면 빠질 수 없는 문정혁이 함께한다. 솔직히 문정혁의 연기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존재하는 자체만으로 멋진 그림을 보여준다. 상당히 심각하고 비장한 설정이고 이야기일 수 있는데 그래서 어긋난 만큼 어딘가 빈 듯한 여유로움과 유쾌함까지 느끼게 된다. 결국은 스릴러이면서 로맨스코미디겠지. 서스펜스와 코미디라는 이질적인 요소를 이어주는 것이 그 빈 공간이 아닐까.

 

구미호뎐도 재미있기는 한데 뭔가 보다가 지치는 느낌이 들어서.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아도 일로 피곤한 상태에서 드라마를 보려면 몇 배 더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다른 것 없을까 골라 본 것인데 의외로 서늘하면서도 달달한 것이 제법 구미에 맞는다. 일단 무박자의 어수선한 액션이 마음에 들었고, 반 템포씩 어긋나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구성들이 보기에 편했다. 문정혁도 전처럼 괜히 힘주고 연기하지 않는다. 일단 지루하지 않고 지치지 않게 하는 그 센스를 인정해 줄 만하다. 감독이며 작가가 누구인가까지 찾아 볼 정신은 없다. 요즘 일 때문에 무척 힘들다.

 

한 가지 실수라면 그동안 습관처럼 드라마가 시작되면 인터넷을 통해 드라마의 설정등을 찾아보고는 했는데, 덕분에 쓸데없는 스포일러만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역시나 뻔한 구성이기는 한데 차라리 강아름의 현재 남편 데릭 현의 정체를 아예 모르는 것이 더 드라마에 대한 긴장감을 높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한 편으로 데릭 현의 정체를 알았기에 그가 이후 저지를 일들에 대해 예상하고 긴장하게 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역시 뭐든 이야기란 모르고 보는 편이 가장 재미있다. 드라마 볼 시간이 없어서 사전정보가 중요하다 보니. 아쉬운 부분이다. 드라마는 재미있다. 시간이 너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