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경이로운 소문 - 초인과 판타지, 부당한 현실을 인내하며 사는 이들을 위해

까칠부 2020. 12. 7. 05:25

부조리한 현실에서 자신의 신념과 양심을 지키려면 초인이라도 되어야 한다. 어느 소설에 나온 대사다. 어떤 현실의 부당함도 스스로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올곧게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슈퍼히어로가 필요한 것이다. 아니 슈퍼히어로기에 그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정의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이고깽이란 자체가 작가와 독자들의 대리만족을 위해 생겨난 것이었다. 현실의 별볼일없는 고등학생이 전혀 다른 세계인 이계로 넘어가면서 특별한 힘을 부여받고 제 멋대로 깽판을 치며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아예 그 깽판을 현실에서 쳐보자는 게 현대판타지의 시작이었다.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당당히 깨부술 수 있는 힘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고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 것이다. 더불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기는 하지만 외롭기만 하던 자신에게 가족까지 생긴다. 그것도 막대한 재산에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까지 가진 후견인이 자신에게 생긴다.

 

일진 어쩌고 나올 때 바로 접었어야 했는데. 우연한 계기로 카운터의 파트너인 위겐이 들어오며 카운터의 능력을 가지게 되고, 그 능력을 사용해서 학교를 공포로 물들이는 일진들을 무찌르게 된다. 어차피 학교도 경찰도 있는 집 자식들이라고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기에 누군가는 자신의 힘으로 이들의 존재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소문은 영웅이 되고, 일진이라는 학교의 악은 패배하며, 소문의 친구와 주위는 지켜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일진들의 부모가 개입하는 상황에서는 카운터가 되며 맺게 된 인연인 장물유통의 회장 최장물이 나서며 문제없이 상황을 해결해 준다. 부모가 없는 소문에게는 가모탁과 추매옥이, 그리고 최장물이 아버지고 어머니고 가족과 같았다. 그래서 문제다. 정작 집으로 돌아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만났는데 왜 이리 존재감이 없는 것인가.

 

하긴 아직 누군가에게 기대어 보호받아야 할 나이였을 테니까. 아무리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었어도 기껏해야 학교 선생의 한 마디에, 혹은 경찰의 사소한 결정 하나에도 평생이 결정될 수 있는 사회적 약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소문에게 그런 보호를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외할머니가 치매로 소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상황이다. 그래서 어쩌면 소문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자기 발로 걷는 것이나, 불의한 억압과 강제를 거부할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이 아닌 자신을 지탱해 줄 가족이 아니었을까. 가모탁과 추매옥과 도하나와 함께 있을 때 소문은 그래서 원래 나이에 어울리는 소년의 얼굴을 하게 된다. 마냥 기대며 보호받아도 되는 존재가 된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것이 아직 코마상태에 있는 소문의 꿈이었다고 해도 납득이 갈 정도인 것이다. 하필 그렇게 만난 카운터 동료 가모탁이 아버지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였었다. 부모의 죽음과 관련한 비밀을 밝히기 위해 무려 7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금 자신이 기억을 잃은 당시의 사건까지 파헤치려 나서고 있는 중이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걱정해주고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그래서 자신을 위해 화도 내고 울어주기도 하는, 그래서 과거의 비밀까지 밝히려 하는 가족이란 현실이면서 또한 판타지인 것이다. 더구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라면. 피보다 더 깊고 진한 죽음으로 이어진 이들이라면.

 

그럼에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진에 초인물이라 해서 채널이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납득가게 설득력있게 재미있게 만들어진 때문일 것이다. 이게 가장 크다. 이고깽이 싫은 이유는 뻔한 이야기에 재미까지 없기 때문이다. 충분히 설득력있고 개연성있으면 장르가 무엇이든 일단 보기 시작하면 끝을 보게 된다. 원작을 보지는 않았지만 원작에 충실한 것이라면 그 또한 기대할만하다는 뜻이다.

 

전형적인 코드가 읽히면서도 그러나 그렇다고 진부하다거나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혀 비현실적인 설정과 내용들일 텐데도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만다. 제작진의 역량인 것이다. 배우들의 실력인 것이고. 다만 가끔 너무 신파일 때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리는 경우도 있다. 딱 그 부분만 조금 아쉬운 정도다. 부담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