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전함 V호'가 처음 방영될 당시 우리집에는 TV가 없었다. 바로 같은 집에 세들어 살던 친구집에 있었다. 처음에는 주인집에만 있었는데 친구네 누나들이 중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취직하면서 중고 흑백 TV를 들여놓은 탓에 몇 번 같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줄거리는 잘 모른다. 그냥 대사 하나만 기억한다.
"저것이 한국인의 혼 V호다."
뭔 말인가 싶었다. 도대체 V호랑 한국인의 혼이 뭔 상관인데? 그 의문을 풀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대학에 들어가서 일본애니에 대해 하나둘 알아가면서부터였다. '우주전함 V호'의 원래 제목은 '우주전함 야마토'였고, V호가 한국인의 혼이었던 것은 일본인의 혼을 야마토 타마시라 일컫기 때문이었다. 내용도 심상치 않았다. 그 무렵 만화영화의 줄거리에 대해서도 알게 되면서 내가 알던 전쟁사와도 연결지을 수 있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기억이 이런 식으로 반영된 것은 아닌가.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멀리 유럽의 동맹국인 독일로부터 많은 것들을 지원받았었다. 이를테면 당시 세계에서 단 둘 뿐이던 1000마력급 액랭식 엔진이라던가, 혹은 최초의 제트전투기의 설계도와 같은 것들이었다. 전자를 받아들여 만든 전투기가 일본 군수산업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 전투기 히엔이었고, 후자의 경우 겨우 일부만 전해받아서 완성시킨 시제기가 키카였었다. 그래도 전쟁 전반에는 잠수함으로 설계도를 공수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후반에 이르면 그마저도 불가능해지며 대부분이 격침당한 때문이었다. 비슷하지 않은가. 끊임없이 공습을 가해오는 적과 그로 인해 황폐해진 지구, 그리고 적과의 결전에서 전멸한 함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먼 나라로 떠나는 전함까지. 원래는 전함이 아닌 잠수함이었지만. 재미있는 건 그런 주제에 적을 나치 독일을 모티브로 한 테슬라의 가미라스로 설정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6, 70년대 일본 만화영화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특히 거대로봇만화의 경우 2차세계대전과 이후 냉전시대의 공포와 경험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마징가Z만 하더라도 도입부만 보면 미국의 공습과 적군파의 테러에 대한 공포를 단지 대상만 바꿔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서브컬처의 거대서사는 그런 점에서 현실에 대한 무의식의 반영이 아닌가. 80년대 이후 대중문화의 거대서사가 60년대 학생운동과 크게 닿아 있는 것처럼. 딱 그 무렵 당시의 세대가 일본 대중문화에서도 주류로 성장해 있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제작자의 변명에도 이 작품의 의도는 분명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무의식이 그런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본은 무고한 피해자이며 적절한 조력자만 있었다면 파멸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 특히 80년대 이후 양산된 태평양전쟁에 대한 가상역사물들이 그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그 가운데 그렇게 구원받은 승리자 일본의 마지막 적으로 나치 독일이 설정된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솔직히 만화영화 자체는 크게 기억에 없다. 띄엄띄엄 거리에서 칼싸움하고, 연탄재싸움하고, 망까기하고, 딱지치기 하느라 내용 가운데 일부만 겨우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래도 역시 기억나는 건 파동포. 파동포를 쏘기 위해서 자신의 의수와 의족을 희생한 사나다 시로의 에피소드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너무 오래전이다. 아주 아득한 오래전. 기억도 희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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