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한자라도 쓰이는 지역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고기 육肉과 나물 채菜 역시 그런 한자들 가운데 하나다.
중국에서 고기는 곧 돼지고기를 의미한다. 중국의 요리 이름에 고기 육肉이 들어가 있으면 다른 설명이 없어도 그냥 돼지고기 요리라 여기면 된다. 청초육사에서 육도 돼지고기를 가리키고, 동파육에서 육도 돼지고기를 가리킨다. 탕수육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른 고기를 쓸 경우에는 우육면처럼 그 고기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시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다르다. 한국에서 고기란 곧 쇠고기를 가리켰다. 불고기가 쇠고기 요리인 이유인 것이다. 굳이 소불고기라 하지 않고 불고기라 부르면서 돼지고기로 굽는 요리를 따로 돼지불고기라 부르는 이유다. 북한에서 말하는 이밥에 고기국도 쌀밥과 쇠고기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래는 개고기로 끓이는 맛과 향이 강한 국에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으니 쇠고기를 넣은 개장국이라 해서 육개장이 된 것이었다. 개고기로 끓인 탕을 가리키는 보신탕의 원래 이름은 개로 끓였다 해서 개장국이라 불리고 있엇다.
비슷하게 나물 채菜 역시 중국에서는 그저 청경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에 가까웠다. 중국무협에서 많이 나오는 소채가 바로 그 청경채로 만든 볶음요리인 것이다. 수호전에서 호걸들이 주막에 가면 시켜먹던 데친 채소 역시 청경채를 끓는 물에 데쳐서 내놓는 요리였다. 그래서 잎이 파란 청경채 가운데 유독 잎이 하얀 돌연변이를 가리켜 백채라 부르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에서 배추가 되었다. 그냥 먹어보면 안다. 청경채와 배추는 원래 같은 종이었다. 아니 아마 지금도 종 자체는 같을지 모르겠다. 특히 지금처럼 통이 커지기 전의 재래종 배추를 보면 그냥 청경채를 크기만 키워 놓은 모양이다. 다만 덕분에 겉잎 사이에 들어찬 잎들이 볕을 보지 못해 하얀 색을 띄는 탓에 하얀 청경채, 백채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새와 닭을 가리키는 단어가 같다. 새도 도리고 닭도 도리다. 특히 요리로 쓰일 때는 새란 곧 닭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사람들이 먹었던 새고기가 곧 닭고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에스기 겐신이 건강을 위해 어조류를 먹겠다 했을 때도 조는 곧 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반면 중국이나 한국이나 닭은 닭이지 닭이 새를 대표하지는 않았다. 역시나 문화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요리 뿐만이 아니다. 흔히 날이 양쪽에 달린 날붙이 무기를 가리키는 단어로 여겨지는 검劍은 많은 용례에서 무기 그 자체를 가리키는 글자로 쓰이고 있었다. 김용의 무협소설 '천룡팔부'에서 대리 단씨들이 사용하던 절기 육맥신검이 검법이 아닌 이유와 같다. 그래서 중국의 여러 무서나 기록들을 보면 곤도 창도 편도 도도 하나같이 검으로 기록하고 있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게 된다. 아주 오래전 중국에서 검이 곧 무기 그 자체를 대표하여 쓰이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아직 징집을 통한 비숙련병력을 대규모로 운용하기 이전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밖에도 이와 비슷한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중국 고대문헌의 번역이 어려운 이유다. 중국의 시대와 사회상을 알지 못하면, 심지어 개인의 문집의 경우에는 개인의 서사까지 완벽히 이해해야 오해없이 문헌을 번역할 수 있다. 무협소설에서 무공비급을 해석하면서 고수들이 자주 곤란을 겪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워낙 한자의 모양이 복잡한 탓에 오탈자도 적지 않았으니. 아니 같은 발음에도 한자가 다르고, 같은 한자인데도 발음이 다른 경우도 상당한 터라 그로 인한 오류다 상당했었다. 그나마 좀 배운 놈들이 쓴 무서 정도나 무리없이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게 가능하다. 명문정파가 명문정파란 이유인 것이다. 어째서 명문정파 놈들은 큰 어려움 없이 무서들을 해석하고 다시 제자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냥 무협소설을 보다가 생각나서 끄적여 봤다. 무서 이름에 검이 들어가 있다고 검법이 아니고, 무기 이름에 검이 쓰였다고 무기로서 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니까. 중국이 이해하는대로 우리가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서 고기는 돼지고기가 아닌 쇠고기를 가리킨다. 닭은 그냥 닭일 뿐이다. 단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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