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려보면 아주 어렸을 적 나는 정의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다. 하필 군사독재 끝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의를 외치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주위까지 고통받게 만들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학교에서도 입바른 소리를 하는 놈이 있으면 장래를 위해서라도 매를 때려서 억눌렀다. 남들 하는대로 살아라. 남들 가는 길만 가라. 괜히 남들과 다른 소리는 하지 말아라. 그런데도 용케도 요즘 세대들이 싫어하는 PC에 물들게 되었다. 보다 옳고 보다 바르고 보다 정의롭고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가치에 눈뜨게 되었다. 어째서?
일본에서도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학생운동이 한창 뜨겁게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적군파가 항공기를 납치하고 남의 내전에 뛰어드는 등 그 정도가 우리의 상식을 한참 뛰어넘고 있었다. 당연히 그 활동이 과격했던 만큼 학생운동의 광풍이 지나고 나서 당시 세대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안으로 선택하게 된 것이 바로 대중문화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운동권 출신들이 취직할 길이 막히자 학원강사나 연극무대로 발을 돌려야 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실력만 있으면 과거 전력따위 묻지 않는 문화예술계에 대거 종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대중문화에서 요즘 흔히들 정치적 올바름이라 부르는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부터다.
당사자는 당연히 학생운동에 직접 관여한 바 없지만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미야자키 하야오나 다카하타 이사오, 토미노 요시유키 등 비슷한 세대의 거장들에게서 비슷한 사회적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전쟁을 겪으며 자랐던 세대였기에 반전을, 그리고 핵무기를 경험했던 세대였기에 반핵과 환경을, 나아가 문화의 힘과 공존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였다. 학생운동에 참여한 당사자여서이기도 하겠지만 그 영향을 받았던 동시대의 사람으로써 비슷한 사고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런 이유로 당시 세대들이 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의 애니메이션들에서는 그와 같은 사회적 메시지가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개인적인 고뇌와 갈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 시대를 대표하던 건담시리즈들조차 한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서사보다는 개인의 서사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 요즘 추세다.
말하자면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를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당시 군사독재정권이 바라던 정의가 아닌 타인과의 공존과 평화와 환경과 다양성이라고 하는 그 시절 일본의 대중문화예술인들이 전하고자 했던 그 정의였다. 사실 나는 요리도 만화로 배워서 밥도 일본만화에서 본 대로 따라서 지금도 지어 먹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그런가 대중예술인들이 자기 작품에 어떤 메시지를 담는다 하면 꽤나 흥미롭게 진지하게 바라보는 편이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그래서 내가 여기서 한창 드라마 리뷰를 쓸 때도 그런 작품에 담겨 있는 정의에 대해 혼자서 진지하게 끄적이고 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강요라고 강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허균의 홍길동전조차도 당시 허균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정치적인 올바름이 담겨 있을 터였다. 유럽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제인 에어'나 '올리버 트위스트'역시 마찬가지다. '레미제라블'을 그들 주장에 따르면 그냥 선동용 이념서적이다. 일본 순정만화 가운데서도 '캔디캔디'와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그래서 꽤나 흥미로운 대비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여성상을 가장 잘 녹여 그려낸 '캔디캔디'에 비해서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주인공 오스칼은 남장을 즐기며 오히려 남성보다 더 남성적이기도 한, 그러면서도 가장 여성적인, 매우 진취적인 캐릭터였다. 요즘 기준으로 하면 페미다. 뿐만 아니라 역시나 그 세대에 어울리게 프랑스혁명이라는 대의를 만화 속에서 너무나 잘 구성해 보여주고 있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은 특정한 이념을 강요하니 다 쓰레기들인 것인가. 아니 실제 역사에서 프랑스대혁명 어디에 여장을 한 귀족출신 장교의 활약이 들어갈 여지가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그게 문제인 것인가?
게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토리가 아예 필요없는 액션게임을 제외하고 대부분 롤플레잉 게임들은 나름의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가장 흔한 것이 바로 환경과 평화다. 그리고 공존이다. 다양성과 소통이다. 인종문제가 딱히 크게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시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기존의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 속에서 캐릭터들을 다른 성별 다른 인종으로 바꿔서 새롭게 만들어 보는 개작이 꽤나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지금에서만, 그것도 자기가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PC라 매도해 버린다. PC가 묻어서 망해라. 망했다. 정치적인 올바름이 문제라면 전체가 문제가 되어야 할 텐데 자기들이 반대하는 것들만을 가지고 PC라며 그 전체를 매도하고 부정하고 거부하려 한다. 처음 조금은 당황을 느끼기도 한 이유였다. 왜? 어째서? 뭣때문에?
결국은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이유였을 것이다. 꼴보기 싫은 주장을 대놓고 부정해도 된다. 그런 세력들이 선거에서 이겨서 대통령까지 만들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그래도 된다. 그래서 자기가 싫으면 죄다 PC로 매도하고 부정해 버린다. 심지어 판타지세계에 바이섹슈얼은 없다고. 진짜 그래?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정작 미국에서 가장 반PC적인 사람들조차 한국으로 오면 상당히 PC적인 부류고 분류되며, 더구나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딱히 PC라 할 만한 교육도 제도도 입법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 실제 현실이라는 것일 게다. 도대체 왜? 뭣때문에? 역시나 남는 의문들이다. 그래서 만화나 영화, 게임, 소설들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으면 안 돼?
시대가 바뀐 것이거나 내가 너무 늙은 것이거나. 정의가 소중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긴 어쩌면 정의 자체가 사라졌던 시대였기에 더욱 정의가 소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죄다 썩어 있었으니 허구로라도 정의를 가지고 싶었다. 정의가 넘쳐나서일까? 그렇다기에는 다들 세상에 너무 불만들이 많던데? 그러니까 더 정의롭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대로 살고 싶다. 본능대로. 욕망이 시키는대로. 관성과 관습대로. 지쳐버린 모양이다. 어쩌면 너무 고단한 현실에. 그렇다고 동정하는 건 오만이겠지. 그냥 넋두리다. 너무 피곤해서. PC가 지겹다. 반PC 가 말하는 PC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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