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로열패밀리 - 인간의 증명은 없었다!

까칠부 2011. 4. 29. 08:43

제대로 농락당한 기분이다. 아니 원래부터 필자의 쓸데없는 설레발이었을까? 죄도 없고, 단죄도 없고, 용서도 없고, 구원도 없다. 단지 주제의식 없는 오해와 허무하기만 한 성공과 잘 꾸며진 마무리가 있을 뿐이다. 진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를 쓰는데 있어 절대 피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알고 봤더니 모든 것이 꿈이었더라. 알고 봤더니 모든 것이 오해였다.

 

좋다. 오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해는 오해로 끝나야 한다. 꿈이었다고 하는 것도 그리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제까지의 모든 과정을 꿈만큼이나 허무하게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껏 읽고 듣고 보고 있던 입장에서 과연 어떻겠는가? 그동안의 긴장과 갈등과 흥분은?

 

결국은 조니 헤이워드의 자해로 인한 소동이었다. 누구도 조니 헤이워드를 죽이지 않았다. 조니 헤이워드 자신이 어머니인 김인숙(염정아 분)으로부터 외면당한 데 따른 절망감으로 스스로 자해했고, 그것을 김인숙이 JK클럽 사장 취임식을 위해 방치하고 자리를 뜸으로써 조니 헤이워드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조차도 조니 헤이워드가 어머니인 김인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JK클럽으로부터 멀어지려 한 것일 뿐 정작 김인숙에게 직접적인 책임이란 아무것도 없다 할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보살피지 않은 책임이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연 김인숙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물론 법적으로야 무죄다. 그러나 작가는 한지훈(지성 분)과 검사시보 이유선(이다희 분)의 입을 빌어 말한다. 인간으로서는 유죄라고. 그러면 김인숙에게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죽음에까지 이를 상처는 아니었다. 치료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치료받고 살아날 수 있었고, 김인숙이 자리를 지키지 않았어도 집사 엄기도가 있었다. 조니 헤이워드가 그 자리에만 있었더라도 그는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김인숙의 죄는 어머니를 지키고자 스스로 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한 조니 헤이워드에 대해 그 의도를 알지 못하고 미리 막아내지 못한 것뿐이었다. 조니 헤이워드의 생각을 알지 못했던 것,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를 미리 예측하지 못했던 것, 그것은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조니 헤이워드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조니 헤이워드 자신의 선택이었다. 자살이었다. 스스로 자기 배를 찔렀고, 그리 깊지 않은 상처였음에도 치료받으려 하기보다는 김인숙과 JK클럽으로부터 멀어지려 한 결과 과다출혈로 이어져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뿐이었다.

 

원작에서는 달랐다. 원작에서 조니 헤이워드의 죽음은 어머니 코오리 쿄코의 의지였다. 자신을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아들 조니 헤이워드를 증오하여 코오리 쿄코는 그를 칼로 찔렀고, 조니 헤이워드는 그런 어머니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절망감에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머니를 지키고자 최대한 현장으로부터 멀어지려 한 것까지는 같지만, 조니 헤이워드 자신을 찌른 것도,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동기도 원작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동기도 없었고 의도한 바도 없었다. 단지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조니 헤이워드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조니 헤이워드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부정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로 인해 조니 헤이워드가 스스로 배를 찌르고, 죽음에 이르도록 자신을 방치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해 김인숙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하겠는가?

 

죄의 무게가 다르니 주제의 무게도 달라진다. 원작에서 코오리 쿄코는 끝내 법의 심판을 받는다. 그녀의 죄에 대해 경찰의 집요한 수사 끝에 심판받고 단죄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인간의 원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인간을 죄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상실과 인간의 증명에 대한 주제를 첨예하게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로열 패밀리>에서의 김인숙은 어떤가?

 

누구도 그녀를 심판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녀의 죄를 단죄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에게 죄가 있기나 한가? 법에 의해 처벌도 받지 않았고, 주위로부터 도덕적인 책임을 물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심판하고 단죄한 것은 공순호(김영애 분)의 의지였다. JK라고 하는 부와 권력을 지키고자 했던 공순호의 의지가 감히 JK에 도전하고 그것을 욕심내려 했던 김인숙과 한지훈을 죽음으로써 단죄하고 심판한다.

 

하기는 그래서 제목도 <로열패밀리>다. 어쩌면 필자가 잘못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원작이 <인간의 증명>이라는 것은 단지 작가의 기믹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 원죄에 대한 질문을 던지던 원작에 비해 작가가 <로열패밀리>를 통해 그리고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분수와 주제를 넘어선 탐욕에 대한 조롱과 응징이었을 것이다.

 

“이 조현진이 너희 따위가 감히 조종할 수 있는 사람 아니잖아! 나 JK사람이야!”

 

로열패밀리는 어디까지나 로열패밀리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세계에 산다. 하물며 김인숙은 보통 사람 이하에 속하는 사람이다. 로열패밀리에게 그녀는 하나의 병균과도 같다. 곪고 썩게 만드는 질병이다. 그 존재 자체로도 로열패밀리의 존엄을 위협하는 독이다. 그런데 감히 JK를 욕심냈다. JK의 공순호 회장의 자리를 넘봤다. 단죄라면 바로 그에 대한 단죄일 것이다. 죽음에 이른 공순호 회장의 마지막 ‘피날레’와 그를 담담히 받아들이려 하는 김인숙의 모습이라는 것은. 그녀와 운명을 함께 하는 한지훈도 역시.

 

그래서 공순호가 김인숙을 단죄하는 것이다. 법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윤리가 아니라. 다름아닌 공순호의 탐욕과 집착에 의해 김인숙은 심판받는 것이다. 조니 헤이워드의 죽음이 아니다. 조니 헤이워드를 외면해서가 아니다. 그녀가 배제되어야 하기에. 그녀의 존재가 JK에 있어 용납될 수 없기에. 용납되어서도 안 되기에. 김인숙이 죽어야 한다면 바로 그러한 때문이겠지. 그리고 순리대로 JK는 조현진(차예련)에게로 돌아간다. 모든 죄도 악업도 사라진 현실은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고. 도대체 공순호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 김인숙의 죄를 심판한다는 것일까?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차라리 김인숙이 조니 헤이워드를 죽인 범인이었다면 어땠을까? 마침내 검찰의 수사에 의해 그 죄가 드러나고 법정에 서게 되고. 한지훈은 변호사로써 엄기도의 부탁대로 김인숙을 변호하게 된다. 김인숙이 인간임을 증명하고자. 김인숙이 인간임을 세상으로부터 증명하고자.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김인숙은 심판받고 단죄받고, 다시 속죄하고 용서받는다. 죄가 있고 죄를 인정하고 죄를 심판하고 단죄함으로써 속죄도 있고 용서도 있다. 아무런 죄에 대한 인정도 책임도 없이 속죄나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속죄와 용서 없이는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마지막 죽음에 이르는 김인숙의 웃음이 공허한 이유다. 그녀의 웃음에는 어떤 화해도 구원도 없었다. 단지 죄에 대한 도피가 있을 뿐.

 

그렇게 처벌을 받고, 책임을 지고, 자신을 농락한 세상과 운명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된 다음에 죽음을 맞이했으면 어땠을까? 모든 죄로부터 홀가분해진 다음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된 상태에서 죽임을 당해도 당했다면? 하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고 무엇도 책임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책임을 물리는 것은 그녀의 죄에 대해서가 아닌 단지 그녀를 여전히 ‘K’라 부르는 공순호의 증오와 거부다. 허무한 까닭이다. 이제까지 김인숙과 한지훈이 함께 싸우고 헤쳐 온 과정들이 무색할 지경이다.

 

아무튼 결국 그러고 남는 것은 불행과 절망에 길들여진 한 인간의 뒤틀리고 일그러진 자아일 것이다. 고작 자기가 찌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인 것이 아니라. 그토록 믿고 의지하는 한지훈에게 - 아니 엄기도마저 그 전말에 대해 알지 못했다. 추측할 따름이었다. 김마리라면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인숙이라면 찔렀을 수도 있다. 그것이 시청자로 하여금 끝까지 조니 헤이워드의 죽음에 대해 오판케 한 이유였다.

 

어째서 김인숙은 그런 명백한 사실들에 대해서마저 한지훈 - 아니 엄기도에게 그것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려 하지 않았을까? 당연한 심리로써 자신의 죄와 책임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일 텐데, 그녀는 오히려 사실을 숨긴 채 자기를 다그치려고만 들었을가? 원망하고 저주하고 마침내는 파멸에 이르기를 바라고.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도 - 그녀는 분명 공순호의 위독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을 때 그것이 그녀를 죽이고자 하는 공순호의 의지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예감하고 기다려 온 순간이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마지막을 자신과 함께 하려는 한지훈을 거부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이제까지 한지훈만은 자신으로 인해 말려들지 않도록 지키고자 했던 모습과도 모순된다.

 

그 상황에 도취된 것이다. 한지훈과 함께 최후를 맞는 상황에. 그것은 그녀가 꿈꾸던 구원이었다. 뒤틀리고 일그러진 그녀의 상상에서 그녀가 꿈꿀 수 있었던 유일한 구원이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죄이고, 따라서 그저 원망하고 증오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있어 한지훈만이 그녀의 순수했던 과거이며 유일하게 행복했던 지금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와 함께 했으면 바라는 소망이기도 하다. 사랑일까? 그조차도 그녀에게는 사치다. 그렇게 살아가는 데 이미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이미 불행과 절망에 길들여졌기에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된다. 매일같이 매를 맞다 보면 매를 맞지 않는 것이 불안하고 두려워지듯 불행과 절망이 당연한 것이 되었을 때 행복이란 오히려 불행보다도 더 절망스러운 것이 된다. 불행한 것이 오히려 마음이 놓이고, 절망하는 쪽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그것이 자신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다. 한지훈으로부터 원망을 듣고, 증오를 받고, 그리고 마침내 단죄되고. 그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 한지훈 앞에서 보여진 고백장면일 것이다. 추할 정도로 그녀는 불행에 빠진 자신을 훌륭히 연기해 보이고 있었다. 황홀하게.

 

그녀가 바라던 것이었다. 단죄받는 것. 그것이 한지훈에 의한 것이면 더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한지훈과 함께라면 그것도 좋다. 자살이다. 불행과 절망에, 그리 내몰릴 수밖에 없는 자신에 도취된 그녀가 선택한 자살. 그녀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 죽임을 당하는 것이 어울린다. 최후의 순간에 다른 이의 손에, 그것도 그녀를 불행과 절망으로 내몰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린다. 한지훈이었다면 더 불행했을 테지만, 한지훈과 함께이기에 그나마 행복을 거머쥘 수 있다.

 

아마 그것이 이 드라마의 주제일 것이다. 불행과 절망 가운데 그로부터 헤어날 의지마저 가질 수 없었던 한 안타까운 여인의 일생. 그렇게 길들여지고 도취되어 그렇게밖에는 살아갈 수 없었던 한 인간의 모습이다. 원작과는 상관없다. 그것은 인간의 증명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니. 실제 드라마상에서도 인간으로서 김인숙이 증명한 것은 아무것도 - 아니, 자살이야 말로 인간이 자신의 존엄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일 것이다. 멋지게 살 수 없다면 멋지게 죽을 수라도 있게.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는 장면들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솔직히 실망이 컸다. 17화까지 고조되던 긴장이 한 순간에 올올이 풀어지는 듯. 이런 것을 보자고 17화까지 숨가쁘게 달려왔던 것일까? 그토록 흥분하고 두근거리며 기대하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필자가 바라고 보고 기대해 왔던 것이 이런 것들이었는가?

 

어쩔 수 없는 한국 드라마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주인공이 존속살인범이라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김인숙이 미군을 상대로 한 기지촌 성매매여성이 아닌 처녀경매를 하는 소녀로써 묘사된 것과도 같은 맥락이 것이다. 공중파 TV드라마의 주인공으로써 양공주는 도덕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드라마란 - 아니 대중문화란 도덕적이고 엄숙할 것을 요구받는다. 설사 그것이 보다 깊이 있는 주제의식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양식이 도덕적이지 않다면 용납되지 않는다. 과연 내가 생각한 대로 김인숙이 원래 기지촌 성매매여성이었고 아들을 죽인 존속살인범이었다면 드라마의 주제의식은 제대로 시청자들에 전해졌을까?

 

막장이란 형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고자 하는가? 그를 위한 수단으로써 표현의 형식이란 존재하는 것이다. 비일상적이면서도 때로는 비도덕적인. 결국 그를 통해 무엇을 담아내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아직 사회의 저변이 성숙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도 났다. 작가에게 말 그대로 농락당했다. 그만큼 실망이 컸으니까.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컸다. 하지만 한국의 드라마 제작 현실에서 그럴 수밖에 없지는 않았을까.

 

제대로 용두사미를 그리고 있다 할 것이다. 꼬리뼈 하나를 남기고서는 장대하고 멋진 용이다가 꼬리뼈 하나가 지렁이가 되고 말았다. 눈만 그려 넣으면 용이 될 텐데, 눈이 파리 눈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이해하려 노력해도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바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기에.

 

2회 연장은 역시 무리였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지난주 16회에서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면. 기왕에 이렇게 끝낼 것 보다 깔끔하게 압축해 끝내 버릴 수 있었다면. 사족도 너무 많았다. 굳이 필요했던가 싶은 장면까지. 힘이 빠지려 했다.

 

17회까지만 기억한다. 김인숙이 실존적 죄에 대해 고민하고, 공순호가 자신의 탐욕에 대해 회의하는 그 순간까지만. 딱 거기까지만. 조현진은 역시 비중이 없는 조역이었다.

 

대미라는 말에 어울리는가? 예쁘기는 했다. 맥이라고는 없이 그저 예쁘기만 했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생각없이 보고 있기에는 그림들이 참 아름다웠으니. 역대 가장 허무했던 드라마로 기억하리라. 아쉽고 안타까웠다. 실망보다 더 큰 안타까움이었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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