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49일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까칠부 2011. 5. 20. 11:26

죽음이란 끝이다. 마지막이다. 살면서의 모든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원망, 그리고 온갖 허위와 가식들이 죽음과 함께 소멸한다. 그래서 죽음에는 정화의 의미가 함께 따라 붙는다. 정화란 곧 진실이다. 죽음에 이르러 사람은 진실을 마주한다 하지 않던가.

 

살아서야 이런저런 인연과 이해로 얽히며 서로 가면을 쓰고 대하게 된다. 아버지로써, 어머니로써, 딸로써, 연인으로써, 친구로써, 선배로써, 후배로써, 그러나 더 이상 그런 모든 것들이 의미 없어질 때 사람은 비로소 가면을 벗고 진실로써 대하게 된다.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죽음은 모든 거짓을 지우고 진실을 드러낼 것이라고.

 

죽은 뒤 심판이 내려지리라는 믿음은 그래서 생겨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시체를 묻는 깊은 구덩이였다. 두렵기 그지없는 깊은 심연.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살아서의 삶을 심판하는 곳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옥이라고 불렀고 천국이라고도 불렀다. 살아서의 일이 죽은 다음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이 윤회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49일이란 불교에서 죽은 이의 살아서의 업에 대해 판단이 끝나기까지의 기간이었다. 7일마다 한 번씩 경을 외우고 복을 빌어 보다 좋은 업으로써 더 나은 다음 생을 맞이하도록 남은 이들이 정성을 다하는 시간이었다. 드라마의 제목이 49일인 이유였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49일 동안 진심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가장 순수한 눈물 세 방울이 필요하다.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았는가? 얼마나 가치 있게 살았는가? 살아서에 대한 판단으로 다시 한 번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것은 또한 심판이다. 산 사람들의 잔인한 심판.

 

왜 하필이면 진심어린 눈물 세 방울이었을까? 어느 때 눈물을 흘리는가? 내가 아쉽기 때문이다. 내가 안타깝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가 애닲고 애닲아서, 그리고 그 빈자리를 감당해야 하는 자신이 너무 힘들고 너무 아파서.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야 말로 가장 진실한 눈물일 터다.

 

과연 인간은 내가 필요해서 사는가? 나를 필요로 하기에 사는가? 물론 자신을 통해 자신을 완결할 수 있는 이들도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누군가를 통해 자신을 보게 된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고. 나 자신의 가치는 나를 대하는 다른 이를 통해 결정된다.

 

단지 나를 사랑하는 단 한 사람만 있어 주어도. 나를 필요로 해주고, 나를 인정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었어도. 신인정(서지혜 분)가 친구인 신지현(남규리 분)를 배신하게 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친절을 베풀고 우정을 나누면서도 정작 신인정에게는 그 어떤 것도 묻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마치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간인 것처럼 일방적으로 도움만을 받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 모멸감이란. 그 자괴감이란.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를 통해서도 나타나는 심리다. 모멸감과 자괴감은 열등감으로 발전하고, 열등감은 자신의 존재를 끌어올리려는 향상심과 더불어 상대를 끌어내리고자 하는 질시와 폭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오히려 신지현을 친구로써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녀를 뛰어넘으려 하기보다는 자신에게로 끌어내려 맞추려 든다. 그것은 신인정 나름의 신지현에 대한 우정이었을 것이다.

 

과연 그런 때에도 신지현은 여전히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순수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여전히 일방적으로 베풀고 배려하고 할 수 있겠는가? 그보다는 그렇게 되었을 때 자신이 손을 내밀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손을 내밀어 의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 신지현이 처음 사골르 당하고 누구보다 서럽게 울던 모습이나, 어떻게 해도 신지현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지막 눈물을 더하던 것이 그래서였다.

 

송이경(이요원 분)이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나, 신지현이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울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지레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나, 당장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신지현은 남은 눈물을 모으기보다는 강민호(배수빈 분)로부터 아버지의 회사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더 이상 눈물을 모아 살아나는 것은 관심사항이 아니라는 듯.

일찍이 톨스토이는 갈파한 바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으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자. 누군가에게 절실한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자. 가족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을 잃었을 때 송이경은 차라리 죽을 것을 선택하려 한다. 부모로부터도 버림받았고, 오랜 연인으로부터도 버림받았으며, 마침내 연인과 죽음으로 인해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을 때.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다는 것은 사회적인 죽음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일깨운 것은 너무나 절실한 신지현의 의지.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녀에게 필요하다면.

 

그래서 정작 눈물을 흘려줄 아무도 없음을 알았을 때 신지현도 자포자기하고 만 것이었다.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누구도 자신에게 진실로써 대하지 않았다고 하는 절망감에. 그리고 그녀를 일깨운 것도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 남은 이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다.

 

내가 좋아해서가 아니라 나를 좋아해 주어서. 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해 주어서. 내가 간절해서가 아니라 나를 간절하게 여겨 주었기에. 아니 내가 간절하다는 자체가 바로 그러한 간절함을 바라는 것일 게다. 그것이 살아가게 한다. 죽어서도 살아가게 한다.

 

신지현은 죽었는가? 하지만 그녀를 필요로 하고 그녀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녀가 죽고 나서도 모두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바로 그러한 관계 속에서 영원을 얻는다. 신지현이 죽어야 했던 이유였다.

 

강민호가 눈물을 흘렸다. 신인정이 어느 때보다 진실한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진실로써 마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민호는 그런 신지현을 사랑했고, 신인정은 그런 신지현 앞에 솔직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길들여진 것이었다.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었다.

 

송이경이 신지현의 친언니 신지민으로 밝혀진 것도 그래서였다. 혈연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을 꿈꿀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지현이 떠난 빈자리를 송이경이 대신한다. 그녀를 기억하고 그녀를 추억하고 그녀를 여전히 필요로 하며 그녀를 떠올린다.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상당히 철학적인 내용이었을까? 그보다는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무의식이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과 재생, 혹은 부활에 대한 기대, 무엇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까지. 진실과 정화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이기도 하다. 단지 그것이 21세기에 걸맞는 감각적이면서도 세련된 이야기로 구체화되었다.

 

그다지 치밀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절한 스케줄러와 사후세계에 대한 설정과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감각이 놀라웠고, 그 안에 진지하면서도 근원적인 낙천과 긍정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에는 감탄사가 저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매력이 대단한 것이 배우들을 보는 즐거움에라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마 <로열패밀리>와 같은 시간대에 붙지 않았다면. 뒤늦게 알고 따라잡기는 했지만 겨우 마지막회에서야 늦지 않게 맞출 수 있었다. <프레지던트>와 <싸인>에 이은 <로열패밀리>와 <49일>, 수목의 드라마 시간대는 그야말로 드라마의 황금시간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가 이타가 되는 이유. 이타가 이기가 되는 이유. 사람이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이유.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유. 자존이란, 자아란 바로 그러한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확인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남을 위하고, 남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한다.

 

신지현과 송이경 두 사람을 연기한 이요원의 연기력은 놀라웠고, 남규리의 외모는 한결 나아진 연기력으로 한결 매력을 더했으며, 정일우의 스케줄러 캐릭터는 드라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서지혜와 배수빈의 갈등하는 내면연기도 훌륭했었다. 좋은 작품에 어울리는 멋진 배우들이었다고나 할까?

 

흥미로운 소재에, 탄탄한 대본에, 감각적인 연출, 여기에 탁월한 매력과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까지. 주제도 깊다. 마무리까지 수미일관하여 깔끔하게 매조지한 것이 완성도가 돋보인다. 어째서 이런 좋은 드라마를 늦게서야 알게 된 것인지. 아쉬움이 크다. 재미있었다. 만남이 기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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