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누구나 도망치고 싶은 때가 있다.

까칠부 2011. 5. 30. 11:12

여행을 떠나는 전날, 멤버들과 스탭들과 함께 준비를 하면서 김태원은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최근에 너무 스케줄이 많아 가지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아. (그런데)남자의 자격이 또 나를 살려주는구나."

 

아마 이 말이야 말로 <남자의 자격>의 이번 "아저씨, 배낭여행을 가다"편의 주제일 것이다.

 

자아를 찾는다고 한다. 나는 여기 있는데 어디서 다시 자아를 찾는다고 하는 것일까?

 

항상 같은 음식만 먹다 보면 어느새 질리게 된다. 질린다는 말은 미각을 잃는다는 뜻이다. 맛있는 것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고, 감동도 모른다. 그저 먹으니까 먹는가보다.

 

한 일주일만 라면을 먹다가 밥을 먹게 되면 밥의 향기가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다. 매일 먹는 밥인데 그 밥이 익는 향기와 밥알 하나하나가 주는 감동이 그렇게 놀라울 수 없다.

 

어느새 일상에 치여 마모되어 가는 나로부터 새로운 나를 찾아간다. 일상에 마모되어가는 나를 잠시 일상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새로운 환경,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새로이 연마해간다.

 

삶에 지쳤을 때 무심코 떠나고 싶은 마음이란 그래서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기도 한 것이다. 여행이 설레는 것은 그래서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체험, 그리고 그 안에서 새삼 깨닫게 되는 또 다른 나. 일상에 매몰되어 묻혀 있던 나를 새로운 환경 속에 끄집어내게 된다. 새로운 체험 속에 느끼게 된다. 자신감이 생기고 활력이 생긴다.

 

아마도 그런 본능이 있었기에 인간은 멀리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아시아로, 멀리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건너갔을 것이다. 동남아시아로부터 바닷길을 항해하여 한반도의 남부에 이른 사람들과 몽골고원을 거쳐 시베리아를 지나 북만주로 남하해 들어온 사람들과 중국대륙을 지나 들어온 사람들. 아마 그래서 나라는 존재도 있을 것이다.

 

여행은 인간의 본능이다. 아무리 귀찮고 막연한 두려움에 여행을 꺼리던 사람들이라도 막상 여행을 떠난다 하면 그래서 그리 설레고 두근거리는 것이다.

 

하필 호주. 하지만 적당하다. 전혀 다른 환경. 북반구와 남반구, 그리고 현대의 첨단문명과 원시의 자연. 물론 유럽이나 터키였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 또한 다름일 터이니. 그곳이 어디면 어떠한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곳이 바로 새로운 경험일 터인데.

 

호주가 광활하다는 것은 차를 타고 이동하는 멤버들을 통해 알았다. 말이 없다. 이경규와 김국진마저 말이 단조롭다. 어디 천안까지 가는데나 시끄럽게 떠들고 하지 대구만 가려 해도 말문이 막힌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춤추고 노래라도 부르지 않는 동안에는.

 

거대한 흰개미집과 캥거루와 야생소, 그리고 적막하게 지나다니는 차들, 아무것도 없이 아득하게 펼쳐진 지평선. 그리고 말없이 그저 차 안에 앉았는 멤버들. 공원 하나 크기가 한반도의 면적이다. 5천만이 그 좁은 땅덩어리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스케일이다. 문득 나 또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그래서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이 김태원의 무전기놀이. 히말라야 등정이 나오고, 12.12 군사반란이 나오고, 6.25 한국전쟁까지 나온다.

 

"각하는 이미 궁정동에서 사고를 당했고! 저기 중앙정보부쪽으로 가야지 육본으로 가면 안 된다니까!"

 

다만 아쉽다면 역시 이윤석의 감이 떨어진달까? 원래 지구력이 떨어지는 김태원이 더 이상 끌고 가지 못하고 이윤석에게 넘겼을 때,

 

"김태원 육본 지금 사망했습니다!"

 

조금 더 재미있게 끌고 갈 수 있지 않았을까? 기왕 김태원이 원맨쇼를 벌이며 판을 만들어 주었다면 그것을 이어받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양준혁이야 야구를 하다 온 예능초보라지만 그래도 남자의 자격만 몇 년을 했던 데뷔 20년차를 바라보는 베테랑 개그맨으로써 그 정도 센스도 발휘하지 못하는지.

 

어째서 김태원인가. 어째서 국민할매인가. 어째서 록커로써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까지 고민하게 되었는가. 예능에 얼굴을 보인지 어느새 벌써 3년이 다 되어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가 경이적인 이유다. 수많은 비예능인출신 예능인들이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예능에 발을 들이밀었지만 이내 사라지고 마는 가운데 아직까지도 그가 화제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이유다. <위대한 탄생>에서의 감동멘트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번 방송분에서만큼은 김태원이 에이스였다. 이경규와 김국진의,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한 앙숙관계에 의존하던 밋밋하고 지루하기까지 하던 내용 가운데 오로지 그 한 장면에서만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정말 이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어쨌거나 여행지에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설레어하며 새로운 풍광과 사물들에 신기해하고 놀라워하는 모습들이라니. 진짜 아이가 된 것 같다. 아이가 되고 또 아이가 되고 그러면 태어나기 직전으로 돌아가겠지? 알몸의 아기로. 갓 태어난 그 모습으로.

 

"와인을 한 병 사가지고 최고의 절경을 만났을 때 와인을 따는 거지. 완전 나체로!"

 

아마 그런 생각에 문득 떠오르게 되는 대사일 것이다. 김태원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하늘과 땅과 사람과. 그리고 피와 같은 한 잔의 와인. 신선놀음일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나도 역시 떠나고 싶어지는 여행이었다. 웃음기를 오히려 쏙 뺀, 또래 남자들의 당연한 여행에 대한 반응들이 더욱 여행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건드린다. 정말이지 주제 한 번 보는 사람 속에 열불이 치밀도록 잘 골랐다는 생각이다.

 

마침내 김국진은 가방을 잃어 버리고. 복선이었을까? 총무를 맡으라 했을 때 한 번도 총무를 맡아 본 적이 없다. 물건을 잘 잃어버린다. 하지만 카메라에 찍힌 가방의 모습은 우연히 그리 찍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너무 의심이 많아도 안 좋지만. 밋밋하던 가운데 유일하게 활력과 긴장이 감돌았다. 결국에 목표한 기간을 다 채우고 돌아왔음을 알면서도.

 

역시 이런 돌발적인 사건이 있어주어야 한다. 인물과 관계와 사건, 서사의 기본이다. 어찌되었거나 재미있게 마무리될 수 있었으면. 아주 딱 좋은 때 끝냈다.

 

지금도 머릿속에 맴도는 장면 하나. 벙글벙글의 절경을 앞에 두고 나체가 된 김태원, 양준혁, 이윤석, 세 남자. 한 잔의 와인과 뜨거운 햇살. 파란 하늘과 붉은 대지. 아아...

 

배가 아프도록 멋진 여행이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도. 앞으로 4주. 용두사미가 되지 않기를. PD가 장담하는 바 멋진 그림들을 기대해 본다.

 

호주는 아름다웠다. 남자들은 설레었다. 보는 사람은 부러웠다.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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