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었을까? 만화였을까?
"희망을 가지게 한 네 잘못이야!"
도움을 주고자 한 영웅을 도리어 함정에 빠뜨리며 누군가 절규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인간 세상의 모든 불행이 나왔다고 하는 판도라의 상자, 그러나 그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는 희망도 함께 남아 있었다. 과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모든 불행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기에 희망은 판도라의 상자에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일까?
희망의 다른 말이 바로 미련이다. 미련이란 기대다. 그리고 믿음이다. 어떻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희망이라면,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바로 미련이 된다. 그리고 그 미련이 사람의 마음을 잡아먹어 버린다.
간단한 예다. 매일같이 출근길에 마주치는 거지가 있다. 그래서 마주칠 때마다 있는대로 천원씩 동냥을 하고 했었는데, 그런데 어느날 그만 마침 가진 돈이 없어 동냥을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과연 매일같이 천원씩 동냥해주던 사람이 그날따라 동냥을 않고 그냥 지나쳤을 때 거지의 반응은 어떠할까? 매일같이 돈을 주던 사람이 오늘따라 돈을 주지 않고 지나쳤으니 사정이 있겠거니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고 말까?
배정자(이휘향 분)의 경우가 그렇다.
"독한 노인네, 그 세월동안 손자를 찾아 왔으면서 그렇게 두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그런 기대를 줘?"
하지만 정작 독한 노인네 강정혜(정혜선 분)가 배정자에게 따로 약속하거나 한 것은 전혀 없었다. 외손자에 대한 것이야 어쩔 수 없이 그동안 감춰왔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 재산이며 회사를 배정자나 그 아들 고석빈(온주완 분)에게 물려주마 단 한 번도 언질이라도 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손자가 아니었으면 사위인 고진국(최재성 분)이 물려받겠지만, 단지 고진국이 현재 상처한 상태이고 자식이 없다는 것이 배정자가 그동안 기대를 품어왔던 이유였다. 즉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멋대로 김칫국부터 마시고 떡을 주지 않았다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강정혜에게도 자식이 없고, 고진국에게도 자식이 없다는 사실이 기대를 품게 만들고, 강정혜와 고진국이 베푼 친절이 기대를 믿음으로 바꾸고, 순탄하게 이어지는 상황들이 믿음을 희망으로 바꾸고, 그 희망이 끝내 허튼 것이었음이 드러났을 때 실망은 이내 희망에 대한 미련으로,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나타난다. 집착이 시작된다.
사실 현실에서도 많은 경우 나타나고 있는 모습들이다. 아마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 가운데 이와 관련한 것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너무나 당연한 권리라고 여기며 저지르는 무수한 행위들. 때로는 끔찍한 범죄들에 대해서도. 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주위가 나를 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정당한데 주위가 나를 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석빈은 되찾아가던 순수로부터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배정자의 허황된 기대와 믿음으로 인해 그는 어느새 자기 것이라 여겼던 것들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그가 잃어야 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버리기로 마음먹으며. 도미솔은 그가 놓아두고 온 과거의 짐이며 그가 잃었던 순수였다. 증오는 항상 순수보다 강하다.
어찌 보면 참 멀리도 돌아가는 드라마다. 그냥 고석빈 나쁜 놈이다. 배정자 나쁜 여자다. 그래서 나쁘게 행동한다. 욕심도 많고 탐욕도 강해서 그렇게 못되게 굴고 행동한다. 그랬으면 그랬으면 아마 지금까지의 분량 정도는 5회 안에서 끝나고 말았으리라. 이제까지의 내용 가운데 상당부분이 배정자와 고석빈에 대한 묘사로 할애되고 있었으니. 악역 배정자, 고석빈의 비긴즈라고나 할까? 덕분에 무려 16회나 지나고서야 고석빈은 강정혜의 회사에 대한 허튼 욕심으로 인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제대로 된 야심가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느려도 한참 늦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들이 필자를 매료시키는 것이기에.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짧은 회상신 몇 개로 설명되는 그런 간단한 캐릭터가 아니다. 선과 악. 순수와 욕망. 이상과 현실. 바로 직전까지도 고뇌하고 번민하던 고석빈을 통해서 한 인간이 탐욕에 이끌리고 순수를 잃어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고석빈의 순수란 단지 현실의 여유가 주는 허세에 불과했던 것이다. 도미솔에게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 그러나 그런 여유가 사라졌을 때 그는 냉정히 도미솔을 외면하고 다시 조윤정(전혜빈 분)을 찾아간다. 마음에도 없이 아내 조윤정을 안으며 얼굴이 굳어간다. 비록 순수하고자 하던 그 순간은 진실이었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나약함을 되짚는 것이다. 순수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 없이 나약함이란 어떻게 악에 물드는가.
하기는 그렇기 때문에 배정자도 하마트면 살인자가 될 뻔 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해도 배정자에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배포나 독심이 있을 리 없다. 그녀가 가진 독기라고 해봐야 기껏 소문을 퍼뜨려 친구인 봉선아(김미숙 분)을 동네에 살지 못하게 하는 정도였다. 그조차도 그녀는 무척이나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진심으로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는 그녀의 안에서는 어떤 생각들이 휘몰아치고 있었을까? 끝내 어떻게 독하게 일을 꾸미기보다는 그래도 알아주겠거니 현실과 타협하고 마는 그녀에게.
인간의 악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이 악한 것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어쩌면 매우 심오할 수도 있는 디테일한 묘사라고나 할까? 전혀 악의없이 주변 인물들에 고통을 주고 마는 봉우동(문천식 분)과 정말자(사미자 분)의 캐릭터처럼. 악의없이도 사람은 악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미혼모라고 하는 현실에 당당하고자 하는 도미솔의 강한 의지가 이와 대비된다.
참으로 오래된. 어쩌면 최근의 호흡빠른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세심한 묘사들이 드라마의 맛을 더욱 높여준다고나 할까? 그리고 바로 그런 것들을 위해서 드라마는 무리해서까지 등장인물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디테일로 인해 방대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최소한으로 한정짓기 위해서. 바로 독하게 마음가짐을 바로 한 고석빈 앞에 나타난 강정혜의 친구 손자 이소룡(이재윤 분)처럼 말이다.
아무튼 적절한 조화라고 생각한다. 고석빈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을 때 나타난 이소룡. 고석빈과의 지나치게 무거운 음울한 분위기가 이소룡과 만나며 어느새 유쾌함으로 희석된다. 단순하기까지 한, 다른 계산 없이 솔직한 직구의 이소룡이 고석빈이 갖는 복잡하고 가라앉은 느낌과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고석빈이 강정혜의 외손자의 존재를 인지하고 도미솔을 완전히 포기하기로 한 시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자연스럽게 이소룡과 도미솔의 커플과 고석빈과의 대립구도가 만들어진다. 도미솔이 방송국에 입사하면 조윤정 역시 그 대립구도에 포함되리라.
그리고 변수라면 역시 봉선아와 고석빈의 큰아버지인 고진국의 관계일 것이다. 그저 허투루 만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필 하숙집 딸과 하숙생이라는 설정에서, 지나치게 친절한 고진국의 모습까지. 고진국의 주위관계가 변화했을 때 이야기 전체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역시 봉선아다. 이때 도미솔의 딸 영웅이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더불어 도미솔이 고등학생 시절 임신했었던 사실을 알고 있는 친구의 존재가 그녀에게 끼칠 영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동안 도미솔이 미혼모라는 사실은 봉선아의 보호 아래 철저히 묻히고 있었다. 드라마의 주제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너무 오랫동안 감추고 묻어두고 있지 않았을까. 도미솔이 사회와 부딪히고 싸워 이기려면 일단 그 사실이 알려져야 한다. 다른 누군가 알릴 사람이 없으니 결국은 그 친구가 아니겠는가. 고의든 아니든. 또 어떤 난관이 도미솔을 기다릴까?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섰다. 참 멀리도 돌아 이제 겨우 본격적인 갈등과 대립이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크지만. 이렇게 멀리 돌아오면서도 지루함이 없는 것은 역시 캐릭터가 살아있는 때문일 것이다. 작은 사건에도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다이나믹하게 반응하며 전혀 지루한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단지 그것을 보는 것만도 재미있다.
과연 다음주는... 강정혜의 잃어버린 손자와 도미솔과 이소룡의 관계, 그리고 돌변한 고석빈의 존재. 흥미는 깊어간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터라 더 그렇다. 기대한다. 재미있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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