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내사랑 내곁에 - 보통사람을 악인으로 만드는 주문...

까칠부 2011. 7. 10. 09:37

보통의 선량한 사람을 타락시켜 악인으로 만드는 주문은 의외로 간단하다.

 

"너를 위해서..."

 

그리고,

 

"이번 한 번만..."

 

그것은 이기가 아니다. 희생이다. 자신의 양심과 존엄마저 저버리는 가장 고귀한 희생이다. 더구나 이번만이다. 다시는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납득하게 된다.

 

"내 욕심만 차리자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거대한 제방도 결국 무너지는 건 아주 작은 보이지도 않는 균열부터라는 것이다. 한 번이 가능하면 두 번도 가능하다. 여기까지가 가능하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면죄부가 되어 준다. 희생이란 항상 아름다운 것이다.

 

분명 배정자(이휘향 분)에게 강정혜(정혜선 분)은 큰 은인일 터다. 무어라 해도 가난하고 힘들던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이만큼이나마 살게 해 준 것은 모두 강정혜까 보살핀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강정혜가 잃어버린 손자를 찾는 것을 방해하게 위해, 나아가 그 손자를 자신이 먼저 찾기 위해 배정자는 태연히 강정혜의 약에 설사약을 탄다. 사람을 협박하고 매수하여 강정혜에게 거짓을 전한다.

 

양심이 있고 염치가 있다면 사람으로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배정자에게는 이미 그러한 추궁으로부터 빠져나갈 구멍이 준비되어 있다. 바로 아들 고석빈(온주완 분). 고석빈을 위해 친구인 봉선아(김미숙 분)와 봉선아의 딸 도미솔(이소연 분)을 궁지로 내몰았듯, 바로 그 고석빈에게 이번에는 진성기업을 안겨주기 위해 배정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강정혜를 배신하고 패륜까지 저지른다.

 

한 번이겠지. 아니 처음부터 한 번이었다. 아들을 위해. 아들 고석빈을 위해. 그래서 자존심을 굽히고. 스스로의 존엄을 무시하고. 양심이란 인간의 존엄에서 나온다. 오롯이 존엄한 이성적 판단에서 양심이라는 것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미 아들 고석빈을 위해 그 존엄을 꺾었으니. 아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는데 그깟 범죄쯤이야.

 

현실에서도 그래서 가족을 위한다는 이유로 범죄를 저지르고 부정을 저지르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악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못되서가 아니다. 약하니까. 그리고 약한 주제에 그렇게 자신을 속이고 자기를 꺾을 수 있을 만큼 독하니까.

 

배정자는 그다지 나쁜 여자가 아니다. 아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나약한 자신들과 닮아 있을 것이다. 단지 그녀의 앞에 놓인 탐욕이 너무 컸고, 그런 만큼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모정은 더욱 극단을 치닫게 되었을 뿐이다. 과연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자식이 밖에서 여자친구를 임신시켰다 하고, 바로 앞에 진성기업이라는 커다란 이익이 있는데도 배정자처럼 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누군가는 양심이라는 것을 지키겠지만, 어려서부터의 지독한 가난에 대한 기억은 배정에게서 그럴만한 의지와 용기를 빼앗아가 버렸다.

 

사람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라는 것이다. 욕망에 약하고, 인정에 약하고, 관계에 약하고, 그런 약한 자신에 약하다. 그리고 차라리 약하기만 하면 좋은데 독하기까지 하다. 독한 것은 살아남기 위한 살아있는 모두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악하다. 순자가 말한 성악설도 바로 그런 욕망과 본능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일 텐데. 자신의 욕망과 본능을 절제하는 법을 배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보다 보편적인 이해라는 것을 고민하고, 양심과 이성에 따라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과 해도 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번에는 고석빈에게 그런 과정이 생략되어 버렸다.

 

스스로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어머니 배정자가 모두 대신해서 고민했고 대신해서 책임져 주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고석빈은 어머니의 등뒤에 숨어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있었을 뿐이다.

 

고석빈이 도미솔에 대해 보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집착의 이유다. 보통은 결혼을 하고 잊지 못하고 있던 옛사랑이 나타났다고 바로 이혼하고 그녀와 사귀겠다 결심같은 것 하니 않는다. 결국 그렇게 결론이 내려지더라도 그러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더구나 자기가 그런 식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을 외면한 채 배신하고 도망쳐 버렸다면 미안해서라도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에 대해 화를 내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양심 이전의 당연한 양식이고 이성일 것이다.

 

그런데 고석빈은 한다. 마치 자제를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마치 진성기업이 자기 것이기라도 한 양. 도미솔이 자기 여자이기라도 한 양. 도미솔이 오로지 자기만을 바라보고 여전히 잊지 못한 채여야 한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자신의 고집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떼를 쓰듯 히스테리를 부리기까지 한다. 그것은 마치 정서불안에 빠진 어린아이의 모습과도 같다.

 

어머니 치마폭에 싸여 있었으니까. 모든 것을 어머니 배정자가 대신해 주었고 단지 어머니의 뒤에 숨어 맡기고만 있었을 뿐이니까. 직접 세상과 부딪히고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 자체를 어머니 배정자의 과보호 속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고석빈이 때로 보이는 순수한 내면과 탐욕스런 외형은 바로 그로 인한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의 솔직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다. 아이가 그러면 천진하다 하겠지만 어느새 이익을 따지기 시작한 어른이 그러면 악하다고 그런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내 배정자와 고석빈의 캐릭터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이 두 사람의 감정이나 인성의 변화가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미있다. 그다지 악한 캐릭터가 아닌데 결국 악인이 되어가는 과정. 악인이 아님에도 악행을 저지르는 그 동기가. 악역이 없는데 악역이 있다. 세상이란 딱히 악인이 없어도 악이 행해지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있다.

 

아무튼 덕분에 도미솔과 이소룡(이재윤 분)의 사이가 가까워졌으니까. 이제까지 의식적으로 이소룡을 거부하던 것이 고석빈의 집요함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는 사이 이소룡에게서 남자를 느껴버린 모양이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호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려는 조짐이 보인다. 결국 이야기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겠지. 악역의 역할은 선인을 위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도미솔과 이소룡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고석빈과의 갈등도 첨예해질텐데. 더구나 이소룡이 고석빈의 큰아버지인 고진국(최재성 분)의 비서가 되면서 고진국의 후계를 노리는 고석빈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도미솔이 방송국에 입사해서 조윤정(전혜빈 분)과 관계를 만들어 나갈 때 그것은 또 어떻게 작용할 지. 이소룡의 고모 이주리(이의정 분)와도 방송국에서 마주칠 듯한데 봉우동(문천식 분)과의 관계까지 얽히며 또 하나의 드라마를 만들어갈 것이다. 확실히 신입사원인 오미솔이 조윤정과 맞서자면 그런 정도의 장치는 필요할 테니까.

 

여기에 고진국과 봉선아의 관계도 외손자가 죽었다고 강정혜가 여기게 된 지금 시점에 배정자에게 또 한 번의 긴장과 위기로 다가올 것이다. 강정혜의 외손자가 죽었어도 봉선아의 아들이 된 영웅이 고진국의 아들이 된다면 회사는 영웅이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므로. 영웅이의 출생에 대해 배정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작용할까? 고석빈의 순수를 일깨우는 장치가 되지는 않을까?

 

아쉽다면 내가 오판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 배정자가 송씨와의 관계에서 결국 사채까지 끌어들이며 수렁으로 빠져드는가 싶더니, 놀라운 반전이 도리어 배정자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유리한 고지에 놓이게 한다. 하기는 아직 끝나려면 멀었을 테니. 파멸은 천천히 준비해도 좋다.

 

공교롭게도 봉선아는 결원을 채우려 밤늦게 일하러 나가고, 봉우동은 이주리와의 전화로 인해 그것이 급하고, 그런데 하필 그런 때 고석빈이 도미솔을 찾아온다. 서류가방을 두고 나온 이소룡은 돌아가다 그것을 보고. 그러고 보니 이소룡의 어머니인 최은희(김미경 분)가 도미솔의 담임이었다. 도미솔의 임신사실을 아는 최은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여튼 재미있는 군상들이다. 아예 대놓고 재미있자고 설정한 봉우동과 이주리 등의 조역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배정자와 고석빈의 캐릭터만으로도 보는 재미가 있다. 도미솔의 꿋꿋함과 이소룡의 순수함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냄새가 난달까? 의외로 젊은 배우들도 연기가 녹록치 않아 삶의 냄새를 그대로 풍기고 있다. 평범하지만 좋은 드라마.

 

갈수록 악으로 빠져드는 배정자를 바라보며. 그런 배정자를 보며 고석빈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 고석빈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갈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일까? 드라마는 결국 사람을 보는 것이다. 사람을 보게 된다.

 

뭔가 조금 아닌가 싶은데 재미있다. 그 아닌가 싶을 것을 그래서 굳이 찾지 않는다. 재미는 느끼는 것이지 애써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즐거운대로. 재미있는대로. 그런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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