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계백 - 인물과 관계가 너무 단순하다. 도식적이다.

까칠부 2011. 8. 3. 09:14

사비성은 원래 지금의 부여군에 위치해 있었다. 웅진은 지금의 공주다. 그리고 부여와 공주는 모두 충청도에 속해 있다. 그런데 어째서 무진(차인표 분)의 후처 을녀(김혜선 분)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는 것일까? 아마 어떤 선입견 아니었을까? 신라가 경상도에서 일어났으니 백제는 전라도에서 일어났으리라. 어쩌면 지역주의가 만든 판타지로써.

 

처음 백제가 일어난 것은 한강유역이었다. 초기 백제의 수도였던 하남위례성이 지금의 송파구 풍납토성 자리다. 그리고 장수왕에 의해 개로왕이 죽고 백제의 지배세력이 남하하면서 자리잡은 곳이 지금의 공주인 웅진, 이후 동성왕이 터를 잡고 성왕대에 이르러 드라마의 무대가 되는 사비성으로 옮기고 있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사비성의 사(泗)와 사택씨의 사(沙)의 음이 같은 것을 들어 사비성이야 말로 사택씨의 근거지가 아니었겠는가 추측하고 있는데, 그만큼 근거지를 잃고 남하한 백제의 왕실에게 있어 일대의 대귀족이던 사택씨와의 연합은 필수적이었다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백제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백제의 중심지는 어디까지나 충청도 일대였다는 것이다. 전라도는 단 한 번도 백제의 왕실이 직접 지배한 적이 없다.

 

더구나 과연 고대사회에서도 주거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었는가?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디 이사라도 가려 하면 관할 지자체에 신고를 하고 등록을 해야 한다. 이민을 가려 하면 보통 절차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인구란 곧 생산력이며 군사력이다. 아직 기술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고대사회에서는 인구에 의존하는 바가 그만큼 더 컸었다. 관리가 필요하고 통제가 필요하다. 아주 최근까지도 따라서 국가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것이 바로 이들 인구 - 즉 인신에 대한 통제였다. 중앙정부에서 굳이 통제하려 하지 않아도 지방세력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권력을 떠받치는 것이 바로 이들이 제공하는 노동력과 군사력이었기에 지방세력 입장에서도 구성원의 이탈은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옛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이곳저곳 자유롭게 떠돌며 정착하는 삷이란 보통의 백성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할 수 있다. 보통 그렇게 일정한 주거지 없이 관의 통제에서 벗어나 떠도는 이들을 유민이라 부르는데, 유민에 대한 역대 위정자들의 대응이 어떠했는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착해 있는 백성들에게도 그들은 배척과 경계의 대상이었다. 과연 을녀는 어떤 사연으로 멀리 전라도에서 충청도인 사비까지 흘러와 살게 된 것일까? 더구나 그다지 유복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도시빈민의 비참함도 보이지 않는다. 전남편이 제법 행세하는 신분의 사람이었던 것일까?

 

다시 말하지만 호남과 백제는 사실상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비록 호남이 백제의 영토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백제의 영토 전부가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전근대사회에서 인구란 곧 생산력이고 군사력이었기에 그 통제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었다. 하기는 을녀의 전라도 사투리를 문제삼기에는 분명 충청도인 사비성에서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당시 충청도 사투리는 백제의 지배계급이 쓰는 이를테면 표준어이기 때문인 것일까?

 

아무튼 참 쓸데없는 전개였다. 당장이야 사택비(오연수 분)이 원망스럽겠지만, 그러나 정작 백제 왕실의 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도 다름아닌 사택적덕(김병기 분)의 사택씨였다. 사택비를 암살하여 제거하고 사택씨의 세력을 약화시키면 다른 대성팔족의 세력이 왕권을 위협하게 된다. 그렇다고 사택비와 사택적덕을 죽인다고 사택씨의 세력이 모두 무왕(최종환 분)의 세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백제가 왕권을 강화하기까지 무왕에서 의자왕으로 이르는 오랜 준비과정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물론 무왕 자신이 주도한 계획은 아닌 것으로 나오고 있지만.

 

결국은 아직 어린 계백(아역 이현우)과 의자(노영학 분), 은고(박은빈 분), 초영(한보배 분)이 한 자리에 모여 얼굴을 익히기 위한 상견례용 이벤트였다고 할 수 있다. 하필 암살이 있던 그날 의자는 과음을 하고, 과음을 한 의자를 대신해 계백이 왕자가 되어 연회에 참석하고, 그 자리에 은고가 초영을 데리고 사택비에게 선물을 바치려 나타나게 되고, 여기에서 계백의 말이 단초가 되어 은고는 사택비를 살리고, 계백은 의자로 인해 고초를 겪게 된다. 우연히 첫눈에 반하게 된 상대가 있어 알아보니 예전 초등학교 동창이었다더라. 함께 팀을 이루어 활동하면서 알고 보니 예전 같은 동네에서 산 적이 있었더라. 의자의 말 몇 마디에 죽은 선화황후의 손이 펴지는 이적과 같은 판타지라고나 할까?

 

이를테면 운명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서사로써 대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어제오늘 처음 만난 누군가와, 그런데 알고 보았더니 과거 잠시 스쳐지나간 인연이라도 있는 경우와, 과연 어느 쪽이 더 의미있고 가치있게 여겨질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아니 운명이었다. 반드시 만나도록 예정되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어떤 사명까지 가지고 있다면. 사명이란 곧 천명이다.

 

사택비와 사택적덕은 백제의 왕실이라는 천리를 거스르는 존재일 테고, 따라서 그러한 역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의자에게 천명이 돌아가야 한다. 천명이란 운명이라 이름할 것이고, 운명은 조짐으로써 나타난다. 계백과 의자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 그 자리에 은고와 초영마저 함께 하는 것. 그래서 사택비는 여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택비가 아닌 사택적덕이었다면 어쩌면 사람들은 그로부터 어떤 정의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국가적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당나라 사신이 보는 자리에서 화친을 권한 신라의 포로들을 베어버린다. 그것을 사택비가 아닌 사택적덕이 했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눈도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택비는 아내로써 남편을 억누르고, 투기하여 남편의 다른 아내를 죽인 악녀니까. 사택적덕이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순리가 될 수 있었겠지만 사택비이기에 그것은 철저히 역리이고 만다. 오연수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과장된 메이크업은 그를 위한 연출이다. 사택비가 낳은 교기는 그래서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 자신이 천리를 거역한 불순한 존재이기에.

 

사실 사택비의 캐릭터는 그 뿌리가 유구하다. 아마 히브리 신화에 나오는 리리스가 그 기원이 되지 않을까? 클레오파트라,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측천무후,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여러차례 드라마화되었을 문정왕후와 명성황후가 그 예일 것이다. 차이라면 미실과 사택비의 경우 철저히 픽션이라는 것. 미실의 경우는 그나마 박창화가 지은 <화랑세기>가 원본이지만 사택비의 경우는 금제사리봉안기에 나온 얼마간의 문장이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전부다. 그래서 그동안의 이미지를 투영하여 하나의 전형적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사택비가 곧잘 미실과 비교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철저히 픽션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이기에 그만큼 전형성을 띄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성여왕이 음란하고 부정한 왕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의자는 그런 사택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짐짓 바보로써 자신을 위장하고, 사택비는 그러한 의자의 모습에서 본능적인 어떤 위험을 느끼게 되고, 암살사건에 대해 무왕의 의도가 그 진상을 가려버렸지만 오히려 그로 인하 사택비의 의자에 대한 의혹과 경계심은 커져만 간다. 아마도 사택비가 굳이 꿈에서 선화황후를 보아야 했던 것도 그런 의자의 모습에서 느낀 어떤 위화감에 대한 무의식의 경고였을 지 모르겠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지나치게 예상을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는 그것은 무언가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할 수 있을 테니까. 지나치게 자신을 감추려 하는 모습은 사택비의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그런 건 해석하는 입장에서일 테고, 그보다는 단지 사택비로 하여금 의자를 죽이게 함으로써 계백과 의자가 다시 한 번 결정적으로 만나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을 테지만 말이다. 하필 그 과정에서 무진이 개입한다는 것이 더욱 그런 혐의를 강하게 한다. 그렇게 계백은 의자를 만나고 장차의 일을 계획하게 되리라.

 

어쨌거나 문제일 것이다. 사택비는 항상 사택적덕과 교기, 그리고 무왕만을 만나고 있다. 무왕 역시 측근인 사걸(서범식 분)과 사택비를 만나는 것이 거의 전부다. 항상 만나는 얼굴이 그 얼굴들이니 하는 말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각 인물의 다른 이면을 볼 기회란 거의 없다. 더구나 대표인물을 제외하고는 세력이라 할 만한 것도 없기에 인물들의 말 몇 마디가 바로 사건으로 이어진다. 긴장이 없다.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꾸미고 준비하는 과정이 생략된 채 좁은 공간에서 소수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만큼 변수가 적다. 한 마디로 뻔하고 도식적인 전개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장르라고 하는 자체가 장르를 정의하는 동일한 코드를 말하는 것일 게다. 무협이란 주로 이런 내용들로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질리지 않고 사람들이 그것을 즐겨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복수극이라도 누가 하는가? 어떻게 하는가?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 결과에 대해서도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변수들을 통해 보다 많은 가능성을 부여하여 독자를 혼란시켜야 한다. 그런데 <계백>은 어떠한가?

 

너무 읽힌다. 이미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한 번 읽힌 상태에서 거의 놀라움도 반전도 없이 그대로 흘러가 버린다. 변수가 없으니까. 그 안에 다른 가능성이란 없으니까. 항상 보는 얼굴. 항상 하는 말. 항상 보이는 행동들. 사건만 달리한다고 그것이 재미있어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사건이 반복되어도 그것으로 전혀 다른 재미를 줄 수도 있다. 흥미를 끌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니.

 

비용을 아껴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고와 노력을 보다 줄여보고자. 하지만 거저 만들어지는 드라마는 없다. 어디에도 아무런 수고도 노력도 없이 더 나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손발이 편하자면 머리가 고생해야 한다. 작가와 감독의 그만큼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최소한의 비용과 시간, 노력으로도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무협으로서의 전형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충실하다. 기대한 만큼의 재미는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이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이란 길가에 채이는 돌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이 드라마가 아니면 안 된다. 특별함이다. 채널을 돌리고 고정케 만드는 힘이다. 분발이 요구되는 이유일 것이다. 기본은 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다. 아쉬운 것이다. 더 재미있을 수 있는 드라마인데. 안타까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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