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보아왔던 모든 조추첨 가운데 가장 긴장되는 조추첨이었다. 기존의 조추첨은 단지 누구와 붙는가만 신경쓰면 되었다. 아니면 기껏해야 자기 순서가 어떻게 되거나. 그러나 직접 참가 당사자가 자신의 상대를 지명할 수 있다. 그 긴장. 그 짜릿함.
그 절정은 당연히 신해철이었다. 각 조 1위에게 먼저 시드를 배정한다. 그리고 조 2위들은 각자 숨겨진 깃발을 찾아 먼저 시드를 배정받은 1위그룹 가운데 겨루고 싶은 상대를 정한다. 신해철 조의 2위 번아웃하우스가 찾아낸 깃발에 숨겨진 숫자가 5번이었다. 신해철이 번아웃하우스를 대신해 코치로써 대전상대를 고르기 위해 단위로 올라왔을 때 가조에 남아있던 팀은 신대철조의 게이트플라워즈와 노브레인조의 아이씨사이다 두 팀이었다. 과연 이 가운데 어느 팀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역시 신해철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게이트플라워즈하고 아이씨사이다 가운데 저희와 붙으실 분?"
오히려 역지명을 요구하며 도발하고 나선 것이다. 조 2위그룹으로 번아웃하우스가 1위그룹인 게이트플라워즈나 아이씨사이다에 도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히려 번아웃하우스에 도전해야 한다. 그리고 팽팽한 긴장감이 오가기 시작한다. 일종의 기싸움이었다.
어차피 가조의 시드도 게이트플라워즈와 아이씨사이다 두 팀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과 맞붙을 2위 팀도 번아웃하우스와 시크만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번아웃하우스를 피해도 시크를 만나야 한다. 번아웃하우스나 시크나 만만한 팀들이 아니다. 그러나 신해철이 먼저 도발을 함으로써 다른 코치를도 그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해철의 의도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의뭉스럽게 번아웃하우스를 게이트플라워즈에 넘기려는 노브레인과 신해철의 도발을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들인 신대철. 결코 서로에게 질 수 없다는 의지와 팽팽한 긴장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물론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 가운데 하나인 게이트플라워즈와 시작부터 맞붙게 된 번아웃하우스로서는 마냥 반갑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러나 싸움이란 원래 실력도 중요하지만 기세도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다. 토너먼트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격전장이다. 번아웃하우스의 보컬 오경석의 말처럼 게이트플라워즈도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아니면 번아웃하우스가 짧은 시간 동안 환골탈태하여 하비누아주가 그랬던 것처럼 최고의 무대를 선보일 수도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자신감이고 기세인 것이다. 어차피 시크나 번아웃하우스나 2위그룹에서 만만치 않은 팀들이었듯 아이씨사이다 또한 쉽게 상대할 수 있는 팀은 아니었다. 신해철은 방송을 아는 방송인이면서 유능한 전략가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대로. 블루니어마더가 WMA를 고르고, 하비누아주는 제이파워를 고르고, 라이밴드는 POE를 고르는 등 2위그룹 안에서도 그렇게 누구를 대전상대로 골라야 유리한가 머리싸움이 치열했다. 보컬이 강한 하비누아주는 보컬이 없는 제이파워의 약점을 노리고, 앙상블이 좋은 직장인밴드 S1에게는 역시 라틴음악을 하는 라떼라떼가 붙는다. 라이밴드의 상대는 같은 여성 보컬리스트가 있는 POE다. 역시 여기에서도 드러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인 게이트플라워즈나 톡식과 먼 곳부터 조가 채워져간다는 것이다. 누구도 게이트플라워즈와 톡식과 처음부터 맞붙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어난 이변이랄 수 있는 것이 강력한 우승후보 가운데 두 팀인 톡식과 브로큰발렌타인이 16강에서 맞붙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운이 따라주지 않아 유독 시드를 받지 못한 독일이 16강전에서부터 아르헨티나와 맞닥뜨리게 된 상황이다. 당장 결승으로 직행해서 우승을 다투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팀인데 그러나 단지 깃발을 가장 늦게 찾아 가장 늦은 번호를 고른 탓에 그들은 모두가 피하는 또다른 우승후보 톡식과 16강에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벌써부터 심장이 옭죄어 숨이 가빠오려고 한다. 톡식과 브로큰발렌타인이라니. 2인조 밴드로써 그 유니크함을 자랑하는 톡식과 마치 그린 듯 밴드의 모범과 전형을 보여주는 브로큰발렌타인, 본능을 자극하는 거친 젊음의 원초적 사운드를 자랑하는 톡식에 비해 브로큰발렌타인은 한결 정교하게 다듬어진 완성도 높은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본능과 이성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우열을 가릴 수 없이 팽팽하다. 흥행을 위해서는 'TOP밴드의 아이돌'이랄 수 있는 톡식이 승리하여 8강에 오르는 것이 도움이 될 테지만 브로큰발렌타인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시청율만 조금만 더 높았으면. 조금만 더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면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을 흥분케 하는 큰 이슈였을 텐데. 그러나 관심이 없으면 월드컵 조추첨결과가 어떻게 나왔더라도 별 흥미를 못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만일 제대로만 시청율이 나오고 화제만 되어 주었어도 그야말로 다시 없을 최고의 흥행카드가 되어 주었을 빅매치였을 것을. 그렇게 우승후보 두 팀의 대결은 벌써부터 <TOP밴드> 팬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도저히 방송을 기다릴 수 없다.
하기는 어느 것 하나 허술한 팀이 있던가. 상당히 마니아취향인 게이트플라워즈에 비해 번아웃하우스의 보컬은 보다 대중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아이씨사이다의 놀라운 에너지는 시크의 농익은 세련미와 충돌한다. POE의 난해함과 라이밴드의 직설적인 유쾌함, 그리고 WMA의 무한한 가능성과 블루니어마더의 16년차 밴드로서의 진지함과 깊이, Axiz 역시 우승후보답게 퍼포먼스와 연주가 뛰어난 팀이지만 2Stay 또한 보컬의 매력과 세련된 연주로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는 팀이다. 여기에 톡식과 브로큰발렌타인, 이은 보컬이 강한 하비누아주와 보컬이 없는 제이파워의 대결, 마지막으로 S1의 앙상블에 대해 라떼라떼가 완성도 높은 음악으로 도전잘을 건네 볼 수 있겠다. 더구나 2위그룹에게 상대를 고르라 한 탓에 서로 실력에 맞는 상대를 찾아 어느 누구 하나 안심하고 지켜볼 수 없다. 누가 이겨서 올라가더라도 그것은 이변이 아닐 것이다.
참 재미있었다. 예능으로써도. 확실히 교양국에서 제작하고 있지만 <TOP밴드>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예능프로그램으로써 편성되어 있는 것이다. 예능에는 서사가 있어야 한다. 기승전결이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출전 밴드 사이의 관계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출전 밴드와 코치의 관계나 코치와 코치 사이의 관계나.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도 중요하다.
함께 무대에 올라 연주를 들려주는 POE와 게이트플라워즈의 기타리스트 염승식, 그러나 그토록 무대를 즐겨 놓고서도 서로 조가 다르다는 이유로 코치인 남궁연과 신대철의 견제가 시작된다. 기타를 넣지 않는 편이 좋았다. 다시는 그 팀에 가서 연주하지 말라. 아예 경쟁팀이라 일부러 틀렸다. 짐짓 삐진 척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염승식과 당황하여 그 뒤를 쫓는 POE의 키보드 겸 보컬 물렁곈의 모습은 한 바탕의 콩트를 완성한다. 예선에서부터 남궁연이 그리 신대철을 의식하더만.
서로 모여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장기자랑도 하고, 정말 보기 드문 드러머 남궁연의 김도균 성대모사도 들을 수 있었다. 패자부활전에서 살아돌아온 밴드들과 새로운 코치 한상원, 신대철이 합류하고서는 남궁연의 신해철에 대한 디스가 이어진다. 확실히 그나마 가장 방송경험이 많은 탓인지 프로그램을 살리기 위한 남궁연의 노력이 돋보이기도 했었다. 김도균이 자신의 조의 라이밴드의 상대로 남궁연조의 POE를 선택하자 짐짓 김도균이 미리 정탐하여 약점을 캐물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각조와 코치 사이에서의 긴장을 고조시켜 드러내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단순한 밴드끼리의 조별토너먼트에서 한 바탕 흥미로운 이야기거리가 생겨난다. 재미있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체리필터와 블루니어마더, 격의없이 웃고 떠들고 있는 노브레인과 브로큰발렌타인, 게이트플라워즈의 염승식은 연주를 마치고 내려온 신대철의 어깨를 주무르고, 라이밴드는 코치 김도균의 퍼포먼스를 흉내내어 보여준다. 신해철의 명성에 걸맞게 겁먹고 긴장한 모습들이라든가, 친한 듯 그러나 강자를 경계하는 솔직한 모습까지. 특히 그 가운데서도 스스로 대전상대를 고르는 조별추첨에서는 밴드 특유의 자신감에 서로에 대한 신뢰를 더한 유쾌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왁자한 놀이판이었다. 말 그대로 MT였다. 시청자 역시 이제까지의 팽팽하던 경연에서 벗어나 잠시 쉬며 저들과 즐긴다.
김도균과 신대철, 송홍섭, 남궁연의 즉흥연주는 최고였다. 이것 하나 때문에라도 한 시간이라는 시간이 이제까지 가운데 가장 알차고 보람있었다 할 정도다. 이 무대를 본 것만으로도 <TOP밴드>에 참가한 보람이 있었다. 그 말 그대로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이만한 무대를 볼 수 있을 것인가 가슴 벅차지는 무대이기도 했었다. 과연 이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인 것은 이유가 있었다.
토너먼트 조추첨이 진행되는 가운데 각 조에 대전상대가 정해질 때마다 각 팀이 이제까지 <TOP밴드>에서 거쳐온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다. 역시 서사일 것이다. 각 팀들에 캐릭터를 부여한다. 그들은 어떤 음악과 연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각 팀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고, 보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각 팀들에 대한 애정을 깊게 할 것이다.
마치 휴식과 같은 필요한 회차였다고 생각한다. 이제껏 숨가쁘게 경연을 치르고 왔으니 시청자 역시 잠시 숨을 돌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왁자하게 웃고 떠들면서. 서로 견제하고 친분도 나누는 가운데. 동료이지만 경쟁자다. 친구이지만 쓰러뜨려야 할 적이다. 그리고 이제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인 16강 경연이 시작된다. 숨을 고르고 잠시 멈추어 쉰다.
하여튼 게이트플라워즈가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는 이유라 할 것이다. 설마 거기에서 문워크가 나오다니. 퀸이 흘러나오는 사이로 느닷없는 빌리진과 기타리스트 염승식의 문워크. 보컬 박근홍의 헤드뱅인. 다시 퀸이 이어진다. 연주력도 탁월하지만 전혀 무게잡지 않고 이렇게 하찮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선물상자 같다. 도대체 얼마다 대단한 보물이 들어 있길래.
추구하는 음악 자체는 상당히 마니아지향이지만 밴드의 캐릭터 자체는 매우 대중지향적이다. 밴드를 한다고 무게를 잡지 않는다. 음악적 고집은 있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콧대를 세우지도 않는다. 편안하지만 완고한 느낌? 비로소 대중에 내보일 수 있는 오랜만의 제대로 된 밴드일 것이다. 이들을 대중 앞에 내보였을 때 그 결과를 기대하게 된다. 새로운 침체된 밴드음악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하나하나가 모두 흥분되고 기대되는 대진이었을 것이다. 특히 게이트플라워즈와 번아웃하우스, 그리고 미리보는 결승전 톡식과 브로큰발렌타인. 아이씨사이다와 시크의 대결도 주목해 볼 만하다. 일주일이 너무 길다. 시간의 흐름이 너무 느리다. 답답하다. 다음주를 벌써 기다리게 된다. 즐겁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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