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한예슬 사태를 통해 보는 어떤 사회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주장들...

까칠부 2011. 8. 26. 20:37

아마 인류사회의 가장 오랜 숙제일 것이다. 사람이 문제인가? 구조가 문제인가? 인성의 문제인가? 아니면 구조가 잘못되어 그리 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순자의 성악설과 맹자의 성선설이 그것일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못하기에 교육과 제도로써 선하도록 강제해야 한다던 순자와 결국은 인간이 선한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던 맹자.

 

퇴계 이황의 주리론과 율곡 이이의 주기론도 맥락은 비슷했다. 선조가 국정에 대해 물었을 때 퇴계는 왕의 덕성을 이야기했고, 이이는 제도의 경장을 이야기했다. 본성이 바로 서면 사물이 따른다. 본성이란 그러한 사물로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같은 한예슬사태를 두고서 현역배우인 신현준과 김여진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일단 신현준은 아들의 상에도 촬영장을 지켰던 박원숙의 예를 들어 한예슬을 꾸짖고 있었다. 김여진은 촬영장에서 혼자 울고 있던 어느 아역배우를 언급하며 그나마 한예슬이기에 다행이다 말하고 있었다. 차이는 무엇인가?

 

아무리 그래도 박원숙처럼 최선을 다하여 촬영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한예슬과 마찬가지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있다. 박원숙과 마찬가지로 한예슬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뎠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도망치고 싶어 하고 실제 도망쳤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한예슬의 경우가 공론화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결국은 촬영장을 임의로 벗어나 미국으로 도망친 한예슬의 잘못인가? 아니면 그러도록 강요한 한국드라마제작현장의 근본적 문제인가? 신현주는 바로 전자의 관점에서 끝까지 촬영장을 지키지 못한 한예슬을 탓하고 있었다. 김여진은 후자의 관점에서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든 현실을 탓하고 있었다. 그나마 유명배우인 한예슬이 나서 주었기에 결과적으로 이슈화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한예슬을 둘러싼 여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었다. 회사에서 아무리 부당하다고 멋대로 일을 그만두고 뛰쳐나가면 그것을 용납할 수 있는가? 그런 상황을 만든 회사가 문제이지 그것을 견디지 못한 개인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결국 뛰쳐나간 개인을 탓하려는가? 아니면 그러도록 만든 환경을 탓하려는가?

 

사회 여러 분야에 그대로 적용되는 논리이기도 하다. 범죄란 개인의 잘못인가? 구조의 문제인가? 단지 개인이 악해서. 하지만 사회적인 구조의 모순 때문에. 전자는 엄벌주의를 주장한다. 개인의 잘못이니 개인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 후자는 교화주의를 내세운다. 사회의 잘못도 있으니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노동문제는 그보다 더 가까울 것이다. 어차피 그런 일이라는 것 알고서 시작한 것 아니냐? 그런 일도 없어서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일하며 적응해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물며 파업이라도 하려 하면 국민들에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그에 대한 반론은 단 한 마디, 그렇다고 그런 환경에서 계속 일하며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에 만족할 것인가?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할 것인가?

 

한국사회가 아직은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학벌사회에 대한 비판이 있을 경우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 잘 적응해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학벌을 손에 넣은 사람이 있지 않는가고. 누구나 열심히만 하면 좋은 학벌을 손에 넣을 수 있는데 학벌을 탓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은 때문이다.

 

부의 재분배에 있어서도 가난한 것은 자기가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이라 말한다. 열심히 일해서 가난한데도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체제 안에서 자기노력만으로 얼마든지 부를 얻고 명예를 얻은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난한 채로 있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극단적인 말로 3대가 가난하면 돌아볼 것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나랏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하는가?

 

오히려 더 어려움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 수치와 고통을 겪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더 열심히 일할 동기가 생겨난다. 더 열심히 일할 동기가 생기면 나중에는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지 가난한 채로 만족하며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공약을 만들 때도 복지를 늘려주겠다고 말하기보다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말하는 쪽이 훨씬 효과가 있고 잘 먹힌다. 부자가 되어야지 가난한 채로 잘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국사회에서 줄세우기가 만연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말했듯 누군가는 기존의 체제에 잘 적응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아마도 가진 바 재능과 노력에 의한 것일 터다. 그렇다면 그에 적응하지 모한 이는 그만한 재능과 노력이 부족했다는 뜻 아니겠는가. 특히 이 가운데 노력이 문제다. 노력은 곧 도덕적 판단과도 이어진다. 오히려 줄세우기에 맞춰 적응하지 못하면 노력이 부족한 것이니 그것을 탓해야 한다. 이를테면 살이 찐 사람은 게으르고 의지가 부족하다고 하는 편견과 같은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그만한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재능도 재능이지만 의지와 노력 여부가 중요하다. 한 마디로 그것을 감당할만한 강함이 있는가? 순자가 말한 악이라 하는 것도 결국은 유혹에 넘어가는 인간의 나약함일 것이니.

 

어차피 모든 인간은 약하다. 따라서 약한 인간도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누구나 강해질 수 있다. 강하지 못한 것은 의지와 노력의 부족이다. 누구나 강해질 수 있다면 약한 것이 악한 것이다. 끝내 드라마 촬영현장에서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한예슬처럼.

 

결국 한예슬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일 것이다. 한예슬이 드라마제작현장의 여러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망친 그 나약함이 잘못인가? 아니면 그런 나약함조차 감당하지 못한 한국드라마제작의 현실의 문제인가? 전자가 신현준의 입장이었고 한예슬을 비판하는 주장이었다. 후자가 김여진의 생각이었고 이를 기회로 한국드라마제작의 모순과 부조리를 바꾸어 보자는 이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실제 한예슬을 둘러싼 여러 논란에서 각자의 입장을 가만 살펴보면 다른 사회문제에 있어 그들이 일관되게 보여 온 여러 주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에 기존의 구조에 적응하지 못한 약함을 탓할 것이냐? 그러한 약함조차 챙기지 못하는 구조의 문제를 바로잡을 것이냐? 개인을 탓하고 말 것인가? 구조를 바꾸자 할 것인가?

 

무엇이 옳은가는 사실 답은 없다. 항상 제도란 그 당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그럼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개인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개인들이 있기에 사회의 구조는 지금과 같은 보다 보편을 지향하는 것으로 바뀌어 왔었다.

 

다시 말해 지금 한국드라마제작의 모순이라는 것도 바로 현실적인 이유에 의한 나름의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있기에 여러 주체들의 동의에 의해 그같은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갖고 있는 모순들이 한예슬을 도망치게 만들었고, 장차 또 다른 누군가를 도망치게 만들리라. 그에 대한 대안도 필요하다. 어쩌면 모순되지만 그렇게 양자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어떤 경계를 두고 공존한다.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오히려 한예슬 자신보다 그를 둘러싼 논란이 더 흥미로웠던 사건이었다. 한국사회에서 구조의 모순에 대한 논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를 통해 읽게 되는 한국사회의 일반적 성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가장 오래된 인류사회의 화두이기도 했었다. 지금도 정답 없이 계속해서 부딪히고 있다.

 

시청자와 스태프, 동료배우들에 피해를 끼친 점에서 한예슬은 잘못했다. 그러나 한예슬을 도망치게 만든 것은 그러한 드라마제작현장의 여러 문제들이었다. 단지 다른 여전히 견디고 있는 배우들보다 그녀가 약했을 뿐. 누구나 그녀처럼, 혹은 그녀보다 더 약해질 수 있다.

 

인간은 더 강해져야 하는가? 강하지 않은 채로도 좋은 것인가? 약해서 문제인가? 약해서 문제인 자체가 문제인가? 아마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일 것이다. 여전히 시끄럽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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