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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K 시즌3 - 예리밴드가 오히려 비난을 들어야 하는 이유...

까칠부 2011. 9. 21. 19:20

한 남자가 성매매업소를 찾았다. 당연히 성매매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남자의 선량한 외모를 보고 한 여성이 남자에게 사정을 하기 시작한다. 인신매매로 팔려와서 붙잡혀 있으니 제발 구해달라. 그러면 과연 남자는 그 여성을 구해주려 할까?

 

남자는 기대를 하고 성매매업소를 찾은 것이다. 돈을 주고 여성을 사서 하룻밤 욕정을 풀기 위해서. 그것은 성매매업소의 취지, 즉 남성의 성욕을 위해 여성의 성을 판다고 하는 의도에 동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매매업소의 입장에서나 성을 사는 남성의 입장에서나 어디까지나 여성이란 단지 대상에 불과하고, 오히려 성을 삼으로써 얻어질 쾌락에 대한 기대만 커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앞에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구원을 요청해 올 때 남자는 그녀를 구해주려 하겠는가?

 

일종의 공범관계라 할 수 있다. 방송국도 오디션 출연자의 입장에서는 갑이지만, 대중 역시 오디션 출연자들의 입장에서 갑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인식한다. 자신들이 지켜봐주고, 지지해주고, 투표해주니 그들도 스타가 될 수 있다. 시청자 자신이 스타가 될만한 재목을 고르고 그를 지지하여 행동으로써 그를 스타로 만든다. 그리고 그같은 오만은 출연자들의 실력이나 개인 신상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들추고 평가하여 때로 조롱하기도 하는 이유가 된다. 몇몇 희화화된 출연자의 경우 몇 달 몇 년을 인터넷을 통해 재생산되며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슈퍼스타K>가 악마의 편집을 한다면 대중은 그 악마의 편집을 받아들여 출연자를 배설의 창구로 쓴다.

 

단지 편집을 그렇게 했다. 단지 편집이 그렇게 자극적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어느새 대중에 의해 인격살인까지 당한다. 그의 실력, 그의 성격, 그의 인성에 대해서까지 이야기가 오가며 심지어 "쓰레기"라는 말까지 아무렇지 않게 퍼부어진다. 사실 그것을 기대하고 <슈퍼스타K>를 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은 <슈퍼스타K>를 통해 뛰어난 재능과 가능성을 지닌 스타지망생은 물론 그들이 비난하고 조롱하며 가지고 놀 수 있는 대상을 기대하게 된다. 어째서 <슈퍼스타K>가 방송될 때마다 인터넷은 뜨겁게 달구어지고 희생자가 나오는가?

 

물론 생각할 것이다. 비난을 받을 만하니까 비난한다. 욕을 먹을 만하니까 욕한다. 조롱당할 만하니까 조롱한다. 그러나 그런 자격을 누가 주었는가? 누가 하나의 인격을 그런 식으로 재단하고 단죄할 권리를 그들에게 주었는가? 주었다. 바로 <슈퍼스타K>다. 서바이벌 오디션이라는 프로그램의 특성과 제작진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편집을 통해서 시청자들은 마음껏 그를 비난해도 된다는 면허를 얻게 된다. 성매매업소에 들어가 돈을 지불하는 것은 여성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하는 면허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누군가 나서서 이건 잘못된 것이라 비판하고 나선다. 어쩌겠는가?

 

그래서 불쾌한 것이다. 그래서 기분이 나쁜 것이다. 한창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한참 즐겁게 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무엇보다 행복하게 욕하고 비난하던 중이었다. 출연자를 대상으로 삼아 아낌없이 조롱하고 비난하며 즐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판을 깨고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말한다. 그것이 잘못된 구조에 의한 정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말한다. <슈퍼스타K>의 책임을 묻는 순간 그들의 의도에 동의하여 함께 출연자를 대상이며 수단으로 삼았던 대중 자신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한참 재미있는 중이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계속해서 쇼가 이어졌으면 싶다. 계속해서 지금까지처럼 마음껏 물어뜯을 수 있는 먹잇감과 함께 재미있는 쇼가 이어졌으면 바란다. 그에 비하면 자신이 당한 일이 부당했다 하소연해 오는 출연자의 모습이란 그런 자신의 즐거움을 깨는 불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앞서의 이야기에서도 남성은 성매매업소라는 공간과 성을 사기 위해 들어가 있다는 상황과 어우러지며 여성을 구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성매매업소와 공범이 되어 그녀를 학대하는 입장에 서고 만다. 그것이 남성의 욕구에도 부합할 테니까. 만일 여성의 입장에 동의하게 된다면 자신은 여성을 납치해 파는 부당한 행위에 동의한 것이 된다. 반성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원인을 부정하도록.

 

흔히 보게 되는 모습 가운데 하나다. 분명 잘못을 저질렀다. 도둑질을 했고, 폭력을 휘둘렀고, 성폭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말한다. 물건이 거기 무방비하게 있었고, 맞을 사람은 맞을 짓을 했으며, 성퐁행당한 여성은 그럴만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내 책임이 아니다. 예리밴드에 덧씌워지는 도덕적인 책임과 비난이 그것을 의미한다. 그렇더라도 숙소를 무단으로 빠져나와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성급한 행동이었다. 인터넷을 금지했는데 어째서 인터넷을 하게 되었는가? 나아가 그럼에도 고집을 세운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헤이즈의 눈물까지 더해 이번에는 오히려 예리밴드를 가해자로 만든다. 결론은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이대로 계속 해도 좋다. 예리밴드가 문제다.

 

역시 자주 보게 되는 모습일 것이다. 내부고발자에 대한 조직의 응징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내부고발자가 고발한 내부의 잘못에 대해 조직은 고발자 자신의 잘못으로 대응한다. 그의 인격을 파헤치고 그의 인성을 헤집으며 그의 존엄 자체를 문제삼는다. 그래서 철저히 그 조직으로부터 따돌림으로써 마침내 추방하고 만다. 그러고서 말한다. 보라. 저토록 문제 많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옳다. 틀리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물론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리라. 누구도 <슈퍼스타K>가 지금의 악마의 편집이라 불리우는 편집방식을 바꾸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충분히 재미있고 그로 인해 즐겁다. 희생양을 만드는 것도 함께 물어뜯으며 놀 수 있으니 그것으로 오히려 만족스럽다. 아무리 예리밴드가 나와서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과연 들어줄 사람이 있을 것인가.

 

어째서 무편집본이라 공개한 동영상을 보고서도 그것과 방송분에 전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판단이 나오는가?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예리밴드의 리더 한승오씨는 끝까지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그로 인해 헤이즈가 피해를 봤다. 그래서 헤이즈의 뜻대로 진행해서 예리밴드가 떨어졌다면 그것이 정당했다는 뜻일까? 구체적인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아예 들으려고도 않던 방송분의 독단적인 모습과 고집은 있지만 끊임없이 대화와 설득을 시도하던 무편집본의 모습. 그러나 그런 차이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정보를 해석하는데 있어 오류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의도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도가 정보의 유입과 판단에 필터링을 하게 된다. 아예 그 과정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하나의 이유라면, 관심을 두지 않도록 만드는 이유가 그 한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도가 그 과정을 무시한 채 방송분과 무편집본의 내용을 같다고 여기게 만드는가? 그리고 그러한 의도는 결국 예리밴드의 인성을 문제삼으며 그를 비난하는 근거가 된다.

 

심지어 예리밴드의 입장을 동정하던 사람들마저도 예리밴드가 여기저기서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렇더라도 틀을 깨서는 안 된다. 판을 부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슈퍼스타K>만이 아닌 자신의 정의를 고집하는 모습에 대한 불편함도 한 몫 차지한다 할 수 있다. 아무리 옳다고 해도 그 옳음을 고집하거나 주장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중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닌가. 불편한 진실이다.

 

어째서 <슈퍼스타K>는 악마의 편집을 고집하는가? 당연하다. 그것이 시청률로 이어지니까. 한 마디로 돈이 된다. 화제가 되고 시청률이 나오고 그것은 곧 방송국의 수입으로 이어진다. 대중은 그것을 바란다. 그것을 소비한다. 예리밴드가 그것을 보여주었다. 예리밴드 하나 희생시키더라도 대중은 지금의 쇼가 멈추기를 바라지 않는다. 시즌4는 더 강해질 것일 예감해 보는 이유다. 대중이 그것을 요구한다.

 

처음부터 <슈퍼스타K>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옳았을 수도 있다. 설마 누가 자신이 그같은 악마의 편집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결국 모든 잘못은 거기에서 출발했고, 이미 <슈퍼스타K>에 출연하게 된 이상 이미 공범이 되어 버린 시청자로부터 우호적인 반응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이다. 예리밴드 혼자 비난을 듣고 끝난다. 대중이 바라는 것은 예리밴드가 아닌 <슈퍼스타K>에 있다. 성을 사러 온 남성에게 구원을 청해봐야 돌아오는 대답은 뻔한 것이다.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안타깝다. 가야 할 자리를 잘못 찾은 것 같다.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이 만한 일쯤은 감수해야 한다. 성상납도, 가혹한 노예계약도, 그로 인한 혹사와 소모도. 그래서 재작년 불행하게 목숨을 끊어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 <슈퍼스타K>는 그가 찾을 자리가 아니었을 텐데. 대중에게 스타란 음악인이 아니라 광대다. 아티스트가 아닌 펫이며 장난감이다. 시대가 그렇다. 하기는 연예인에 대한 그 수많은 악성루머라는 것도 그와 같은 대중의 믿음과 기대를 반영하는 것일 터다. 그에 비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기를 바라는 음악인의 순수한 의도 따위야. 그게 더 이상하다.

 

없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있는 이야기를 조금만 달리 전달해도 그 뜻은 천양지차로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한 번 생긴 선입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리밴드의 불운이라면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대중일 것이다. 조선일보가 현재 구독률 1위인 이유가 있다. 안티조선이 조선일보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몰랐던 것이 예리밴드의 패착이었을 것이다. 알았다면 다른 방식의 싸움을 시도했을 테지.

 

밴드의 불모지에서 무려 20년 넘게 음악 한 길만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밴드를 한다는 것은 도를 닦는 것과 같다. 과연 사람들 생각하는 것처럼 예리밴드의 리더 한승오씨에게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올빼미는 썩은 쥐새끼를 지키려 오동나무에만 앉고 어린 죽순만을 먹고 사는 원추를 공격하려 드는 것이다. 원래는 그런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프로그램이 <슈퍼스타K>였을 텐데.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어차피 밴드가 뭔지도 모르고 홍대 찾아갈 일도 없는 사람들이다. 최소한 그들의 공연을 보아주고 들어줄 사람들은 이번 일에 대한 입장이 확고하다. 한국의 현실이 그러하니라 여기고 더 이상의 상처는 없기를. 지지한다. 어느 때고 돈 벌어 요트 사고 자가용비행기로 날아다닐 때까지.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