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이 하나 있다. 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보물이다. 누구나 탐내고 그것을 가지고 싶어 한다. 어찌할까? 믿고 의지하고 맡길까? 다른 누군가 지켜주리라 여기면서?
왕이란 그런 자리다. 왕이 가진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살린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죽인다. 역사에 길이 위대한 이름으로 남게 될 성군도, 온갖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폭군이나 암군도, 결국 왕이기게 가능한 것이다. 오로지 왕만이 나라를 세우고 흥하게 할 수 있으며, 다시 그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왕인 것이다. 그런데 그 왕이라고 하는 자리에 앉아서 사람 좋게 믿으며 의지하며 그렇게 있는 것이 가능한가?
그래서 왕은 외롭다. 너무나 고귀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흉악한 것이다. 모두가 탐내는 것이다. 부모도, 자식도, 아내도, 친척도, 가장 아끼는 신하도 그래서 믿을 수 없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배반하며, 자식이 부모를 거스른다. 충신이 역신이 되는 것은 왕 스스로 그 빈틈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피가 흐르고 수없이 많은 것들이 파괴되면서 왕은 스스로 왕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게 된다. 역사상 왕이 왕을 지키지 못해 흘린 피는 왕이 왕을 지키고자 흘린 피와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다.
세종(한석규 분)이 암군이었어도 마찬가지다. 과연 세종보다 더 뛰어난 이가 있어 세종의 왕위를 빼앗아 가져간다고 조선은 더 평안하고 발전할 수 있을까? 당장 세종을 죽여야 하고 그를 따르는 신하를 죽여야 한다. 새로운 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죽여야 한다. 아니면 그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며 타협하거나. 이미 한 번 내쫓긴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왕을 노리는 이들이 나온다면 그들도 죽여야 한다. 어지간히 암군이거나 어지간히 명군이 들어서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대로 왕위를 지키고 있는 것이 낫다. 왕이 왕위를 지키는 것은 따라서 왕이 된 자의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의심하는 것도 군왕의 의무입니다!"
어찌 보면 의심이란 누군가 죽이지 않고도 왕위를 지키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의심하여 경계한다면 틈을 보일 일이 없다. 틈을 보이지 않는다면 누구도 거스르거나 그의 권위를 노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를 위한 충분한 힘 또한 갖추고 있다면 굳이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서도 왕은 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그것이 왕이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을 때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진다고 하는 세종의 말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왕이 스스로를 불안하게 여긴다.
세종이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지닌 왕이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세종은 왕위를 지키기 위해 굳이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세종을 거스르는 이도 없었고, 세종이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는 이도 없었다. 그만큼 세종의 왕으로서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태평성대란 바로 그러한 정치의 안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어째서 왕권이란 그리 중요한가? 왕이란 절대적인 하나이기에 왕이 그 절대적인 하나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사회는 자연히 질서를 잡아가게 된다. 왕이 흔들리면 이미 잡혀 있던 질서마저 흔들리게 된다.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사회는 그로써 분열하고 무너지기 쉽다.
하긴 왕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법이 있고, 나라가 있고, 왕이 있다. 차용증을 쓰지 않고 돈을 빌려주었다.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믿음 때문에 상대는 차용증이 없는 것을 보고 돈을 떼 먹을 마음을 먹게 된다. 카운터에 수백만원의 돈이 있는데 아무런 대비 없이 아르바이트에게 그것을 맡기는 것은 그를 유혹 앞에 내던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빈 집에 문단속을 하는 것은 내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 잘못된 마음을 먹지 않도록 경계하려는 뜻이다. 그렇게 의심하고 경계함으로써 비로소 신뢰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의심하고 의심하여 서로 믿을 수 있는 규준을 정한다. 그것이 계약이고, 증서이며, 법이고, 규범이다. 단지 믿어 방치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혼란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의심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믿기 위해서도 먼저 의심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다. 세종이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은 그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자신에 대해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하지 않았기에 묻지 않았고, 묻지 않았기에 자신을 모른다. 모르니 불안하고 불안하니 의심하게 된다. 의심에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왕이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이유다.
항상 의심을 하되 그 의심에 휘둘리지는 말라. 아마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왕의 도리인 동시에 인간의 도리다. 인간의 사회가 굴러가는 원리다. 의심하여 묻고, 의심하여 확인하고, 의심하여 의심하지 않도록 규준을 세운다. 왕이란 의심하는 자리이면서 또한 의심해서는 안 되는 자리다. 그래서 외롭다. 너무 거대한 것을 등에 지고 있기에 그는 항상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왕에 대해 항상 생각케 만드는 드라마일 것이다. 세종의 말과 행동을 통해, 세종과 주위와의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왕이란 무엇인가? 대저 권력이란, 그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 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인간의 사회란 어떠한 원리로 움직이고 있는가? 정치이며 사상이고 근본적으로 철학이다. 철학이 없는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에 던지는 화두다. 막연히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그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투표란, 선거란, 참정권이란 어떤 의미인가?
마침내 윤평(이수혁 분)의 존재가 드러났다. 우연이었다. 강채윤(장혁 분)이 살해당한 허담의 가족을 찾아 자신이 전한 '비바사론'에 대해 물었을 때 그 가족의 입에서 '벽사재'의 이름이 나오고, 그 이름을 쫓아 벽사재를 찾았을 때 소이(신세경 분)가 직접 그림을 그려 보여준 그 팔찌의 문양을 발견한 것이다. 여러 키워드 가운데 세종과 아직 정확한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밀본과 관련한 일들을 분류하고, 그로부터 세종과 관련한 천지계의 일원인 성삼문(현우 분)과 박팽년(김기범 분)이 시신을 탈취해갔음을 추리를 통해 알아낸다. 치밀한 추리와 논리의 개연을 쫓으며 만나게 되는 치명적인 우연들, 바로 이런 것이 추리물의 맛일 것이다. 사건의 진실에 점차 다가서며 드러나는 실체가 자못 두렵기까지 하다. 어쩌면 가장 스릴러의 장르에 충실한 드라마가 아닐까?
윤평을 찾아내고, 윤평을 쫓는 과정에서 다시 소이의 존재가 드러나고, 소이와 관련해 장성수(류승수 분)의 존재마저 포착된다. 그리고 성삼문의 존재마저 찾아내 그와 장성수가 만나려는 곳을 쫓던 도중 다시 소이를 만나고 윤평을 만나게 된다. 장성수를 쫓는 성삼문과, 다시 장성수를 죽이려는 윤평, 조말생(이재용 분)을 통해 드러나는 밀본의 실체. 심종수(한상진 분)는 예상과는 달리 정기준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밀본의 핵심이랄 본원이 있다. 세종 또한 왕의 자리에서 조금씩 밀본을 향해 다가간다. 그리고 그 끝에 결국 마주치고 마는 암살자 윤평과 또다른 암살자 강채윤. 암살자는 밀본의 명령을 쫓아 세조의 천지계원을 죽이려 하고, 또 다른 암살자는 세종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잡으려 한다. 딱 적당한 순간에 끝났다. 다음을 보고 싶어 미치려 한다. 점차 사건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장르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벽사재에서 강채윤과 윤평이 처음 부딪히는 장면에서 액션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동선이 어색해서 중간중간 끊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기왕에 조선전기 굵은 대로 짠 좁은 갓을 보여주려 했다면 굳이 심종수로 하여금 조선 후기의 가늘게 쪼갠 대로 만든 넓은 갓을 함께 보여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심종수는 조선 전기 세종 당시의 사람이 아니다? 하기는 밀본의 사상은 조선 후기 노론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어색하다. 기껏해야 이 정도밖에는 지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드라마는 완벽하다. 시나리오도, 연출도, 배우의 연기도.
항상 긴장하며 보고 있다. 자세를 바로 하고. 한 장면 대사 한 마디라도 놓칠까. 보물같은 드라마다. 요즘 좋은 드라마를 많이 한다. 원래 좋은 드라마가 많았는데 요즘 유독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좋은 현상일 것이다. TV 앞에 앉는 시간이 즐겁고 유용하다. 재미있다.
과연 정기준의 정체는. 아마도 그다지 비중이 없음에도 끊임없이 카메라가 쫓고 있는 그가 아닐까. 반촌에서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는 한 사람. 그러나 카메라만 주목하고 있다. 지켜본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94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뿌리깊은 나무 - 결심이 없는 소인은 더 이상 소인이 아니옵니다! (0) | 2011.10.28 |
---|---|
영광의 재인 - 서인철, 가슴 속에 흉폭한 짐승을 기르다! (0) | 2011.10.27 |
천일의 약속 - 비극의 정석, 김수현의 힘을 느끼다! (0) | 2011.10.26 |
포세이돈 - 만담과 정담, 수사 9과는 한가롭다! (0) | 2011.10.26 |
계백 - 의자왕의 비극, 주인공이 계백이다! (0) | 2011.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