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뱀파이어 검사 - 괴물이 만들어지는 이유...

까칠부 2011. 10. 31. 11:05

얼마전 한 사건이 있었다. 아직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또래의 다른 아이를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었다. 아이들은 말하고 있었다.

 

"설마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심지어 바로 전까지 친구였던 다른 아이를 아파트 옥상에서 떠밀어 죽게 한 아이들도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 믿기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그로 인해 상대가 다치고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는가? 아파트 옥상에서 밀어 떨어뜨리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필자는 믿는다. 바로 작년의 일이었다. 모든 인터넷이 일어나 타블로 한 사람을 공격하고 있을 때, 필자는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의심도 폭력이다."

 

그러자 당황한 듯 반문이 이어졌다.

 

"어떻게 의심이 폭력이 되는가?"

 

의심이란 한 마디로 상대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믿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주위로부터 인정받고의 여부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자존감과 이어진다. 믿음을 잃는다는 것은 자존을 잃는 것이다. 모두로부터 의심받고 비난받는다는 사실은 자존감이 강한 사람의 경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불행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모른다. 어째서?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 과연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되면 상대는 그것을 어떻게 느끼게 될까? 상대에게 그것은 어떻게 여겨지게 될까? 좋아할까? 싫어할까? 기뻐할까? 상처가 될까? 단지 자기 기준으로 생각한다.

 

원래 역지사지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에 역지사지란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뜻으로 바뀌어 버렸다. 협소한 세계를 협소한 가치가 지배한다. 그 안에는 타인이란 없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 그것을 생각할 여지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생각한다. 내가 옳다. 내가 절대다. 특히 무의식이 드러나기 쉬운 인터넷에서 점잖고 얌전한 이들이 더욱 폭력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내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악플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사건이었다. 부모는 자식들 일이라면 맹목적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 성적. 성적까지 좋으니 그다지 간섭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며 외부로부터 격리하려 든다. 선생님도 야단을 치지 않고, 동급생들도 그들을 충고하려 들지 않고, 그런 가운데 그들의 자아 역시 자신들 안으로 좁혀들게 된다. 타인은 보이지 않는다. 무한의 이기와 결과를 생각지 않는 맹목만이 있을 뿐.

 

단지 앞자리에 앉아 다리를 떨기 때문에. 앞자리에 앉은 현주라는 아이가 다리를 떨어 시험에 집중하지 못했더라는 것이 오한별, 한유리, 강재은이 박현주를 죽인 이유였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옥상에 올라가 박현주를 폭행하는 과정에서 난간쪽으로 박현주를 밀었고, 팔을 붙잡고 매달리는 박현주를 그대로 떨어지도록 방치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부모의 힘으로 아무도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고, 그것은 단지 그들에게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사람을 죽인데 대한 죄책감이 아닌 그런 기분나쁨 감정을 느끼게 한 원인으로써.

 

어쩌면 이번 오한별, 한유리, 강재은 세 여학생을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가장 큰 비극의 원인은 누구도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지도 바로잡아주지도, 줄 수도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차라리 법을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면. 아니 처음부터 박현주가 그렇게 죽었을 때 주위에서 나서서 그네들이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그 책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저 딸의 죽음의 진실이 알고 싶었던 한 어머니를 세 사람이나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끔찍한 연쇄살인범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위의 방치가 세 아이를 괴물로 만들고, 세 아이를 괴물로 만든 환경이 한 어머니를 괴물로 만들었다.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닐까? 갈수록 사회가 파편화되어 가면서, 더욱 고립되어가는 개인들이 타인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해 의식하고 고민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져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현대화된 사회에서의 문제들을 전통사회에서의 연고주의가 심화시키고 있다. 나만 안다. 내 가족, 내 친구, 내 연인, 그 이외에는 관심조차 없다. 친구라 여기고 있던 강재은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서도 한유리는 전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미 누리고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강재은은 어린 나이에 유흥업에 뛰어들고, 그리고 그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친구라 여긴 오한별의 자전거 브레이크를 끊어 놓는다. 강재은이 끊어 놓은 브레이크로 인해 죽임을 당한 오한별은 역시 자신이 과거 저지른 일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유리의 약에 손을 댄다. 한유리는 외국인 강사와의 관계를 들키지 않으려 강재은의 신발에 압저을 숨겨 놓는다. 하기는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수롭지 않은 일들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일들도 아주 사소하게 일어날 수 있다.

 

사실 이런 드라마는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나 아이들이 감당하기에 진실은 너무나 잔인하다. 그러기 전에 가르쳐 주면 좋을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와 타인과의 관계란 어떠한 것인지. 그 상호적인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 그러나 힘들다. 경쟁사회는 그러한 여유를 허락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런 현실이 다시 괴물을 만들고 만다.

 

단지 드라마상의 이야기일 뿐일까? 그러나 설마 사람이 죽을 줄 몰랐다는 아이들의 말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그렇게 쉽게 죽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아무리 죽이고 싶은 사람도 실제 행동에 옮기려면 그럽게 두렵고 망설여진다. 하물며 그렇게까지는 아닌 사이에 상대를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면 어떤 처절한 이유와 동기가 필요했을까? 그조차 없었다면 그것은 단지 실수일 뿐이다.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 그네들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가르쳐주지 않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아무런 악의 없이도 사람은 죄를 저지른다. 사람은 너무나 쉽게 죄를 저지른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아마 아이들은 죽는 그 순간에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왜 죽어야 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억울하게 죽었을 뿐이다. 그나마 박현주 어머니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은 그로 인해 그 아이들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 진정한 원흉들이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한 가지는 이루었다. 그러나 정작 평생을 후회하고 괴로워할 이는 과연 누구일 것인가?

 

복수의 허무함이다. 죽은 이는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가를 모른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어떻게 그 책임을 져야 하는지, 반성은 하고 있는지, 후회는 하고 있는지, 그냥 죽었을 뿐이다. 그저 고통스럽게. 그리고 반면 죽인 자신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사람을 죽인 일로 살인자가 되고 평생을 괴로움 속에 살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더 잔인하지 않은가.

 

이번에도 역시 뱀파이어 검사 민태연(연정훈 분)의 초능력은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물론 단서를 모으는데는 누구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숨겨진 증거를 찾고, 쉽지 않은 사건의 과정을 어렵지 않게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사건을 해결한 것은 팀워크일 것이다. 민태연과 신임검사 유정인(이영아 분)과 민태연의 비밀을 알고 있는 민완형사 황순범(이원종 분)을 비롯한 수사팀원들의 유기적 협력에 의한 것이었다. 시체를 검시하고, 증거물을 분석하며, 발로 뛰고 입으로 물어 진실을 찾아나간다. 민태연의 초능력은 그에 단지 보다 빨리 진실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줄 뿐이다.

 

아무튼 근래 - 아니 한국 드라마사상 보기 드문 완성도 높은 추리물이었을 것이다. 오한별과 강재은, 한유리를 서로를 이용하여 죽이는 과정부터가 매우 절묘했다. 흔적을 남기고 단서를 쫓아 자신을 찾아오도록, 그로써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어머니의 모정도 극적이다. 동기가 분명하고 방법이 절묘하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에 대한 가치적 판단을 곁들인다. 민태연의 뱀파이어로서의 초능력은 그에 새로운 흥미와 긴장을 더한다. 시청자에 던지는 메시지도 있다.

 

이제는 공중파와 케이블의 드라마에 있어서의 완성도 차이는 없다. 그것을 보여준다. 투입되는 자본이 아닌 아이디어와 그를 구현하려는 노력과 열정이 완성도를 결정짓는다. 일주일에 한 편이라는 방송분량도 매우 적절하다. 추리물에는 이 정도 시간의 여유가 필요하다. 거저 얻어지는 완성도가 아니다.

 

재미있었다. 적절한 사회적 메시지와, 그것을 사건과 함께 돌려서 전할 수 있는 세련됨. 음울한 분위기는 뱀파이어 검사라는 제목과도 어울린다. 인간의 안에 있는 괴물과 인간이 아닌 괴물. 결국 세 피해자를 죽인 것은 그들이 죽인 박현주의 망령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자의 망령도 인간 자신에 깃든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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