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내는 기관을 상형하여 자음을 만들었다?"
"사람이 소리를 내는 것은 발음기관에 있으니 글자에 그 이치를 담았다?"
"언어는 본디 소리이므로 글자에도 소리의 이치를 담는다?"
"소리를 그렸다?"
돌아가신 필자의 외할머니는 학교라고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그야말로 옛날분이셨다. 그런 시절이었고, 그런 환경이었으며, 더구나 여성이셨다. 아주 어려서 외할아버지께 시집오신 터라 한글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나 칠순이 넘으셔서 필자에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지 겨우 며칠, 어느새 외할머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한글을 쓰고 계셨다.
한글의 위대함일 것이다. 물론 한글도 제대로 쓰려면 무척 어렵다. 한글은 단지 소리글자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글은 뜻글자이기도 하다. "맛있다."라고 썼을 때 읽는 소리는 "마디따."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 "마디따"의 어근인 "맛"을 따로 분리함으로써 사람들은 보다 직관적으로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외할머니가 쓰신 글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였다. "샛별"을 "새뼐"이라고 쓰고 계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어느새 어렵지 않게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 외할머니께서 내시는 소리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것이다. "ㄱ"이라고 하는 자음이 첫소리가 되고 "ㅏ"라고 하는 모음이 가운뎃소리가 되며, 다시 자음 "ㅇ"이 마지막에 오면서 끝소리가 된다. 합쳐서 "강"이다. 한글은 바로 그 소리나는 원리 그대로를 담고 있었다. 첫소리의 자음이 무엇이고 가운뎃소리의 모음이 무엇이며 끝소리의 자음이 무엇인가만 안다면, 아니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자모가 구성되어 있어 약간의 학습만으로도 어느새 어렵지 않게 그것으로 소리나는대로 쓸 수 있게 된다. 그저 소리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쫓으면 된다. 이보다 더 쉽고 직관적인 사용법이 어디 있겠는가? 불과 네 살짜리 아이도 별다른 교육 없이도 단지 사람들이 보고 읽는 것만 보고서도 스스로 한글을 깨우칠 수 있다. 그런 글자다. 성삼문의 말처럼 한글이야 말로 소리를 그려낸 가장 기호적인 상형문자라 할 수 있다. 개를 그린 것을 보고 누구나 개라는 것을 알 듯 소리를 그려놓았으니 누구나 그 소리를 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각각의 자모가 모여 하나의 글자를 만들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각각의 자모는 알파벳처럼 음소문자다. 그러나 각각의 자모가 모여서 하나의 음절을 이루게 되면 일본의 가나와 마찬가지로 음절문자가 된다. 음소문자는 소리를 이루는 각각의 요소를 쫓게 된다. 반면 음절문자는 그를 통해 완성되어 나오는 소리를 따라 기록한다. 음소문자는 그 소리의 원리를 이해하는데 유리하고, 음절문자는 완성된 소리를 기록하고 쓰는데 이롭다. 소리나는대로 쓰고 쓰인 대로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각각의 자모는 소리를 이루는 요소이며, 그 자모가 모이면 실제 내는 소리가 된다. 세상에 이런 문자는 없다.
바로 세종대왕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왕이기 이전에 이후 수백년간 감히 견줄 이가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언어학자였다. 세종 이전에도 이후에도 독자적으로 문자를 만들어 성공한 예가 드문 것은 누구도 언어와 문자에 대한 세종의 이해를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세월을 거쳐 자연적으로 완성된 문자체계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직관적으로 쓸 수 있는 수월한 문자체계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보다 깊이 있는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훈민정음해례를 보면 놀란다. 그때 이미 세종은 사람이 내는 소리에 대해 이토록 체계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해 놓고 있었는가. 그것이 벌써 15세기의 일이었다.
그런 문자이기 때문이다. 세종이 따로 더 더한 것이 없었다. 1443년 훈민정음 창제가 발표되고, 다시 3년의 테스트를 거쳐 1446년 마침내 훈민정음이 반포되었을 때 이미 한글은 완성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소리나는대로 쓴다. 그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원칙에 입각해 글자가 주어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쓰기 시작했다. 맞춤법이 정교하게 다듬어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고, 이전에는 진짜 소리 나는대로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가 일어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마 지금도 그렇게 쓰라 하면 조금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진정 세종대왕과 한글에 대해 많이 배우고 연구한 티가 나는 드라마일 것이다. 한글을 이렇게까지 표현할 수 있는가? 소리를 그린다. 말 그대로다. 소리를 그린다. 소리 그 자체를 원리를 쫓아 하나하나의 요소를 조합하여 그려낸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의 수는 거의 무한하다. 과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와 같은 문자가, 그리고 그러한 문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언어학자란 세종대왕 이외에 다른 누가 있었겠는가? 그저 벅차오를 뿐. 드라마를 보면서 이리 뿌듯해 보기도 오랜만일 것이다. 성삼문(현우 분)과 박팽년(김기범 분)의 마음이 바로 필자의 마음이었다. 이렇게 훈민정음은 만들어졌다. 비록 픽션이라 할지라도.
아무튼 그런 한 편으로 드라마의 또 다른 한 축인 밀본을 둘러싼 술레잡기도 계속된다. 마침내 밀본의 본원 정기준의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많은 이들이 예상한 그대로 가리온(윤제문 분)이었다. 이미 지난 9회에서 가리온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단서를 남긴 바 있었다. 조그만 제주를 믿고 경솔히 행동하다가 집안 사람이 모두 죽고 아버지도 비명에 가고 말았다. 도적이 쏜 화살에 맞아 벌집이 되어 돌아갔다는 말에서 드라마 초반 정도광이 조말생이 이끄는 관군이 쏜 화살에 맞고 죽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 다만 벌집은 총을 맞았을 때 총알이 살을 파고 들어간 모양을 두고 하는 말이고, 원래 화살에 맞았을 때는 고슴도치라 하지 않던가. 약간의 옥의 티라 할 것이다. 원래 화살에 맞았을 때는 벌집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중의 트릭이었다. 남사철을 찾아와 협박한 흉수가 가리온의 칼을 현장에 남겼다. 그러나 가리온의 말처럼 검안의 전문가이기도 한 가리온이 굳이 남사철을 협박하며 자신의 칼을 현장에 남길 리 없으니 가리온은 남사철을 위협한 범인이 아니다. 남사철이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가리온은 범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남사철이 당한 것이 사실이 아니면 가리온은 당연히 범인이 아니게 된다. 심리의 함정이기도 하다. 가리온이 조말생(이재용 분)에게 잡혀간 것은 그가 정기준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기준이라고 하는 혐의마저 가려지고 만다. 아마 굳이 이신적(안석환 분)과 심종수(한상진 분)가 나서지만 않았다면 가리온의 정체는 상당기간 지켜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결국 모든 의심을 풀고 가리온이 풀려났을 때 정작 그를 통해 밀본을 찾으려는 이신적과 밀본의 핵심에 다가가려는 야심찬 심종수에 의해 허무하게 그의 정체는 드러나고 만다. 반전이라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단서가 주어졌기에 약간의 놀라움만 있을 뿐이다.
과연 세종은 가리온을 살렸어야 했는가? 가리온을 살리기 위해 소이(신세경 분)으로 하여금 증언케 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나라의 큰 일을 드러냈어야 했겠는가? 왕이란 비정한 것이다. 왕이란 천하를 아우르기에 개개인까지 세밀히 살피기에는 한계가 있다. 왕이 보아야 하는 것은 나라이고 백성이지 하나의 이름,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보통의 정신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리온이 아깝더라도 더 큰 일을 위해서는 포기해야 한다. 덕분에 강채윤(장혁 분)만 죽어나게 생겼다. 단서조차 거의 없는 상황에 가리온을 살리기 위해 뛰어다니지 않으면 안된다. 사소한 소울음소리 하나로 어느새 남사철의 집사가 가리온의 칼을 훔쳐간 범인임을 밝혀내게 되었을 때의 짜릿함은 추리물을 읽는 그 즐거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리온을 살리려 짐짓 강채윤에게 힌트까지 주고, 해맑에 웃는 얼굴로 더 큰 믿음을 가지고 더 큰 일을 맡기려 무휼과 함께 찾아가기까지 한다. 왕인 것이다. 모두가 소중하지만 어느 하나 소중한 것이 없다.
이번에는 깨알같은 장면도 많았다. 특히 세종과 무휼(조진웅 분)의 대화가 그렇다. 성삼문과 박팽년의 말을 계기로 어느새 사건의 실체를 짐작하게 된 세종, 그러나 세종이 하는 말을 무휼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알아듣지 못한 것은 좋은데 그것을 애써 알아들은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무척 귀엽기까지 하다. 강채윤이 모든 사실을 밝혀내자 이번에는 자신도 알고 있었다며 아예 딴소리를 하는 세종에게 매달리기까지 한다. 원래 이런 아저씨였던가.
그러고 보면 참 절묘하다. 어째서 소이였는가? 아니 어째서 굳이 원작에도 없는 소이와 강채윤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드라마에 삽입한 것일까? 소이가 글을 알지 못하기에 심온과 그의 노비이던 소이와 강채윤의 부모과 가족마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이 한이 되어, 그 죄책감으로 소이는 지금도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잠을 자는 것이 두렵다.
만일 그녀가 그 때 그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면? 그 편지의 내용이 소이도 읽을 수 있는 글로써 쓰여져 있었다면? 그랬다면 소이는 편지의 내용이 생각시가 말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심온도, 똘복과 자신의 부모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죽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토록 죄책감에 잠을 이루는 것마저 두려워하며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터였다. 그 한이 더욱 소이로 하여금 세종의 야심찬 계획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강채윤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하며.
이야말로 훈민정음이 창제된 뜻이라고나 할까? 세종이 한글로 편지를 적어보냈고, 그 편지를 소이가 읽었다. 세종이 건넨 편지가 뒤바뀐 것조차 글을 읽지 못하여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이자 세종에게 장인이 되는 심온마저 태종의 손에 의해 죽고, 그가 살리고자 했던 이들 모두 역시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세종 입장에서도 뼈아프다. 그래서 세종이고 소이였던 셈이다. 그리고 똘복이 강채윤이다.
그리고 하필 강채윤인 이유, 아니 정기준도 마찬가지다. 드라마에서 오직 이 두 사람만이 세종의 이름을 부른다. 왕이 아닌 개인 이도로써 그를 대하며 그에게 원한과 증오를 품고 있다. 왕으로써 큰 일을 해내려고 하는 세종과 그런 세종을 개인으로 여기며 그를 죽이려 드는 강채윤, 그리고 세종이 이룬 모든 것을 부수고 원점으로 돌리려는 정기준. 왕이라는 가면 아래 왕이라는 가면을 쓰게 된 짐승의 피비린내가 흐른다. 타인을 죽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죽는다. 그래서 세종과 강채윤, 정기준이 이 드라마를 끌어가는 세 사람인 것이다.
역사와 더불어 스릴러의 재미를 놓치 않는다. 출상술을 활용한 무협적 요소 또한 마찬가지다. 심종수의 검술은 장담하던 것처럼 무휼 이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새로운 변수다. 단순히 칼 좀 쓰는 선비가 아니다. 정모군까지 도성으로 들어오며 스케일도 커진다. 이제는 정기준이 무엇을 꾀하려는지 알 수 있으리라. 그저 재미있을 뿐. 원작은 오래전에 뛰어넘었다.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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