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들기 시작한 의문이었다. 과연 실제 우렁각시가 있어서 혼자 사는 총각의 집안일을 살피고 챙겼을 때 총각의 입장에서 그것이 그저 반갑고 좋기만 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때로 잘 차려진 저녁밥상보다 원래 먹으려 했던 라면 쪽이 더 편하고 좋은 경우도 있다.
일종의 관성일 것이다. 남들 보기에 뭐 그런 궁상이 다 있는가 싶다. 먹는 것도 그렇고, 빨래며 청소도 그렇고, 어쩐지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제멋대로 어지러져 있는 방이더라도 있어야 할 물건은 있어야 할 곳에 알아서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오히려 그것을 청소해준다고 건드리면 더 혼란스럽고 당황스럽다. 불편하다.
저녁에는 라면을 먹어야지. 혹은 저녁에는 간단하게 냉장고의 햄을 구워 맥주와 함께 가볍게 먹고 자야겠다. 이런저런 궁리를 해며 집에 돌아왔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저녁밥상이 있다. 의도한 것도 아니고 예정한 것도 아니다. 갑작스레 나의 일상에 끼어든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밥이고 잘 차려진 음식이어도 어색하고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오히려 빈곤하기 짝이 없는 원래의 저녁식사 쪽에 더 마음이 끌린다. 고맙기는 하다.
아마 이강훈(신하균 분)이 그런 타입이었을 것이다. 아주 어려서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와 둘이서 살았다. 어머니가 다시 돌아왔지만 세상사는 요령이 부족한 탓에 많은 것을 스스로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살림에 돈 많이 드는 의대에 진학해서 동년배 가운데 최고라 불리우기까지 그의 노력이 어떠했을까?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자신을 다잡아야 했을 테고, 그런 만큼 그의 세계는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 자주성가한 사람 가운데 그런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실패하는 그 순간까지 성공한 기억에 갇히게 된다. 더구나 그 성공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앞만 보며 내달려 온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자신의 성공이 곧 전범이 되고, 법이 되고, 규칙이 되고, 도덕이 된다. 그것이 옳다. 그것이 곧 정의다. 그렇게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자신의 노력과 경험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단단한 올무를 만들고 사람을 가두고 마는 것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그 자신도 나가려 하지 않는다. 인정하거나, 존경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것을 부수려 하기 전까지는.
그래서 더 예민하기도 하다. 자신의 에고에 도전하려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안으로 들어오려는 상대에 대해. 그는 적이다. 하물며 이강훈은 애써 자신을 두르고 있는 에고의 갑옷을 벗어던지고 나면 전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외면하고만 싶은 비참한 현실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오로지 노력과 실력으로만 지금의 자리에 오른 그에게 성공이란 그를 지키는 단단한 가시갑옷과도 같다. 누구도 그것을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설사 그것이 그토록 성공을 위해 아부하던 학과장 고재학(이성민 분)이고, 그를 사랑하여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하려는 윤지혜(최정원 분)이라 할지라도.
이강훈이 정유미(김수현 분)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다. 차라리 이강훈이 먼저 정유미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녀를 이용하려 다가갔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멋재로 이강훈의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강훈에 대해 알려 하고, 이강훈의 삶이나 방식에 개입하려 한다. 그녀의 화려한 배경이 오히려 그를 이강훈이 아니도록 휘두를 것 같다. 이강훈과 같은 타입은 빚을 지는 것도 끔찍하게 싫어하면서, 일단 빚을 지고 나면 어떻게든 갚아야 한다. 그런데 감히 건방지게 윤지혜가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려 한다. 사랑이라는 섣부른 감정을 가지고.
"너 나 좋아해?"
윤지혜에게 묻는 이강훈의 말투에서 경멸이 배어나오는 이유다. 그리고 아마도 이강훈이 자기에게 솔직하게 고백해 오는 윤지혜에게 키스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둘 중 하나다. 온전히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끝내 배척해 버리거나. 이강훈 역시 윤지혜에게 아주 마음이 없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윤지혜를 위해 그토록 끔찍이도 싫어하는 환자에게 허리를 숙이는 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말했듯 윤지혜가 들어옴으로써 이제까지의 그의 삶과 방식이 흐트러질 것이 두렵다. 설사 그것이 그에게 좋은 쪽으로의 변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성장일 것이다. 그가 자존이 아닌 자아를 선택하기까지. 하지만 자아를 선택한다는 것은 도를 아는 것과 같다. 자아를 찾는다고 하지민 진정 자아를 찾으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가 인정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인정할 수 있으면 된다. 존경받을 수 있고 우러름받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다. 다만 그것이 단지 지위와 직함인가? 그도 아니면 의사로서, 혹은 한 인간으로서 그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는 것인가? 학과장인 고재학과 모두에게 인정받는 최고의 권위자 김상철(정진영 분)은 그래서 그에게 갈림길이 되어 준다.
서준석(조동혁 분)의 변화가 상당히 뜻밖이다. 시놉시스를 보았을 때는 이런 타입이 아니었다. 첫회에서 보여진 것도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더 디테일해졌다고나 할까? 세상물정 모르고 온실에서 곱게 자라온 도련님이 흉악한 세상과 만나 오염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야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다른 누군가와 경쟁할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의사의 아들로써 의사가 되었고, 부모가 마련해준 탄탄대로를 걸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강훈이 그토록 바라던 조교수자리도 그다지 집착하지 않던 그의 앞에 조교수의 자리가 주어지고 그로 하여금 이강훈의 위에 설 것을 강요해 온다. 이강훈보다 앞서 조교수가 되었으니 이강훈의 위에 서서 그를 굽어보라.
순진하기만 하던 도련님이 더러워져간다. 그를 바라보는 당황해하면서도 걱정스런 윤지혜의 눈빛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를 그토록 아끼던 김상철의 실망이 그것을 말해주려 한다. 진정 순수하다는 것은 더러움을 딛고 이겨내어 순수해지는 것이다. 더러움을 모르는 것은 그저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무지하여 더러운 것을 알지 못한다. 더러운 것을 알고서도 그는 순수함을 지킬 수 있는가? 차라리 적당히 더러운 쪽이 때를 덜 타기에 좋기도 하다. 변화가 급작스럽다. 고재학의 야심과 탐욕에 그의 뿌리깊은 이강훈에 대한 열등감이 더해지며 순식간에 사람이 달라져간다. 앞으로 서준석의 변화를 기대해 보아도 좋을까?
이강훈이 서준석에게 과장되이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가 가진 출신과 배경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강훈의 열등감이다. 그에 반해 서준석은 출신과 배경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이강훈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는 열등감이 있다. 차라리 이강훈이 자기보다 앞서 있는 동안에는 그것도 그대로 인정하고 지낼 수 있었지만, 조교수라는 앞선 지위는 그에게 자기의 몫을 챙기라 강요하게 된다. 서준석이 환자의 혈액검사 오더까지 고쳐가며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이강훈에 대한 열등감과 그럼에도 어느새 지켜야 할 것이 생긴 자신에 대해서.
다만 그렇게까지 하고 나서 그가 진정으로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윤지혜는 이강훈을 쫓고, 김상철은 그에게 실망감을 느낀다. 조교수의 자리와 학과장 고재학과의 관계는 얻었지만 아마 더욱 그는 이강훈에 대한 열등감과 자신에 대한 모멸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것에 서준석이 익숙해질 때 서준석은 고재학이 되어 버린다.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고, 어떤 것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자신을 던지며 그것에 만족해한다. 이강훈의 의사로서의 실력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거나 질투심을 느낄 일도 없다. 그렇게 되어갈까?
아무튼 전문인에게 있어 요구되는 유일하면서 가장 강력한 덕목은 다름아닌 전문가로서의 역량일 것이다. 더구나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윤지혜가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수술 도중 환자의 출혈을 지혈하는데 있어 겁먹고 머뭇거린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다. 서준석이 아무리 원만하게 대인관계를 잘 가져갔어도 정작 환자 앞에서 그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 환자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그에 비하면 아무리 주위로부터 욕을 먹고 비난을 들어도 환자에 대한 이강훈의 자세나 그의 실력 만큼은 진짜일 것이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사람이 좋은가? 아니면 사람은 형편없지만 실력은 훌륭한가? 다만 서준석이 전자의 역할을 맡기에는 너무 순진하다는 것이 걸린다. 순진한 만큼 너무 쉽게 빨리 변한다.
그나저나 수간호사 홍은숙(임지은 분)에게 그런 애틋한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아직까지도 그 사람을 못 잊고 지갑에 사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애잔하면서도 귀엽다. 그렇기에 아는 것이리라. 그 자신이 솔직하지 못해서 놓아 버린 사랑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윤지혜의 마음을 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미련이 그녀로 하여금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일 테도. 그녀에게도 봄바람을 불어오게 될까? 보다 솔직해진 윤지혜에게 있어 수간호사의 존재가 많이 의지가 될 지는 모르겠다.
길거리에서 파는 양말을 보고 머뭇거리는 이강훈의 모습이 애닲다. 어머니의 맨발이 눈에 어른거린다. 구멍뚤린 양말이 그리 가슴에 사무친다. 하지만 그것을 사러 갈 용기가 없다. 사람이 지나치게 다정해도 자신의 다정함을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다. 지금 그는 그 자리에 서 있는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버겁다. 어머니까지 짊어지고 가기에는 너무 힘들고 고단하다. 마침내 양말을 사지 못하고 돌아서고 마는 그의 모습이 그래서 비장하면서도 애처로운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맞는 말이다. 천하대학에 그의 자리가 없다면 다른 곳에 자리를 찾아 떠나가면 그 뿐이다. 실력에 자신이 없다면 모를까 실력만 충분하다면 그것이 장사밑천이 된다. 천하대학이 아니더라도 굳이 더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어디에라도 자신의 자리를 찾고 정착하는데에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떠날 것이면 드라마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연 그를 천하대학 병원에 다시 머물게 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김상철에 대해서마저 경쟁심을 보이는 이강훈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다. 김상철이 있는 것만 알고 이강훈이 있는 것은 모른다. 김상철이 훌륭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다. 어째서 자기가 조교수가 되고자 면접을 보는데 그 자리에서마저 김상철의 이름이 나오는가? 친해지기에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이다. 이강훈이 진정으로 자신의 실력에 자신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때.
드라마란 갈등이다. 갈등에서 오는 긴장이다. 시청자마저 잠시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바짝 조인 긴장이 그 해결을 바라며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조이는 법을 아는 드라마다. 푸는 법도 안다. 뻔한 사랑이지만 사랑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법도 안다. 무엇보다 인물이 디테일하다. 다양한 인간의 군상들이 병원이라는 공간 안에서 서로 얽히며 드라마를 만들어간다.
재미있다. 다시 일주일. 윤지혜의 사랑고백은 어떻게 되려는가? 윤지혜에게 한 이강훈의 키스는 어찌하려는가? 천하대학 병원을 그만두려 한다. 고재학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서준석과도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과연 완벽하게 고립된 그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흥미롭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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