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천일의 약속 - 심장이 뛰고 있었단 말이야, 이 벽창호야!

까칠부 2011. 11. 30. 09:11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아마 조금 있으면 이서연(수애 분)의 임신소식이 들려오리라. 과연 아이를 낳을 것인가, 낳을 수 있는 것인가를 두고 한참을 다투고 갈등하게 되리라. 다만 차이라면 그 임신소식이 신혼여행을 떠난 당일날 전해졌다는 것. 주말드라마가 아닌 미니시리즈였다.

 

여성이란 모성이다. 사랑이란 생식을 위한 것이다. 아이는 영원으로 이어진다. 사랑을 하였으면 결실이 있는 것이고, 그 결실은 지금의 사랑이 단지 한 순간의 감정만이 아니었음을 증거로써 보여주게 된다. 하물며 병이라고 하는 절박함은 더욱 이서연의 모성을, 그리고 그런 이서연의 모성을 지켜보는 박지형(김래원 분)의 사랑을, 그리고 아이가 주는 영원에 대한 약속을 더욱 간절하게 보듬어 주리라. 그래서 한국드라마라면 적어도 이런 장면이 한 번 쯤은 들어가 주어야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다. 무엇보다 한국드라마답다.

 

처음엔 지우려 했다. 어떻게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자신이 아이를 낳고 기르겠는가? 아이를 낳는 것도, 더구나 기르는 것은 더 무리다. 자기 자신도 어찌될 지 모르는데 아이를 낳아서 무엇을 어찌하라는 것인가? 하루 앞도 낙관할 수 없는 그녀의 막막한 처지는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고 하는 당연한 사실조차도 그저 재앙으로, 저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차라리 없었던 셈 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어차피 잊어버릴 테니.

 

그런 반면 박지형은 낳기를 원했다. 당연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낳은 자신의 아이다. 그런 아이를 거부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자기의 아이라 하면 없던 집착도 생기기 마련이다. 핏줄에 대한 집착은 동물의 본능이다. 만일 아이만 낳을 수 있다면 그 아이가 이서연의 빈자리를 채워주리라. 장차 이서연이 어떻게 되더라도 아이가 있어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리라. 이서연만큼이나 충분히 아이도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병원에 들러 검사를 받고 의사와 상담하고 난 다음의 반응은 처음과 전혀 반대였다. 아이로 인해 이서연이 위험해질 수 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약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이 이서연의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아이보다 이서연이 더 소중했던 박지형은 이서연에게 아이를 포기하자 말한다. 그에게 아이가 필요했던 것은 '이서연'의 아이였기 때문이었지 한 번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 자신은 아니었으니까. 그에 반해 이서연에게 아이란 살아있는 심장의 박동소리였다. 자신의 안에 생명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다.

 

어쩌면 부성과 모성이 갈리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여성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남성은 결국 관계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아이임을 인지할 수 있다. 아이의 어머니를 통해서만이 자기가 아이의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어머니는 무려 열 달이나 아이를 뱃속에 품고 함께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아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어머니는 아이와 이어진 자신의 몸을 통해 일찍부터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비로소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것일 뿐 그 전부터도 아이와는 항상 서로 소통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태도가 다른 이유다. 아내인 이서연을 위해 아이를 포기하려는 박지형이나, 아이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려 드는 이서연처럼.

 

물론 그것이 과연 절대적인가? 이서연의 어머니(김부선 분)도 결국 그녀를 버렸었다. 이서연의 고모 역시 자신의 딸 장명희(문정희 분)보다 이서연에게 더 모정을 느끼고 있다. 오현아(이미숙 분)가 딸 노향기(정유미 분)를 다그치는 것이나, 강수정(김해숙 분)이 아들 박지형에 관대할 수밖에 없는 것도 모성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거꾸로 박지형의 아버지 박창주(임채무 분)은 아들 박지형에 집착하려 들고, 노향기의 아버지 노홍길(박영규 분)은 딸 노향기에 관용적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결국은 태어나고 난 다음의 일일 테니까.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는 자체가 아닌 태어나고 난 이후의 쌓여진 이야기들이 그러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단지 낳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만드는 것은 태어나고 나서의 누적된 관계인 것이다.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 싫었던 기억, 화났던 기억, 슬펐던 기억, 그 수많은 기억 가운데 자기 안에 부모라는, 자식이라는 실체가 만들어진다. 때로 부모와 자식이 어긋나는 것은 그러한 기억이 서로 어긋난 때문인 경우가 많다. 박창주가 바라는 아들 박지형이 실제의 박지형과 다르듯, 오현아가 바라는 딸 노향기와 실제의 노향기가 다르다.

 

그것이 처음 이서연은 두려웠던 것이고, 박지형에게는 간절했던 것이었다. 역시 모성과 부성의 차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는 그 자체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때 이서연은 아이를 선택하고 박지형은 이서연을 선택하고 만다. 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부성에 대해, 태어나는 그 자체를 체감할 수 있는 모성의 차이라고나 할까? 하필 신혼여행 도중 일찌감치 돌아온 두 사람을 찾은 강수정과 그녀가 건낸 반지로 인해 그러한 모성이라고 하는 부분은 극대화된다. 어쩔 수 없이 박지형이 이서연에게 져 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최소한 아이가 뱃속에 있는 동안에는 부성보다는 모성이 우선한다. 아이에 대해서는 부성보다 모성이 우선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서연은 임신이라고 하는 현실을, 그리고 출산에 이르는 과정을 어떻게 감당해낼 것인가? 기쁘고 설레는 만큼이나 두렵고 불안할 것이다. 점차 깊어지는 병에 딛고 선 현실마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자기 자신마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게 될 때 그때에도 그녀는 출산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박지형은 그것을 사랑으로 끝까지 지켜볼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아이에게 모이게 될 주위의 마음은. 아이란 또한 부모와의 사이를 화해시키는 매개이기도 하다. 어쩌면 아이의 태어남이야 말로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를 이루지 않을까.

 

남녀간의 사랑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지금의 이서연에 대한 박지형의 사랑은 에로스적인 충동적인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아가페적인 사랑에 가깝다. 아버지로서 딸을 사랑하듯, 인간이 인간에게 갖는 그러한 연민과 애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실제 부모로서의 자식에 대한 감정으로 이어진다. 박창주와 강수정의 내리사랑과 이어지는 이서연의 임신으로 인한 부모로서 가져야 할 감정들. 세상이 끝나가려 할 때 그러한 사랑의 감정들은 어떠한 모습을 가지게 될까? 아마 드라마의 주제일 터이지만.

 

"왜 바보야? 이악스럽지 않아서 바보야? 맑아서 바보야? 그런 게 바보인 거야?"

 

과연 노향기는 바보인가? 하기는 바보같을 정도로 순진하다.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착하다. 답답할 정도로 맑고 투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올곧은 중심이 있다. 기꺼이 어렵기만 한 엄마와 맞서고, 세상의 눈과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중심이. 도대체 어떤 여자가 있어 자신의 약혼자가 결혼식 하루 전에 파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데 여전히 좋아라 하겠는가? 그 상대 여자가 알츠하이머라고 하니 불쌍하다며 동정한다. 강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자기의 사랑에 당당하다. 사실 박지형이야 어찌되었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장 고귀한 사랑은 짝사랑이라 하던가? 상대가 설사 돌아봐주지 않더라도 단지 그를 사랑한다는 자체로 만족할 수 있다. 그녀에게도 원망과 질투와 분노의 감정이 있을 테지만, 그래서 증오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테지만, 그러나 그런 모두를 이기고 끝끝내 박지형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지킨다. 최소한 그런 감정들로 인해 박지형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거짓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냥 강한 것이다. 그러한 부정적 감정에 지지 않을 만큼 마음이 강한 때문일 것이다.

 

노향기의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다. 그녀의 표정 하나, 대사 한 마디가 그녀의 강한 내면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을 탓하고, 어리석은 자는 남을 탓한다던가? 용기있는 자는 자기에 솔직하고, 비겁한 자는 남이 솔직하기를 바란다.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솔직한 것이 아니다. 질투하고 원망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의 감정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직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솔직한 것이다. 다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감정의 선이 그녀로 하여금 비현실적인 존재로, 바보로 여기게 만들 뿐. 고민은 홀로 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아내를 실망시켜주고 싶지 않아 병원을 그만두겠다. 친구로써 대등하기 위해 병원을 그만둬줬으면 한다. 친구로써 믿고 의지하기에 노홍길은 박창주를 붙잡고 싶어 하고, 오현아 역시 태도는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유일하게 강수정 앞에서만 약한 모습을 보인다. 좋은 사람들이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사람을 아낄 줄 안다. 사람이 소중한 것을 안다. 드라마가 기분 좋은 이유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악역은 이 드라마에 없다. 하긴 지난번에도 이야기했듯 알츠하이머라고 하는 재앙이 있는데 따로 악역을 둘 필요는 없다. 화해를 위한 아이까지 임신한 채다. 벌써부터 마지막이 기다려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 과정을 기다리며 보게 된다.

 

다만 아쉽다면 가끔 대사가 너무 튄다. 김수현 특유의 대사쓰기가 있음을 이미 알고는 있지만, 그렇더라도 때로 지나치게 현학적인 대사가 장면과 녹아들지 않을 때가 있다. 넘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문예적인 특유의 대사쓰기는 드라마의 감동을 더한다. 특히 이서연의 독백 한 마디 한 마디는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하다. 시를 인용해도 그것이 인용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서연의 대사인지. 하지만 역시 그렇더라도 조금은 절제할 필요가 있겠다.

 

드라마의 분기를 넘었다.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그리고 약을 먹을 수 없게 된 병은 더욱 깊어질 테고. 부모와의 화해와 무엇보다 자신이 놓인 현실에 대한 화해가 필요할 것이다. 표정은 밝지만 아직 이서연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남아있다. 기대된다. 흥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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