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무한도전 - 시간을 거슬러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까칠부 2011. 12. 4. 09:47

무언가 많이 그리워졌다. 아마도 지난주 방영을 시작한 MBC의 새 월화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세트를 활용한 듯한데, 그래서인지 사실 80년대 초반이라기보다는 그보다 더 오랜 듯한 빛바랜 느낌이 조금은 위화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이들 노는 모습은 약간의 차이는 있을 지 몰라도 전반적으로 매우 그리운 반가운 모습들이었다.

 

기억난다. 사실 '데덴찌'가 필자로서도 더 편하다. 아마 '데덴찌' 역시 일제강점기 많은 놀이와 더불어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것일 터다. 필자의 경우 두 가지로 기억하는데, 아주 오래전에는 손을 뒤에 숨겼다 앞으로 내며 '데덴찌스'라 외치는 것이었다가 중간에 손을 처음부터 앞으로 모으고 '쫄려도 한 판!'이라 외치며 뒤집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주욱 살았었기에 그 변화는 더욱 선명하게 기억에 다가온다. 아마 당시 빈번하게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오던 아이들 가운데 누군가 그렇게 퍼뜨려 바꾼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동대문을 열어라'와 '여우야 뭐하니' 역시 <무한도전>에서의 그것과 필자가 살던 동네의 그것이 사뭇 달랐다. 필자의 동네에서는 '동대분을 열어라'에서 잡혔다고 린치를 가하고 하는 것이 없었다. '동대문을 열어라'는 바로 '여우야 뭐하니'를 위한 술래뽑기 게임이었다. '여우야 뭐하니'에서 술레였던 한 사람과 잡힌 한 사람이 '동대문을 열어라'에서 술래가 되어 아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잡고, 그러면 그 아이는 바로 '여우야 뭐하니'의 술래가 되는 것이었다.

 

진행방식도 상당히 달랐다. <무한도전>에서는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라고 물으면서 술래에게 다가갔지만, 필자의 동네에서는 먼저 여우에게 묻기 전에 고개를 넘는 고개넘이가 있었다.

 

"한 고개 넘어가니 여우가 없어/두 고개 넘어가니 여우가 없어/세 고개 넘어가니 여우가 없어/네 고개 넘어가니 여우가 있어"

 

그 거리는 놀이 때마다 달랐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고개를 넘고 넘어 겨우 여우를 찾아내고 나서야 놀이는 여우에게 묻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여우야 여우냐 뭐하니?" 물으면 술래는 처음에는 '잠잔다', '세수한다' 대답하고, 그러면 아이들은 '잠꾸러기', '멋쟁이'라 대꾸한다. 그러다가 '밥먹는다'라는 대답이 나오면 '무슨 반찬'을 묻고, '개구리 반찬'이라 대답하면 '살았니?/죽었니?'를 묻고, 그래서 '살았다!' 외치면 그때는 아이들은 도망가야 한다. 잡히면 말한대로 다시 '동대문을 열어라'의 술래가 되어 다른 술래를 찾아야 한다.

 

상당히 복잡하지만, 아마 원래는 <무한도전>의 방식이 맞을 것이고 필자의 동네에서는 워낙 여자아이들도 많이 같이 어울려 놀던 놀이인 탓에 다른 아이를 때리는 것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아 그런 식으로 바뀌게 된 듯하다. 다른 동네 가서 놀아 본 적이 없어서 그 부분은 확신은 못하겠다. 말했듯 여자아이도 함께 끼어 놀던 놀이이기에 나이를 먹고 나서는 괜시리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창피해서 동생들 말고는 이후로 거의 잘 놀지 않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발뛰기'는 기억에 많은 혼동이 있다. 두 가지 룰이 있었다. 하나는 두 발로 뛰는 것,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한 발로 뛰는 것, 전자는 <무한도전>에서 하던 방식 그대로이고, 후자는 그것을 한 발 - 즉 깨끔발로 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가 함께 행해졌는지, 함께 행해졌는데 어떤 방식으로 교대로 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흐릿하다. 괜히 욕심내서 도움닫기까지 해서 멀리 뛰었다가 결국 돌아가지 못해 죽고 마는 가련한 처지들을 많이 보았었다. 아니면 깨끔발은 다른 놀이의 기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딱지치기'에 대해서도. '딱지치기'라기보다는 원래 어려서 쓰던 '딱지먹기' 쪽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딱지치기'라 하면 네모난 접은 딱지를, '딱지먹기'라 하면 공장에서 인쇄되어 나온 동그란 딱지를 의미했다. 방송에서 동그란 딱지로 하던 '딱지먹기'를 보여주지 못한 이유를 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아이들 버전의 도박이었다. 필자가 바로 그 '딱지먹기'로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 때 섯다와 도리짓고땡의 원리를 알았다. 야바위도 있었고, 아예 우악스럽게 뒤집어 먹는 것도 있어 다양하게 딱지를 칩삼아, 딱지를 도구삼아 놀이를 즐겼던 것을 기억한다. 역시나 '딱지먹기'의 매력이라면 가지고 있는 딱지를 모두 걸고 한 방에 털어먹는 '토리'였을 것이다. 네가 떨어지나 내가 떨어지나. 다행히 그 이후 도박은 거의 않고 있다.

 

지우개싸움도 그리웠다. 필자의 학교에서는 'KO'라 하지 않고 '폴'이라 불렀는데, 아마 놀이 자체가 레슬링에서 온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완전히 위를 덮으면 '폴', 그리고 살짝 위에 올라가면 '카운트', 참고로 프로레슬링에서 '폴' 판정을 내리는 것이 링 바닥을 세 번 치며 카운트를 마친 다음이었다. 필자가 어려서는 아직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상당했다. 즐거웠는데.

 

아마 그리고 그 시절 또래들에게 벤츠이고 BMW였을 것이다. 로얄살롱, 프린스, 그라나다, 스텔라는 상당히 자동차가 일반화되고 나서 나왔다. 이미지도 그래서 상당히 세련되다. 이전까지 나온 '엑셀'이나 '프레스토'에 비해서도 상당히 세련된 이미지였다. '프린스'는 마치 해외의 스포츠카를 연상시키는 유선형 디자인으로 이후 '르망'에 이르기까지 인기가 높았고, '포니'는 오랫동안 택시로 더 친숙했다. 아마 '포니' 택시 이후로 가장 친숙한 택시가 <무한도전>에서도 언급된 '스텔라' 택시가 아니었을까? 필자 어려서도 택시 기본요금은 600원이었는데, 아마 상당기간 600원이 유지되고 있었을 것이다. 택시 역시 대중교통이라고 당시 물가안정 차원에서 요금을 묶어두었던 기억이 있다. 꺾는 미터기도 참 그립다.

 

아마 상당부분 어린 세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일 테지만. 필자의 동생도 필자와 6살 차이가 나는데 아는 놀이가 상당히 달랐다. 많은 놀이가 사라지고, 또한 많은 놀이가 새로 만들어졌으며, 기존의 놀리도 그 룰이 자주 바뀌고 있었다. <무한도전>에서처럼 유재석이 하하의 동네에 이사가고, 정형돈이 길의 동네로 이사가고 나면 결국 둘 중 절충되어 새로운 한 가지가 만들어지는 식이다. 그때는 그렇게 인구이동도 심했다.

 

지금은 생소한 '삐라' 주우러 다니던 이야기며, 기억에도 새롭던 불량식품 '아폴로', '쫀드기', 하지만 당시 인기있던 불량식품들은 대부분 연탄불과 가까운 것들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색색의 과자인지 어포인지는 연탄불에 구우면 매캐한 연기와 함께 바삭하게 쪼그라들고 있었다. 심지어 본드를 그대로 입에 넣어 빨며 풍선처럼 불던 것도 있었는데. 한 번 기억의 봇물이 터지니 내내 주체할 수 없이 기억들이 넘쳐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정겨운 기억, 깍두기. 왕따와 비슷하면서 달랐다. 꼭 동네에 보면 잘 못 노는 아이들이 있었다. 남들 만큼 못 뛰고, 남들 만큼 버티지도 못하고, 남들 만큼 재주가 있지도 않아, 괜히 함께 놀고 있으면 민폐가 되는 아이들. 그냥 내버려두면 마냥 그 아이들만 술래다. 재미가 없다. 그래서 당시 아이들은 그런 아이를 놀이에 끼워주되 '깍두기'라 불렀다. 그 아이만은 술래면제다. 잡지도 않고 배제하지도 않는다. 함께 끼어주고 놀되 다만 그냥 놀 뿐이다. 왕따와 다른 점이라면 굳이 괴롭히거나 하는 경우가 없었다는 점이랄까?

 

싸움을 좀 하는 아이들도 오히려 싸움 못하고 약한 아이들 있으면 괜히 보호해주고 하는 멋을 부리곤 하던 시절이었다. 노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사는 세계 자체가 달랐다. 그러고 보면 노는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 삥을 뜯는다는 이야기를 고등학교 올라가서 처음 들었다. 싸움이란 그런 아이들끼리나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었지 그것을 이용해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것이라고는 중학교까지 전혀 머리에 입력이 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을 부끄럽게 여기던 아이들이 참 많았었는데. 동네가 외져서일까?

 

물론 지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낸다는 것은 죽은 자식 뭣 만지기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아쉬워한다고 어쩌겠는가? 지금에 와서 아까워한다고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당시의 방식이 있고 지금은 지금의 방식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그런 점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함께 어울려 놀던 그 기억이.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도 깍두기로 끼워 함께 놀아주곤 하던 그런 다정함이.

 

생각해 보면 결국은 흙의 존재일 것이다. 유재석과 하하가 바닥에 금을 긋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아스팔트나 보도블록 위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흙길이 모두 포장되고 나서는 그래서 아이들은 석필로 바닥에 그려 놀이를 놀았다. 그리고 깨지고 긁혔다. 흙바닥이었다면 조금 상채기만 나고 말았을 것을 단단하고 거친 돌바닥에 제대로 쓸려 크게 다치곤 했었다. 충격을 전혀 흡수하지 못하는 돌바닥은 근육을 다치고 뼈를 다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맨몸이었을 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없었다. 바닥에 금을 긋는 것도 신발신은 발이면 충분하다. 기껏해야 아무데서나 주운 돌맹이 하나만 있으면 그것으로 얼마든지 놀 수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놀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집에 놀이기구가 없어 한데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비싼 옷을 입었어도 한 시간만 밖에서 놀고 있으면 그 차이란 없는 것이나 같았다. 하기는 그러다가도 누군가 축구공이라도 가지고 나타나면 그 아이는 모두의 영웅이 되었다. 배구공이며 심지어 농구공가지고도 잘도 차며 거리를 헤집고 놀았다.

 

여유였을 것이다. 항상 무언가를 채워야 하고, 무언가를 갖추어야 하고. 바닥은 아스팔트로 덮이고, 아이들의 손에는 값비싼 장난감이 들려졌다. 그보다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데라도 모여서 아이들끼리 아무런 거리낌없이 마음껏 뛰며 논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심각한 것이 있었다. 금을 밟았네, 아니네, 뭐가 어떻네, 참 사소한 일로도 많이도 싸웠다. 애들은 싸우며 큰다는 말이 맞다. 다시 생각하는 것이지만 역시 가난한 동네였던 탓이 크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참으로 여유로운 서울이었다.

 

박명수가 있었다. 유재석이 있었다. 괜히 잔꾀를 부리던 노홍철도 있었다. 어눌하게 힘만 좋은 정준하도 있었다. 아마 하하도, 길도, 정형돈도 있었을 것이다. 박명수가 12살이었을 때 필자는 몇 살이었을까? 아마 누군가는 필자가 놀던 그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같은 놀이를 하며 놀고 있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없이도 단지 나와 나 이외의 다른 아이들만 있다면.

 

예능으로서도 재미있었던 것은 그러한 어울림과 부딪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박명수를 깍두기로, 서로 몸과 몸을 부딪혀 놀이를 즐기며 서로 갈등하고 서로 다투기도 하며 서로의 다름을 확인한다. <무한도전> 멤버인데 그 과정에서 분량을 만들지 못할 리 없다. 그 재미없는 길마저 이번에는 제법 활약하고 있었다.

 

필자가 살던 동네가 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찾아가 봐야 예전 흔적은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아주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릴 무언가를 보게 되면 그것은 또 반갑지 않겠는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마치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은 듯 그립기도 하다. 아마 이런 것을 두고 나이를 먹어가는 느낌이라 하는 모양이다. 정겨웠다. 조금은 서럽기도 하다.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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