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무한도전 - 해진 골목 혼자 남은 박명수에게서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다!

까칠부 2011. 12. 11. 09:29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이 납득되었다.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잘 씻지도 않고, 옷은 언제 빨았는지 알 수도 없고, 말이며 행동도 굼뜨고 어눌했다. 곧잘 얕잡혔고, 놀림당했으며, 놀이 때는 항상 깍두기를 맡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 다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 남아 노는 아이였다.

 

필자는 서울 변두리에서 살았었다. 고단한 사람들이 많이 살 던 동네였다. 낮에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들이 많았고, 고작 손바닥만한 방에서 네다섯식구가 한 데 뒤엉켜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이들이 각자 자기방을 가지고, 공부방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만화나 TV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별세계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어디선가는 낮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저씨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아주머니들은 사소한 일로도 악다구니를 쓰며 뒤엉키고 있었다. 동네 한 쪽 구석 공터에서는 개잡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렸다. 공터에 굴러다니는 뼈다귀는 필연 누군가 잡아먹은 개뼈다귀일 터였다. 개뼈다귀라는 말이 거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런 동네였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분주하고 여유가 없던 그런 동네였다. 당연히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방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씻겨줄 어른도, 씻지 않으면 씻으라고 야단쳐주는 어른도, 옷을 더럽혀 가면 벗으라 하고는 갈아입히고 빨아주는 어른도 없었다. 밥 때가 되어 집에 돌아가도 맞아주는 것은 휑한 어두운 방안 뿐.

 

아이들은 어른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아니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따라하며 배우고 자란다.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장차 세상과 어울리며 무엇을 해야 되고,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 어쩌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어린시절 가장 가까이에서 어른을 보고 따라하며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없다. 아이들이 굼뜨고 어눌해지는 이유였다. 보고 따라하며 배우려 해도 그럴 어른이 없다.

 

그런 아이들은 대개 혼자 노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도 부모와 먼저 어울리며 학습하는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가 단절되면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도 단절되기 쉽다. 항상 주눅들어 있고, 그래서 항상 대하는 것이 어색하다. 거의 함께 놀게 되는 것도 같이 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해 억지로 끌어들여 같이 노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게 좋아한다.

 

사실 그런 아이들이 나중에 보면 안 좋은 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 바로 그런 때문이었다. 항상 굼뜨고 어눌하니 보통의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주눅들어 있고 말이며 행동이며 늦된 것도 얕잡히거나 따돌림당하는 이유가 된다. 결국 그런 아이들을 받아주는 세계는 따로 있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어른들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그늘진 세계일 것이다. 당연해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못하고 그저 본능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어울려가는 그런 세계.

 

방송에서도 아이들끼리 모이니 이것저것 충동에 이끌리며 이탈을 시도하게 된다. 그렇게 호기심이 많다. 세상 모든 금기들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어른들은 항상 아이들을 야단친다. 그러지 말라고. 그런데 그런 어른이 없다. 아이들은 부쩍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다. 술과 담배를 배우고, 도둑질을 배우고, 다른 아이들은 아직 그런 것이 있는 것도 모르는 것들을 일찌감치 배우고 그것을 당연한 듯 여기며 살아간다.

 

그런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것이다. 빛 한 점 들지 않던 어두컴컴한 좁은 방과 낮부터 술에 취해 자고 있던 녀석의 아버지가 지금도 인상에 선하다. 더럽고 꾀죄죄하다고, 하지만 필자 역시 그다지 나은 처지는 아니었기에. 차이라면 그래도 틈만 나면 필자를 붙잡고 무어라도 가르쳐주려 애쓰던 부모님이 계셨기에 필자의 경우는 그나마 상당히 분주한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아니었다. 한글도 아마 초등학교 5학년이 지나서도 제대로 쓰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서는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불과 1년 사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을 지나는 사이, 필자는 더 이상 그 녀석과 전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섞을 수 없게 되었다. 태연히 자전거 훔치던 이야기를 하고, 신문이며 우유를 빼돌려 팔아먹던 이야기를 하던 녀석과 더 이상 함께 어울리기에는 서로 사는 세계가 너무 달랐었다. 그저 리어카 끌고 동네를 돌면서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 팔아 용돈을 쓰던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몇 번 보았지만 확실히 전처럼은 되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녀석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난 뒤에야 오래전을 추억하며 겨우 아는 척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착한 녀석이었는데.

 

'오징어가이상'까지는 즐거웠다. '오징어가이상'은 오징어의 크기와 재미가 비례한다. 오징어의 크기는 참가한 사람의 수에 비례한다. 고등학교 시절 무려 15대 15로 운동장 절반을 차지하고 놀았던 적이 있는데, 정준하의 말처럼 그야말로 미식축구였다. 오징어를 가로지를 때 수비측은 스크럼을 짜고, 공격측은 초인들만 모여 보디체크에 들어갔다. 부딪히고 깨지고 찢기고 난리도 아니었다. 다 큰 사내녀석들이다.

 

<무한도전>에서도 수비에서 번번이 뚫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이 너무 적다. 가운데 건너는 것을 경계하고, 그러면서도 오징어를 가로지르는 것을 막고, 더구나 노홍철이 그랬던 것처럼 밖으로 나가 공격측을 쓰러뜨리는 공격수도 있어야 했다. 공격하는 편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면 그것처럼 곤란한 것도 없다. 철저한 분업과 협업에 의해 놀이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4명과 3명이면 너무 적지 않겠는가.

 

'다방구' 역시 마찬가지다. 필자가 어렸을 때 '다방구' 하면 기본적으로 10명 이상 모여서 즐겼다. '다방구'를 하려면 먼저 준비작업이 있었다.

 

"다방구 할 사람 여기 붙어라!"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노래를 부르며 지나려 하면 함께 다방구를 하려는 아이들이 어느새 모여들게 된다. 10명 이하로는 재미없다고 하지 않았다. 술래는 두 명이나 세 명, 그들 소수의 술래가 10명 가까운 아이들을 쫓아야 한다. 풀려나는 룰은 같다. 다만 술래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붙잡혀 있는 아이들 입장에서도 풀려날 가능성이 높기에, 잡힌 아이들을 지키는 술래와 잡힌 아이들 사이에서는 첨예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했었다.

"여기 오

지 마!"
"저기 떨어져 있어!"

 

최대한 손을 잡고 팔을 벌려 거리를 늘린 다음 술래로 하여금 그 바깥에 머물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 신경전 와중에 다른 아이들이 난입하여 '다방구'를 외치며 뛰어가고 했었다. 역시 사람이 많아야 즐거운 게임이다. 그렇지 않아도 난개발로 골목 또한 난해했기에 서로 쫓고 쫓기다 보면 해가 지는 것도 한순간이다.

 

확실히 그 시절에는 운동부족은 없었다. 허구헌날 나가서 깨지고 오는 것이 일이었다. 뻑하면 넘어지고, 부딪히고, 그래서 찢겨 피가 나고. 아까징기가 바로 머큐롬이다. 옥도정기라고도 불렀다. 요즘은 포비돈이라 부른다. 작은 상처에도 아예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빨간약을 크게 바르고 그러고서는 절뚝거리며 다시 놀러 나간다. 놀다가 찢겨 옷을 기워입는 것도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 신경쓸 새도 없었다.

 

'비석치기'는 우리동네에서는 '망까기'라 불렀다. 얼마나 좋은 망을 확보하는가가 놀이의 성패를 갈랐다. 가벼우면서도 날렵하고 그러면서도 잘 서는 망이 좋았다. 심지어 그렇게 확보한 망은 집에 가져가 고이 모셔놓기도 했었는데.

 

따지치기는 아이들 놀이의 백미다. 딱지를 만드는 가장 좋은 재료는 '빳빳이'라고 해서 학교 사회과부도였다. 손에 닿는 느낌이 다르다. 그 외에도 가끔 무모하게 골판지로 만든 박스로 딱지를 접어오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손가락 두 개 마디 정도 되는 딱지로도 곧잘 넘기고 했던 걸 보면 그것도 거의 초능력이었을 것이다. 배치기, 깎아치기, 뒤집기, 발 대고 치는 게 바로 뒤집기의 기술이다. 동네에 따라 반칙으로도 간주된다. 좋은 딱지를 뜻하는 '왕따시'는 아마 지금도 다른 뜻으로 많이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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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리운 친구 엄마와 아빠, 누나, 형, 딱 준하네 형이 친구 형 느낌이었다. 친구 누나는 대개 쌀쌀맞게 잘 대해주는 이미지였다. 친구 형은 엄격하게 잘 어울려주는 느낌일 테고. 공통점은 아이들이랑 함께 어울리는 것을 굉장히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데 그야말로 아이취급하기 일쑤였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존재. 부모의 권위보다 친구 형의 주먹이 항상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가장 못된 것을 가르쳐주는 것도 친구의 형이었다. 친구의 누나는 글쎄... 역시 살을 맞대고 한 데 어울리던 시절의 감성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과연 그렇게까지 느끼려는지.

 

하지만 역시 백미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항상 깍두기로, 잘 어울리지도 놀 줄도 모르고 뚱한 표정으로 있던 아이. 아마 박명수의 엄마와 아빠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 그조차도 아이 박명수의 환상이었을까? 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했다. 허구와 실제의 경계조차 모호하게 거짓말을 일상으로 했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고 홀로 남아 해지고 추운 골목에 앉아 있는 박명수에게서. 그래, 그 시절에는 그런 아이가 있었다.

 

주제였을 것이다. 아니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재석과 다른 아이들은 그다지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성격도 좋은 편이 아닌 박명수를 그리 챙기고 있었던 것일 게다. 배려하고, 참고, 위해주고.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까? 잘 해 주라고. 아니 그 시절 그런 아이들을 깍두기로 끼워주는 것도 누가 반드시 시켜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수미일관하여 주제를 드러낸다. 아니 그것은 필자가 그렇게 보았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옛생각에 젖어드는 가운데 박명수에게서 그리운 누군가의 모습을 보았다. 어느새 마음잡고 일찌감치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하여 번듯한 아이아버지로 자란 누군가가. IMF 당시 다니던 공장이 망해서 어찌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노란 가로등불이. 겨울 해는 너무 일찍 지고 골목에 부는 바람은 너무나 차가웠다.

 

그 시절을 떠올린다. 보도블록 대신 시커먼 흙이 깔려 있고, 동네가 좁아라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그런 시절을. 그리고 그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 역시. 지금의 필자가 있게 만든 그리운 시절이었다. 아이들과 아이들과 그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기억들. 즐겁다. 아련하다. 겨울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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