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무한도전 - 방송무한경쟁, 방송은 이미 권력이다!

까칠부 2011. 11. 20. 10:10

어쩌면 본질적인 물음일 것이다. 유재석, 정준하, 노홍철, 하하, 정형돈, 박명수, 길, 이 일곱 사람은 어째서 그토록 서로의 카메라를 빼앗기 위해 필사적인 것일까? 자신의 카메라를 지키기 위해 바닥을 뒹굴고, 상대의 카메라를 빼앗기 위해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신없이 뛰고 항상 긴장하여 주위를 살핀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유재석의 기습공격에 자칫 카메라를 빼앗길 상황에 처하자 정준하는 바로 주위에 있던 노홍철과 정형돈에게 손을 내민다.

 

"노홍철씨, 방송 나오게 해줄 테니까 그 카메라 줘요."
"야, 5분 줄게. 10분! 10분!"

 

거래란 가치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무언가를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에 그만한 가치가 주어져 있다는 뜻이 된다. 사막을 홀로 헤메는 사람에게 물 한 모금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사방이 맑은 물로 채워져 있다면 그 가치는 전혀 달라진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서도 물은 거래의 수단이 될 수 있겠는가?

 

하기는 원래 <무한도전>의 일곱 멤버가 서로의 카메라를 빼앗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던 이유 자체가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의 방송분량까지 독점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 때문이었다. 상대의 카메라를 빼앗게 되면 상대의 방송은 막을 내리고 그 만큼 자신의 방송을 연장할 수 있게 된다. 더 많은 시간을 카메라에 담고 대중에 노출시킬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예능인이다.

 

아니 예능인이기 이전에 그것은 어쩌면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개인이 바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새로운 오디션프로그램이라도 기획되면 수만, 아니 수십만의 사람들이 오디션을 보기 위해 예선장으로 몰려든다. 그 가운데는 진정 꿈과 열정을 가지고, 재능과 실력을 갖춘 상태에서 오디션에 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단지 방송에 얼굴을 비추고 싶다는 욕심에 일단 한 번 도전해 보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방송촬영을 나오면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든다. 몰려들어 방송에 허용하는 한 자기를 어필하려 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것은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하는 동물의 한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알리고 싶고, 타인을 알고 싶다. 그러한 교류와 소통의 네트워크야 말로 인간이 무리 속에서 살아가는 근원인 것이다. 그리고 방송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거대한 네트워크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영상에 담겨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전해지게 된다.

 

더구나 예능인에게 방송이란 대중에 자신을 알리고 그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비즈니스의 장이듯, 네트워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 자신을 알리고 전해야 하는 필연을 갖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 그런 이들에게 방송이란 중대한 이익이 걸린 현실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방송에 더 방송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에 자신과 자신의 상품을 알릴 수 있다는 뜻일 터이고, 그것은 그의 이익을 결정한다. 자칫 안 좋은 내용이 방송을 통해 대중에 알려질 경우 그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그것 또한 조심해야 한다.

 

한 번이라도 방송에 얼굴을 내비쳤으면 좋겠다. 기왕에 방송에 나오는 것 조금이라도 더 오랜 시간을 방송을 통해 보여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방송을 통해 보여지는 모습이 될 수 있으면 좋은 모습이었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결정하는가? 방송에 나오고, 또 얼마나 나오고, 다시 어떻게 나오고, 누가 결정하겠는가? 누가 방송을 소유하고 그 여부를 결정하는가? 바로 방송국이다. 방송이 권력이 되는 이유다. 카메라가 간절한 나머지 멤버들이 아직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멤버의 뒤를 쫓으며 카메라를 구걸하는 모습처럼 말이다.

 

카메라를 이유로 다른 멤버에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카메라를 매개로 다른 멤버와 거래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방송에 나오게 해 주겠다며 이것저것 요구하여 시킬 수도 있다. 어느새 정준하도, 노홍철도 자신의 카메라를 빼앗아간 유재석과 보조를 맞춰 방송에 모습을 비추기 위해 춤을 추고 있다. 방송은 그렇게 권력이 되고, 방송을 탐하는 모두는 그러한 방송의 권력 앞에 휘둘리는 약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인 것이다. 그래서 <무한도전>의 일곱 멤버들은 그토록 필사적으로 서로 쫓고 쫓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 아니 최소한 자신의 카메라를 지킴으로써 권력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피할 수 있다. 물론 소극적으로 피하려고만 들었던 박명수는 결국 하하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탐욕스럽게 다른 사람을 꺾고 그들의 몫까지 홀로 움켜쥘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한도전>이 굳이 종편의 개국을 염두에 둔 듯한 'TV전쟁' 미션을 제작하여 방송한 이유일 것이다. 종편 자체는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공중파만도 EBS포함 4개 방송국이 있고, 케이블은 그 몇 배의 채널이 서로 경쟁하고 있다. 거기에 단지 종합편성이 가능한 케이블채널 4개가 더해지고 있을 뿐이다. 더 경쟁이 치열해지기는 하겠디만 오히려 그러한 경쟁을 통해서 시청자는 더 양질의 방송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릴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러한 방송 자체가 이미 권력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지배하는 시대다. 비록 인터넷으로 인해 그 영향력이 많이 약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방송을 통해 보여지는 것들이 수많은 대중의 의식과 판단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더 큰 이익이 그곳에 있다. 그 이익을 쫓는 사람들로 인해 방송은 더욱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고 그것을 누리려 하게 된다. 결코 단지 좋은 뜻의 경쟁만을 정정당당히 펼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당장 광고수입 때문에라도 시청률에 무관할 수 없다. 광고가 팔려야 프로그램도 만들고 스태프며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 있다. 계속해서 방송국을 운영할 수 있다. 그리고 한 편으로 광고수입은 방송국 자신의 영향력이기도 하다. 얼마나 대중의 신뢰를 받는가? 얼마나 많은 대중들이 그들을 선택하고 있는가? 권력을,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방송국은 필사적이 된다. '유재석방송국'과 '하하방송국'이 서로를 꺾기 위해 모든 가용한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미 경쟁하는 가운데 초심이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유재석TV가 야심차게 준비한 '짝'은 폭력물이었다. 심지어 '짝의 역습' 파렴치한 배신과 음모마저 여과없이 내보내고 있었다. 송중기는 복근을 드러내고, 길은 각목으로 맞으면서도 아픈 것을 참아야 하고, 거친 말과 행동들이 일상으로 행해진다. 더 높은 시청률을 누리기 위해 상대의 방송에 편승하거나, 그 게스트를 빼돌리거나, 아예 방송을 베끼는 일도 일상으로 이루어진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선택되어야 한다. 선택된 자만이 살아남고 강해진다. 더 강한 권력과 더 큰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정정당당히 경쟁해서 패했다는 말은 필요없다.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단지 종편이라서 문제인가? 하지만 채널이 많아지는 만큼 경쟁이 치열해지면 기득권을 놓기 싫어하는 기존의 방송국이나 그것을 빼앗아 자기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생방송국이나 더욱 경쟁에 민감해지고 무리수를 두게 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조차도 시청자가 좋아하니까 그대로 넘어간다. 보다 자극적으로, 보다 말초적으로, 경쟁과 승리만이 모든 가치를 결정한다.

 

흥미롭다면 그런 과정에서 애초의 기획의도와는 다르게 혼돈 속을 표류하고 잇는 두 방송국의 모습일 것이다. 더 많은 시청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한 순간에 이제까지의 기획을 뒤엎고, 심지어 훔쳐서라도 대중이 좋아할만한 모습으로 바꾸게 된다.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니 그런 방향으로 드라마의 내용을 바꾸게 된다. 반대의 경우에는 반대의 모습들이 나타난다. 그조차 시청자는 시청자의 요구를 잘 반영한다며 좋아한다. 초심처럼 대한민국 방송국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어디 있을까?

 

거짓말과 모략이 난무하고, 담합과 배신이 일상이 되고, 그리고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처럼. 그렇게 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쟁취하고 싶은 것이 있다. 과연 누가 승리자일 것인가? 마지막에 압도적으로 높인 시청률을 기록했으니 유재석TV의 승리일 것인가? 하물며 하찮은 초심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따위 의미가 있을 리 없다. 시청자조차 그 순간 철저히 방송으로부터 소외된다. 소수만이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결정하며 마침내 누리게 될 것이다. 거대자본에 잠식된 방송이란 그렇다.

 

그런 미션이었을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르고가 아니다.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가 하는 것도 아니다. 그 근본에 대한 것이다. 그토록 필사적으로 경쟁하여 승자가 되고자 하는 것. 그 이유와 그 과정에서의 필연적인 모습들에 대해서도. 아니나 다를까 <무한도전> 멤버답게 멤버들의 연기 역시 훌륭했다. 이것이 언론이고, 그리고 종편의 논리이던 경쟁이다. 그것은 과연 좋은 결과로만 이어지겠는가? 물론 단지 인기연예인이 출연하는 여부를 쫓아 이리저리 헤매던 시청자의 무책임 또한 아무 상관없다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성이었을까? 아니면 비판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단지 그것을 시청자들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 뿐이었을까? 왁자한 웃음 속에 어떤 본질에 대한 추구와 고발을 보았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문제인가? 물론 재미도 있었다. 심각하지 않게 유쾌하게 웃을 수 있게 한다. 의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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