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천일의 약속 - 장명희의 눈물, 비극으로 화해에 이르는 이유...

까칠부 2011. 12. 7. 09:32

어째서 종교에서는 항상 원죄를 들추는가? 너는 죄인이며 이미 큰 죄를 지었다. 후회하고 반성해야 한다. 극복해야 한다. 죄가 바로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때문일 것이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다시는 그러겠다. 죄와 마주함으로써 사람은 비로소 죄의 무거움을 깨닫게 된다. 그럼으로써 양심을 일깨우고 반성하게 반성하게 되고 바로잡으려 노력하게 된다. 지난주 방영된 드라마 <뱀파이어 검사>에서 범인들이 흘리던 눈물과 같다고나 할까? 사람을 직접 죽이기까지 살인이라는 죄의 무개를 알지 못했다. 사람이 죽고 나니 비로소 죄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물론 이서연(수애 분)이 병에 걸린 것과 장명희(문정희 분)가 그동안 그토록 이서연에게 매몰차게 군 것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까 없다. 하지만 자기와 관계된 비극은 어느새 자신의 양심을 들쑤시게 된다. 병이란 그래서 병에 걸린 사람도, 그 병에 걸린 사람의 주위 사람들도 죄인으로 만든다. 자신이 걸린 병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할 것을 생각하니 병에 걸린 것이 죄인 것 같고, 자신과 가까운데 병에 걸렸으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잘못인 것 같고, 혹시나 자기가 원인이 되어 병에 걸렸는가 그것이 죄스럽고.

 

장명희와 이서연의 화해는 그래서 이미 예감한 바 있었다. 장명희는 사람이 악하다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여유 없이 자기를 드러내며 다른 사람을 압박해가며 그렇게 버티면서 살아간다. 아마도 이서연으로 인해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강박이 그녀를 그렇게 내몰았으리라. 그래서 그녀는 누구보다 이서연의 병에 대해 통곡하며 아파할 수 있다. 솔직한 사람이고, 그리고 자기가 이서연에 한 행동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터이므로. 아마 이서연이 진짜 나쁘거나 꺼려졌다면 장명희 역시 이서연에게 그처럼 마음대로 행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심술이었고 응석이었을 것이다.

 

병으로 인해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해결된다. 서로 등돌리고 있던 사람이 서로 마주볼 수 있게 되고, 평소 말 한 마디 섞지 않던 사람들이 서로 말을 나누게 되고, 평생 안 볼 것 같던 사람들도 병을 이유로 먼 걸음을 하게 된다. 미안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착하게. 말 한 마디를 해도, 행동 하나를 해도, 혹시나 상처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사람이 착해진다.

 

박지형(김래원 분)이 이서연에게 돌아가는 과정 역시 그랬다. 이서연의 병이 아니었다면 박지형은 어느새 피해자가 되어 이서연을 그리워하면서도 노향기와 결혼하여 어떻게든 잘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서연의 병은 박지형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만들었다. 그에게 죄를 부여했다. 그 죄를 씻을 의무를 부여했다. 그로 하여금 이서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이서연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강수정(김해숙 분)은 물론 박창주(임채무 분)에게도, 노향기(정유미 분)에게도 박지형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서 화해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고.

 

병이란 그래서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편리한 유용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곤란한 일만 있으면 없던 병도 앓으려 하는 것일 터이고 말이다. 어려서도 곤란한 일이 있거나, 아니면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확인하고 싶을 때 아이들은 꾀병을 앓았다. 웃는 얼굴에는 침을 뱉을 수 있지만 아파서 누워 있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다. 가련하고 애처롭고 무엇보다 그것이 미안하다. 무엇을 해도 마치 죄를 짓는 것 같다.

 

아마 이서연이 멀쩡했다면 강수정도 굳이 물까지 끼얹어가며 오랜 친구인 오현아(이미숙 분)과 맞서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아무리 사과를 해도 부족하다. 하지만 이서연의 병이 강수정을 단호하게 만든다. 이서연의 병에 대해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이서연에게 겸손해지도록 만든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에게 더욱 소중하게 진지하게 자신을 다잡게 한다. 병든 새끼를 나몰라라 외면하는 어미는 없다. 이미 품안에 들어온 내 새끼, 내 새끼가 사랑하여 결혼한 내 새끼다.

 

그토록 이서연에게 가혹할 정도로 단호하던 박창주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여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치료할 수 있는 병이면 치료하면 그만이다. 자기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그래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해주고 말면 그 뿐이다. 이렇게 영영 화해하지 않은 채 등을 돌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 마음의 짐을 어찌 감당하려는가? 물론 그것은 정작 이서연으로 인해 딸 노향기가 아파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오현아나 오빠 노영수(송창의 분)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중에라면 몰라도 당장은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노향기가 먼저 눈에 밟힌다. 하지만 그래서 끝내는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비극을 즐기는 이유다. 비극은 인간 내면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죄의식을 자극하여 그것을 일깨우고 다시 희석시킨다. 눈물을 흘리며, 비극에 공감하며, 반성하고 후회하고 때로 동정하고 연민하면서. 이서연의 병이 알츠하이머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또한 알츠하이머가 아니었다면 또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들이었다. 차라리 꾀병이었다면.

 

박지형의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다니던 직장마저 그만두고, 그토록 자신을 아끼던 고모에게까지 병을 알리고, 점차 병으로 인해 막다른 궁지로 몰리는 가운데 웃음으로써 겨우 현실을 잊어보려는 이서연에게 박지형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그저 함께 웃어주는 일 뿐. 그렇다고 그 작은 말과 몸짓 하나로도 감동을 주기에는 김래원의 연기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지켜보는 것도 사랑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서연의 비극이 너무 깊어 별다른 표가 나지 않는 것이다. 상당한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는 드라마임에도 김래원으로서는 너무 아쉬운 부분이라고나 할까?

 

박지형의 가족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정작 시어머니 강수정과 며느리 이서연은 있어도 아들이며 남편 박지형은 없었다. 박창주가 아내 강수정의 핸드폰 메시지에 관심을 보이게 되는 것도 아들 박지형이 아닌 며느리 이서연으로 인해서였다. 어려서 괜히 아픈 동생을 시샘하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픈 것도 벼슬이다. 아픈 것도 때로 권력이다. 비극은 비극대로, 드라마의 중심은 그래서 이서연에게 쏠린 채 너무나 확고하다. 박지형의 자리가 없다. 차라리 한 걸음 떨어져 이서연을 지켜보는 강수정이나 고모(오미연 분), 장명희, 장재민(이상우 분)은 보일지라도. 차라리 노향기와 그대로 결혼했더라면 박지형에게도 기회는 있었을 것을.

 

아무튼 김수현 드라마의 매력일 것이다. 최소한 억지스런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자기가 낳은 딸 노향기를 위해 이서연에게 싸움을 거는 오현아와 자신의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 며느리 이서연을 위해 그에 맞서는 강수정, 아들이 내심 걱정되는 박창주와 딸바보 노홍길(박영규 분). 자신의 아내를 위해 나서는 박지형을 향해 속없어 보이는 아들 노영수도 나선다.

 

"내가 등신이라서 너 가만뒀는 줄 알아?"

 

감정을 드러내지만 아무렇게나 막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절제가 있다. 품위가 있다. 물을 끼얹는 동작 하나도 천박하지 않다. 이유가 있다는 것. 그 당연한 것이 지금은 이리도 소중하다. 막장이 없다는 것. 그것이 원로라 불리우게 된 이름의 무게일 테지. 그것이 좋다.

 

이서연의 목소리가 좋다. 아니 수애의 목소리가 좋다. 나레이션하듯 독잭하는 그 담담한 말투가 좋다. 남의 일인 듯. 자기 일이 아닌 양. 그래서 비극은 더 깊어진다. 이서연이 더 이상 독백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감정의 향기가 좋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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