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가장 꺼려하는 부류들이다. 정의로운 사람들. 정의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선지자가 되고 순교자가 된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에도 심지어 자기마저 희생해가며 모두를 위해 정의를 실천하고자 한다. 그래서 심지어 자기 양심마저 그 희생의 제단에 올린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으르다. 무책임하다. 편한 것을 쫓는다. 그래서 굳이 그렇게까지 정의감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려는 사람은 얼마 없다. 그건 메우 성가시고 피곤하고 무엇보다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자기가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납득하고 만다. 과연 이것이 옳으니 아이까지 죽여야 하는가? 그러나 내 마음이 불편하니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당연히 부끄러워하고 연민을 느껴야 할 자신의 양심마저 정의를 위한 희생의 제단에 올려버린 이들이다. 그조차 스스로의 희생이라고 여긴다. 양심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그 자체가 그로 인해 자신이 치러야 하는 댓가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사람을 죽인다. 어쩔 수 없노라며. 그럴 수밖에 없노라며.
그래서 그를 반대하는 자들은 무지한 것이다. 자신을 거스르는 자들은 정의롭지 못한 자들이다. 당장의 고통이 장차 더 큰 기쁨과 행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를 위해 지금 자신이 희생한다. 스스로 악업을 짓고 오명을 뒤집어쓰려 한다. 차라리 죽고 나서 나중에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욕하고 비난하고 저주하라. 그러나 결국은 이것이 옳은 길일 것이다. 결국에는 지금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선지자다. 그리고 순교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것이야 말로 세종(한석규 분)이 살고 있다는 지옥의 정체인 것이다. 그것은 심종수(한상진 분)의 지옥이기도 하며 정기준(윤제문 분)의 지옥이기도 하다. 소이의 지옥이기도 할 것이다. 강채윤의 지옥이다. 지옥은 편안하지 않다. 오히려 고통스럽다. 분주하고 성가시며 괴롭기 이를 데 없다.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마음은 간 곳이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들은 지옥에 머무는가?
극락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지옥을 딛고서야 극락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그 한 가지, 마침내 이르게 될 궁극의 쾌락을 위하여 그들은 지금의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한다. 상처입고 아파하면서도, 괴로워하고 갈등하면서도, 그조차도 그를 위한 당연한 댓가로 여긴다. 더 가치가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타인과 그리고 자신의 양심과. 지금의 작은 희생따위 결국은 더 크고 대단하고 아름다운 결과로써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명감에 그들은 기꺼이 지옥으로 들어가고 다른 이들마저 자신의 지옥으로 끌어들이고 만다.
필자가 아마 드라마를 보면서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세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일 것이다. 정기준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은 권력에 대한 부정이다. 차라리 그저 힘없는 개인이라면 개인의 정의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없다. 기껏해야 인터넷에 개인의 신상을 파헤치고 그를 비난하는 게시물이나 댓글을 돌리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권력에게는 힘이 주어진다. 단지 말 한 마디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이. 다른 모두를 자신의 지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이다. 지옥을 강제하는 힘이다.
정기준이 세종이 만든 글자를 없애기 위해 연두를 죽이려 하는 모습은 바로 그런 모순을 너무나 선명히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고 말한다.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고통없이 죽여주라고 말한다. 스스로 생각하겠지. 결국은 그런 결정을 내리고 명령을 내려야 하는 자기 자신이 가장 불쌍하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 항상 가까이에서 눈에 익고 마음에 익던 아이였는데. 하지만 세종의 글자를 없애야 한다는 당위가 그를 내몬다. 나쁜 건 세종과 세종이 만든 글자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정기준 자신만은 안다. 그래서 어떤 오명이든 달게 쓰려 한다. 그것이 바로 정기준의 대의다.
그리고 그것은 세종이 자신의 글자를 반포하기 위해 이신적(안석환 분)을 이용해 밀본을 와해시키고 정기준을 잡으려 공작을 펼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세종이 굳이 그렇게까지 한 데에는 글자를 반포하여 백성들을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하는 선한 의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궁극적으로 백성을 위하는 일이기에 그 목적을 위해 그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의 교활함이나 비열함도 용납된다. 그것이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것을 누가 판단하는가? 그러나 그것이 곧 세종의 대의인 것이다.
바로 인치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과정이 중요한 일이 있고, 결과가 중요한 일이 있다. 결과가 중요한 일에는 그에 맞게 결과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한다. 그러니까 바로 그 결과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대해 누가 판단하고 누가 결정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 목적이란, 그리고 수단이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것이겠는가? 거기에서 현군과 암군이, 인군과 폭군이, 명군과 혼군이 나뉘고 만다. 아니 대단히 뛰어난 권력자 가운데서도 단 한 번 판단을 잘못해서 많은 이들을 절망으로 몰고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많은 부분이 스스로 중요하다고 필요하다고 여겨 다른 이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성공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이란 정의로운 존재인 때문일 것이다. 정의롭고자 하는 존재다. 권력이란 정의와 폭력의 합성어다. 정의 없는 권력 없고, 권력을 가지게 되면 정의를 추구하게 된다. 오히려 권력을 가지고 정의롭지 못한 경우가 드물 것이다. 다만 그 정의란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가? 보편적으로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설사 그렇더라도 그 과정에서의 희생이란 그 목적에 합당한 것인가? 그러한 물음에 대해 서두에서 답을 내렸을 것이다. 자신의 양심조차 그 희생의 하나로 여긴다. 전제왕조가, 봉건적 인치의 전통이 근대의 합리적인 구조에서 비롯된 정치로 바뀌어가는 이유다. 불확실한 개인의 판단보다 구조가 그 책임을 대신한다.
세종은 그랬지만 과연 다른 임금들은 어떠할 것인가? 아니 세종 자신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인가? 즉위초와 말년의 모습이 전혀 다른 군주들이 역사상 얼마든지 있어왔었다. 아들이 반드시 아버지를 닮으라는 법도 없었다. 그래서 그를 견제할 장치가 필요하다. 더 많은 다양한 다른 의견들로써 그를 견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그것이 의정부서사제이며 밀본이 추구하는 재상총재제인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충돌한 것이 바로 중종반정이었다. 이제까지 없었던 가장 강력한 절대왕권을 휘둘렀던 연산군에 대해 그의 폭주를 바로잡고자 했던 훈구세력들의 반격이 왕의 교체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나마 연산군조차도 세계사적으로 보면 그다지 평범한 수준에 속하고 만다. 조선을 이어갈 수 있었던 힘이었다. 세종의 정의롭고 이치에 타당한 판단과 결정이 그러나 그래서 더욱 우려스러운 이유일 것이다.
정기준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과연 정기준의 판단은 옳은가? 그것이 밀본의 대의에 합당한 것인가? 벌써부터 이신적과 심종수가 동요하여 반발하고 있다. 이신적이야 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이나 챙기던 인사였지만 심종수는 진정으로 밀본의 대의를 생각하여 정기준에 반발하는 것이다. 장차 왕의 아들인 왕자까지 죽이는 폭거까지 저지른 정기준의 행사는 밀본의 장래에 크나큰 해가 될 것이다. 세종이 만든 글자에 비상하게 집착하는 정기준의 판단이 결국 밀본이 추구하는 대의를 해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견제할 체계가 밀본에는 없었다. 처음에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태종과 조말생(이재용 분)에게 쫓기며 조직이 와해되는 사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정기준은 그것을 다시 복구하지 않았다. 본원 정기준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그것이 밀본을 결정적인 위기로 내몰고 말았다.
그렇게 세 개의 서로 다른 정의가 드라마상에서 충돌한다. 새로운 글자를 반포하는 것을 지상의 명제로 여기는 세종과 재상총재제라고 하는 밀본의 대의를 추구하려는 심종수와, 그리고 세종의 글자를 막아 그로 인한 혼란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하는 정기준의 정의가. 아마 이 가운데 가장 올곧은 것이 있다면 바로 심종수의 정의일 것이다. 그는 정기준도 정기준의 숙부인 정도전도 따르지 않는다. 심지어 밀본조차도 따르지 않는다. 그가 따르는 것은 오로지 선비로서의 양심과 대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 뿐이다. 정기준이 자기에 충성하지 않는 심종수를 의심하고 경계했으면서도 오히려 자신에 반기를 든 모습에서 그를 인정하고 만 이유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만일 그럴 기회가 돌아온다면 가장 많은 사람을 가장 아무런 거리낌없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다름아닌 심종수일 것이다. 당연하다. 그가 가장 정의롭기 때문이다. 가장 선량하다. 그는 자신의 대의에 한 점 거짓도 부끄러움도 없다. 홀로 방안에 앉아 '조선의 시작이며 뿌리'인 선비임을 자각하는 그의 양심이야 말로 가장 올곧고 해맑다. 그것은 때로 인간적인 감정을 감추지 못해 어느새 드러내고 마는 정기준에 비해서도 더 철두철미한 것이다. 오히려 정기준보다 일본의 본원으로서 더 어울린다. 그리고 더 위험하다.
차라리 정치인으로서 신뢰할 만하다면 다름아닌 이신적일 것이다. 그는 기회주의자다. 인간으로서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는 무리하게 대세를 거스르며 어떤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주위의 평판에 신경쓰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그래서 최대한 많은 다른 사람들의 호의와 지지 속에 권력을 손에 넣고 그것을 유지한다. 밀본이 추구하는 대의와 삼정승의 하나인 우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세속적 권력욕은 사실 처음부터 어울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왕의 눈치를 보려니 왕과 대립하지 않을 것이고, 대소신료들의 의견을 살펴야 하니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사대부와 세간의 여론을 항상 신경쓰고 있으니 그와 거스르는 판단을 내리지도 못한다. 그가 밀본과 정기준과 심종수와 대립하는 이유도 그것 아니던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대세이지 홀로 옳고 바른 올곧은 정의가 아니다. 여론을 반영하여 정치를 한다는 점에서 이신적은 그래서 가장 훌륭한 정치인이 아니겠는가? 그에 비하면 심종수는 자신에 거스르는 이들을 모두 죽이려 하는 바람에 자기가 죽고 말 것이다.
세종이 이신적을 심종수보다 높이 평가한 이유다. 심종수는 단지 선비다. 그러나 이신적인 정치인이다. 심종수는 단지 올곧을 뿐이지만 이신적은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살피고 그것이 자신에 이익이 되도록 움직이는데 매우 능하다. 정치적으로 영악하다. 세종에게도 필요한 것은 올곧기만 한 선비 심종수가 아니라 자신과 함께 국정을 이끌어갈 정치인 이신적이다. 세종 역시 정치인일 테니까. 다만 때로 세종 역시 선지자이며 순교자인 혁명가의 모습을 하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물론 드라마상의 세종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튼 드라마를 통해 정기준이 그토록 세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이도'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가 만든 글자를 막기 위해 저토록 집착하고 절치부심하는 또 하나 이유가 나왔다. 아니 그것은 가장 큰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세종에 대한 열등감, 박탈감, 상실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증오다. 누군가에게 탓을 돌려야 했다. 자기로부터 비롯된 비극에 대해서, 수많은 세월을 단 하루도 마음편히 잠들지 못하게 한 그 절망과 공포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그것은 정기준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그는 더 냉혹해지고 잔인해질 수 있다. 무정해지고 단호해진다. 아마 정기준의 깊은 내면에서는 연두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양심의 소리가 들리고 있을 테지만, 그래서 더욱 그는 자신의 양심이 들려주는 경고를 무시한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벌이라 생각한다. 인연이 깊던 아직 어린 연두를 죽이도록 시키고, 자신이 평생을 바친 밀본의 본원마저 심종수의 요구에 따라 거래를 통해 넘기고, 그리고 또한 밖으로 눈을 돌린다. 누구인가? 누가 자신을 이토록 절망과 분노에 빠지게 만들었는가?
처음 세종은 정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재주도, 의지도, 신념도 무엇 하나 갖춘 것 없는 그저 왕을 아버지로 두었을 뿐인 왕자의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왕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대단한 성군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태종이 닦아 놓은 기반 위에 그 어느 임금보다 뛰어나고 훌륭한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조말생에게 쫓기며 비록 위장이라고는 하지만 백정으로 전락하여 밀본의 재건을 위해 그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가운데. 정기준이 잃은 것과 세종이 그동안 얻은 것들, 세종이 그동안 이룬 것들에서 정기준이 그동안 잃은 것들을 보게 된다. 만일 그 일만 아니었다면 세종이 있을 저 자리에 정기준 자신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기는 바로 그러한 소명이라고 하는 자체가 열등감과 수치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지만 말이다. 편안하게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살아온 이가 소명따위 느낄 까닭이 없다. 이대로 모든 것이 계속 되어지면 그것으로도 좋을 테니까. 무언가 상처입고, 아파하고, 그로 인해 잃은 것이 있고, 아쉬운 것이 있을 수록 더욱 간절이 원하게 되어 그것을 사명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세종은 백성을 위해 태평성대를 만들려 스스로 지옥에 살고자 했고, 소이(신세경 분)는 자신의 잘못으로 모두가 죽었다고 하는 죄책감에 세종의 글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자 했다. 똘복 강채윤(장혁 분)은 처음 세종에 대한 복수로서, 그다음에는 소이에 대한 사랑으로 그것을 대신한다. 다만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만 있어도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추상적인 신념이며 대의라 할지라도. 그래서 세종과 정기준은 같다.
사람은 누구나 지옥 속에 한 발을 걸치고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한 발은 극락에 있다. 극락에 오르려 하면 누구나 지옥을 딛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를 하찮게 여기고, 그래서 더욱 높은 아름다운 무엇이 있음을 꿈꾼다. 그것은 단지 과정이라고. 지금의 자신조차 그를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무엇을 위해 스스로를 지옥으로 내던지고 마는 것이다. 대단한 사람들은 그렇다. 세종과 심종수와 정기준, 아니 소이도 그렇다. 강채윤도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자들이다. 소이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강채윤처럼. 자신의 대의를 위해 정기준도 거리낌없이 어린 연두를 죽인다.
지옥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후회하고 번민하며 그럼에도 올곧게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다.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싸우고 부수고 지킨다. 그리고 어쩌면 역사란 그들의 지옥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극락의 이름으로,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지옥에 발을 담그고 있다.
소이가 불안하다. 어쩐지 세종과 소이의 마지막 만남이 죽은 이와의 회상같이 보여 계속 신경에 거슬린다. 더구나 정기준마저 심종수가 던져준 힌트를 바탕으로 해례가 소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말았다. 과연 강채윤은 소이를 구하기 위해 제 시간이 맞춰 도착할 수 있을까? 문서로 만들어진 해례가 없다는 점에서 소이의 안전에 대해 걱정하지는 않지만 드라마란 바로 그런 점에서 시청자를 농락하는 재미에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가슴아픈 비극은 그다지 반갑지 않을 것 같다.
카르페이의 정체가 밝혀졌다. 카르페이 테무칸. 북원 복위조직의 돌궐용병대의 대적불가라고까지 일컬어지던 전설적인 고수. 견적희가 그를 알아보았다. 과연 그 서슬퍼렇다는 창위마저 물러나게 만든 대적불가란 어떤 존재일까? 전대조선제일검 이방지마저 그를 이기지 못했다. 강채윤은 과연 그러한 카르페이와 대적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무휼이 그를 상대하게 될까? 연두의 존재가 걸린다.
정기준과 카르페이, 그리고 정기준이 죽이려 한 연두, 강채윤과 소이와 윤평, 심종수, 결국 드라마란 격정일 것이다. 이치로 따지다가도 결국 부딪히고 마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원초의 격정일 것이다. 드디어 대미. 후련하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훌륭한 마무리를 기대한다. 지금까지처럼만. 재미있었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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