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 왕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수많은 이름없는 이름들에 대해서...

까칠부 2011. 12. 23. 09:18

권력이란 외로운 것이다. 누가 있어 권력을 가졌는데 그 앞에서 틀렸다고 할 것이며 잘못하고 있다 탓을 할 것인가? 누구도 두려워하여 진심을 보이지 않고, 어느 누구의 진심도 보이지 않으니 자신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권력자가 타락하는 이유다.

 

차라리 좋았지 않은가? 그를 세종이 아닌 이도라 부르는 이가 있엇다. 왕이 아닌 이도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불경하게도 그를 거스르려 심지어 죽이려 드는 이가 있었다. 비난하고 힐난한다. 모욕하고 저주한다. 그래서 괴로워한다. 그래서 고통받고 또한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일깨운다. 자신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쩌면 어설픈 친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사를 가르던 적일 것이다.

 

정기준(윤제문 분)의 죽음 앞에 세종(한석규 분)이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 말한 이유였다. 물론 눈물은 죽은 이들을 위한 눈물이었다. 소이(신세경 분)를 위한 것이고, 강채윤(장혁 분)을 위한 것이고, 무휼(조진웅 분)을 위한 것이었다. 그동안 그의 훈민정음을 지키기 위해 이름없이 죽어간 무수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왕이기에 함부로 눈물을 보여서도 안 되는데, 그러나 정기준 앞에서라면 굳이 왕이라고 괜히 좌불안석하여 어쩔 줄 몰라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통쾌하게 비웃어주지 않을까? 네가 그러고도 왕이냐고.

 

그로 인해 고뇌했다. 그로 인해 절망하고 좌절했다. 두려워도 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백성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막연하게 그저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리도 아프고, 이리도 간절하다. 어느새 아파 흘리는 눈물이 바로 그 백성에 대한 세종의 마음일 것이다. 애써 강채윤과 소이의 죽음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의 죽음을 찾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그렇게 여상하게 왕으로서의 세월을 보내는 것처럼. 그것이 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법이다. 정기준이 일깨워준 것이다.

 

그를 위협하고 항상 곤란케 만들던 큰 적이지만 그러나 정기준의 죽음 앞에 세종이 느끼는 감정은 후련함이나 통쾌함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외로울 것이고, 서운할 것이다. 왕인 자신의 앞에서도 전혀 굽히지 않고 당당히 맞서며 싸우고 다투던 정기준의 존재가 사라진 것에 텅 빈 듯한 상실감마저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게 친구라는 것이니까. 적이지만 친구다. 누구보다 나를 알고, 그래서 누구보다 나를 일깨워주는 이가. 그런 정기준이 죽었다.

 

참 많이도 죽었다. 소이가 죽고, 강채윤이 죽고, 무휼이 죽었다. 소이의 죽음은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소이가 떠나는 장면을 세종이 회상하는데 어째 꼭 죽을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 같다. 다시 만나자는 기약은 다시 못 올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반드시 꼭꼭 다시 보자고 다짐하는 것은 그를 다시 보지 못할 사이이기에 그리 하는 것이다. 결국 소이가 죽고, 소이의 유언을 지키려 강채윤이 죽고, 세종을 지키려 무휼이 죽는다.

 

대적불가라고까지 불리우던 대륙최고의 무사 카르페이를 무휼과 강채윤이 상대하여 마침내 죽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차라리 죽는다면 후회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목숨을 내던지고 싸웠다. 무휼은 굳이 카르페이의 칼을 피하려 하지 않았고, 강채윤은 아예 카르페이의 칼을 있는대로 몸으로 맞으며 그를 베려 했다. 의지다. 카르페이가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싸움에 있어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결과를 돌아보지 않는다. 올곧게 자기가 나아갈 길 하나만을 본다. 카르페이는 무사다. 그리고 무휼과 강채윤 역시 지켜야 할 것이 있기에 올곧게 지켜나간 무사일 것이다. 윤평(이수혁 분)도 무사다.

 

아마 그것은 심종수(한상진 분)의 선비로서의 도와도 닿아 있을 것이다. 세종은 왕이었고, 정기준은 밀본의 본원이었으며, 심종수는 선비였다. 소이에게는 글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도였다. 그에 비하면 이신적(안석환 분)이나 견적희는 선비나 무사하기보다는 관리가 아니었을까? 자기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그보다 먼저 대세가 어디에 있는가를 따져 살핀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정기준과 윤평의 끝은 있어도 이신적의 끝은 없는 이유라고나 할까? 그는 그렇게 사는 날까지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서운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어째서 굳이 소이를 죽여야 했는가? 소이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강채윤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마지막에 무리하게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자리에서 무휼과 강채윤이 카르페이와 부딪혀 죽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이야기를 난잡하게 만들어가며 시청자의 감정에 불쾌한 앙금을 남긴다. 어느 시청자도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던 주인공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더구나 평생을 상처와 고통 속에 살아왔던 소이와 강채윤이기에 더 그러했다. 어째서?

 

바로 그것이 이 드라마의 마지막이니까. 왕이 있었다. 왕의 의지가 있었다. 왕의 의지가 세상에 구현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왕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인가? 누군가는 왕의 손발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왕의 피가 되고 세포가 되어야 한다.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그렇게 수많은 치열함이 뒷받침되고서야 왕은 비로소 세상에 자신의 의지로서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왕이 하나의 의지를 드러낸다는 것은 그만한 희생이 불가피하게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성이란 그러한 존재다. 신하라는 것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왕이 의지를 구현하면 제 한 몸 던져 그것을 지키고 이루어낸다. 왕이란 가장 안전한 곳에서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들이 목숨을 던져 지켜낸 자신의 의지를 이루어내는 존재일 것이다. 슬퍼해서도 안된다. 아파해서도 안된다.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원망해서도 안된다. 그것이 백성이며 신하다. 그런 것이 곧 왕이다. 그렇게 역사는 이루어져간다. 역사는 이루어져왔다.

 

물론 훈민정음의 창제와 관련해 실제 죽거나 다친 사람은 그다지 없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를 반대하다가 세종에게 직접 국문을 받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온건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굳이 훈민정음 반포를 앞두고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야 했던 이유란 무엇인가? 세종의 명을 따르는 이들, 세종의 뜻을 지지하는 이들, 그리고 세종에 반대하여 그를 거스르려는 이들까지. 그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왕이라는 존재인 것이다. 어느 이름모를 산속에서 쓸쓸히 죽어간 소이나, 자기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무휼이나 강채윤이나, 그래서 그들을 슬퍼할까? 그들을 안타까워하여 울부짖을까? 대신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그와 관계된 모두를. 소이의 뜻을 이어받은 강채윤이 세종을 지키고 죽어가면서도 소이를 대신해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를 끝까지 지켜본 까닭이다. 그것이 소이가 죽은 이유이고 강채윤이 죽은 이유다.

 

목숨을 맡겼다. 의지를 맡겼다. 가벼운 것이 아니다. 세종에게 자신의 모두를 건 것이다.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희망과 자신의 미래를. 하필 엔딩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강채윤과 소이의 여상한 일상이 보여지고 있었던 것은 그러한 까닭이었다. 세종이 짊어진 것이다. 세종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이름없는 젊은 남녀의 누구보다 행복했을 미래를 대신하여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라는 자신의 의지를 이루었다. 세종의 치세는 그러한 희생이 담보된 것이다.

 

아니 아니다. 정기준도 있었다. 정기준의 뜻을 받들어 목숨을 걸었던 윤평과 도담댁도 있었다. 그를 반대한 그들의 의지 역시 함께 가는 것이다. 그를 반대하여 그에 저항했던 이들마저도 왕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짊어지고 간다. 그 모두를 아울러서 세종이라 하는 것이다. 세종이란 어느 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왕의 이름과 존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이들을 일컫는 것이다. 그래서 왕이란 개인이면서 또한 시대이고 모두다. 그래서 왕이다. 설사 그 뜻이 꺾였더라도 그 꺾인 뜻마저 그래서 정기준은 세종에게 맡기려 한다. 그는 왕이 되려 했었다.

 

이미 광평대군이 죽으면서, 아니 광평대군이 강채윤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때 한 번 이야기했을 것이다. 아들의 죽음마저도 딛고 가야 한다. 아버지가 아닌 왕이란 아들의 죽음마저 등에 지고 왕으로서 그 의지를 관철해가는 철인인 것이다. 초인이다. 사실 그래서 아무나 왕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이 될 수 없는 이가 왕이 되었을 때 항상 사단이 나고는 했었다. 왕조란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정기준이 끝내 패해 죽으면서도 세종의 방식에 비판적인 이유였다. 세종과 같은 파천황의 초인은 두 번 다시 나와서는 안 도니다. 필자도 동의하는 바다. 그것은 우연인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죽인 것이었다. 왕을 보여주기 위해서. 왕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왕의 의지를 실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훈민정음 창제라는 대의를 이루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렇게 많은 이들의 죽음을 쌓아 올려야 한다. 그들의 피와 눈물을, 희생과 고통을, 꿈과 희망을, 행복을, 그 모든 것을 딛고, 다시 이고서 나아가는 것이다. 때로 그들은 숫자가 된다. 단지 사료에 기록된 이름없는 모두의 하나가 되어 그 시대를 일컫게 된다. 왕이란 그런 것이다. 시대란 그런 것이다. 그들의 죽음에 왕은 울어줄 수조차 없다. 돌아볼 수조차 없다.

 

비극이지만 그것이 또한 역사이므로. 광개토대왕을 따라 머나면 북만주를 원정하던 수많은 병사들과, 이순신 장군을 쫓아 일본군을 막아내려 고군분투하던 수군들과, 조국독립의 염원을 김좌진에게 홍범도에게 맡기고 절망적인 싸움을 이어가던 독립군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 독재자를 몰아내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 뒤에는 또다른 얼마나 많은 수많은 이름없는 이름들이 있는가. 기억할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순간들이 그들의 피와 그들의 살이다. 죽어서라도 강채윤의 눈을 빌어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쓰이는 것을 보려 했던 소이처럼 우리는 그들이 소망하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뒤에 또다른 누군가 우리가 만든 시대를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역사가 발전하는 까닭이다.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혀 반전같지도 않은 반전으로 허무할 정도로 쉽게 사람들을 죽인 이유가. 훈민정음의 반포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 위에 그들의 피를 덧씌운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한글을 쓰고 있다. 한글이 곧 그들의 피이며 살이다. 우리는 그 피와 살을 마시며 살아간다. 그들의 어쩌면 행복했을 일상을 대신해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곧 지금 바로 이곳이다.

 

끝으로 과연 한글이란 사대부들의 고의에 의해 천시되었고 홀대받았는가. 유럽에서도 라틴어가 공용어처럼 쓰이던 때가 있었다. 한때 러시아 귀족 가운데서는 러시아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고 오로지 프랑스어만 쓰던 이들이 있었다. 문화어라 한다. 교양어라고도 한다. 그것은 보다 수준높은 문화를 지향하는 인간의 본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지금도 지방에서는 사투리가 사라져간다. 아무래도 서울말이 듣기에도 좋아 보인다. 아마 경상도가 서울이었다면 서울사람들은 경상도말을 배우려 서울말씨를 감추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수도에는 주로 그 사회의 주류가 모여살게 된다. 지방에 있다가도 어느새 서울로 끼리끼리 모여 무리를 이룬다. 그리고 그들을 동경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국어란 문화적인 방언이며, 문화어란 문화적 표준어라 할 것이다.

 

조선시대 문화란 곧 중국문화였다. 지금 문화란 미국문화일 것이다. 프랑스문화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프랑스어가 마치 국제외교어로 쓰이고 있었다. 국어천대는 민족주의가 나타나기 전 전세계적인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래서 굳이 국어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나랏말이다. 그것을 단지 사대부들의 기득권지키기 때문이라 여기는 것은 지나치게 정치적인 해석이 아닌가?

 

사대부들도 한글을 빌어 한자를 깨우쳤다. 한글을 빌어 유교의 경전을 읽고, 한글로 단 주석을 통해 보다 수월하게 유교의 경전을 읽을 수 있었다. 한글을 배운 백성들 역시 한글을 통해 한자를 읽고 유교적 소양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한글은 영어를 배우는 수단이 된다.

 

드라마로서는 사실 조금 아쉬운 마무리였다. 조금 더 깔끔하게 마무리지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무더기로 죽여가면서까지 안 좋은 뒷맛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보여져 왔던 드라마의 주제에 있어 상당히 적절한 마무리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시대는 만들어진다. 그렇게 역사는 완성되어 간다. 왕은 그래서 왕으로서 군림한다.

 

예상대로 역시 바로 이 드라마 뒤가 드라마 시작 초반 종영된 <공주의 남자>였다. 한가놈은 한명회였고, 한명회는 심종수의 지시를 받아 수양대군에게 접근한다. 태종과 세종을 거치며 길러진 관료들을 모조리 도륙낸 것이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계유정난은 그러한 세종의 관료들에 대한 홀대받던 공신의 자손들과 종친들의 반란이었다. 그리고 단종을 몰아내고 죽이는 과정에서 집현전도 해체된다. 세종의 총애를 받던 집현전 학자 상당수가 심지어 일족이 몰살당하고 그 처와 딸들이 세조의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한다. 상당히 개연성이 있지 않을까? 모두가 밀본과 적대하던 이들이다.

 

다만 그럴 경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세종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으로 묘사되고 있던 정인지가 끝내 세조의 편을 들어 단종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조의 딸을 맞아들여 사돈을 맺은 이가 바로 정인지였다. 계유정난이 끝나고 유일하게 살아남아 세조의 편에 섰던 당상관이기도 했었다. 세종이 가장 아끼던 손자가 단종이었는데. 너무 스트레스가 심했던 탓일까? 설명이 필요하겠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죽는 것은 이미 넘치도록 설명이 되어 있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수미일관하는 구조가 있다. 그렇게 드라마는 조선을 관통하며 조선의 붕당과 세도정치까지 이어지게 된다. 아니 세도정치란 밀본에 반하는 것이다. 다시 밀본이 나타난다면 정조대에 정조와 겨루다가 끝내 패망하고 마는 역할이 아닐까?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잠시 반짝하지만 결국 외척 김조순에 의한 세도정치로 조선은 막을 내리고 만다. 세도정치야 말로 밀본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건만. '밀본'을 소재로 조선사를 재구성해보는 시리즈도 흥미로울 것 같다.

 

몰입하며 보았다. 그리고 또 하나 느끼는 것은 자기가 왕에게 쓰인 것조차 모르는 옥떨이(정종철 분)이란 어쩌면 더 많은 민초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것도 모른다. 장삼이사, 필부필부, 갑남을녀. 이름도 없이 무심한 이들. 그래도 역사는 흘러간다. 역사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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