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무한도전 - 시청자와의 거리를 없앤다, 리얼예능 <무한도전>을 보다!

까칠부 2011. 12. 25. 09:27

리얼버라이어티에서 말하는 '리얼'이란 기존의 '세트'에 대한 '리얼'일 것이다. 세트란 제작자가 의도하여 만든 무대다. 무대는 현실과 유리된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무대 위의 상황은 현실이 아니면 안 된다. 그래서 자발적 동의의 과정이 일어나게 된다. 세트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무대 위의 상황이 실제라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번거롭다. 그리고 어떻게 해도 그것이 무대 위에서의 허구의 상황임을 관객은 안다. 그래서 아예 무대를 없애버린다. 무대를 없애고 관객과의 거리를 제거한다. 바로 관객이 보고 있는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사람이다. 관객의 바로 앞에서 웃고 울고 말하고 움직이는 실체가 바로 무대 위에서 연기하여 보여주는 사람이다. 허구와 현실의 벽이 무너진다.

 

다시 말해 '리얼'버라이어티의 리얼리티란 '세트'라고 하는 관객과의 거리를 벗어던진 '리얼리티'의 '리얼'버라이어티인 것이다. 이제까지의 다른 어떤 콩트코미디나 버라이어티에 비해서도 특히 리얼버라이어티에 대한 시청자들의 충성도가 높은 것은 그래서다. 그를 배우라 여기지 않는다. 연기자라 여기지 않는다. 지금 바로 내 앞에, 옆에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한다. 무대 위에서의 꾸며진 모습이 아닌 모공 하나까지 날 것으로 보여주는 그런 현실의 존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달리 리얼버라이어티의 '리얼'이란 관객에 대한 리얼이기도 하다. 무대 위에 있어야 할 프로그램이 관객과 함께 간다.

 

지금까지 성공한 리얼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무한도전>과 <1박 2일> 그리고 폐지되었지만 <패밀리가 떴다>와 현재 이런저런 논란 가운데서도 순조롭게 순항중인 <남자의 자격>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 밖의 다른 프로그램들은 고작 반 년을 채 채우기가 힘들 정도로 단명하고 있었다. 결국은 얼마나 관객과, 시청자와의 거리를 없애면서 TV모니터를 사이에 두고서도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가. 얼마나 TV를 통해 보여지는 모습들에 현실의 자신을 이입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것을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프로그램에 대한 충성도일 것이다. 각자가 프로그램의 연기자가 되고, 피디가 되고, 작가가 되어, 마치 프로그램 안에서 직접 참여하기라도 하는 듯 자신을 이입하고 개입하려 한다. 한 번 그렇게 프로그램에 충성을 하게 되면 어지간해서는 프로그램으로부터 이탈하려 하지 않는다. 논란이 있어도 보면서 비판하려 하지 일부러 프로그램을 외면하려 하지 않는다. 리얼버라이어티는 그러한 시청자의 충성도가 가장 강한 장르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차라리 보고서 욕할망정 보기 싫다고 외면하지는 않는다. 가장 안정적인 시청률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이기도 하다.

 

<무한도전>은 당연히 그러한 리얼버라이어티의 원조격인 프로그램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리얼버라이어티 그 자체를 대표하며 끊임없이 리얼버라이어티의 성격과 영역을 정의해가고 있는 선구적인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러한 리얼버라이어티의 장점은 <무한도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니 <무한도전>을 통해 검증되었기에 이후 그와 유사한 포맷의 리얼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시청자와의 거리를 없앤다. 그 시작은 역시 멤버들의 가식을 벗어던진 날모습이었을 것이다. 어딘가 모자르고, 어딘가 한심하고, 어딘가 무척 얄밉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어수룩한 것이 밉지 않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라는 구호가 그래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모두가 하나같이 대한민국 예능의 주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지는 멤버들의 일상은 그들이 시청자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확인시켜준다. 예능인이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일상의 리얼리티를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주는 존재다. 거리가 사라진 관객의 현실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의 리얼리티가 된다.

 

바로 이번 달력배달 미션과 같은 것이다. 멤버들은 여러 날모습으로 자신들만의 달력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시청자와의 소통을 통해 판매하여 그 수익금을 사회에 환원하려 한다. 달력을 구입함으로써 시청자는 자신이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가지게 된다. 더구나 그 달력을 판 돈이 좋은 일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보람마저 느낀다. 집단에 대한 귀속의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자존감이다.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달력을 멤버들이 직접 찾아와 전해주기까지 한다.

 

무대가 사라졌다. TV가 사라졌다. 세트 없이 그대로 카메라와 함께 <무한도전>멤버들이 찾아온다. 시청자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전혀 시간과 장소가 맞지 않아 허탕을 치고는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시청자의 반응에서 멤버들의 리액션이 나온다. 방송에 출연한 시청자들이란 TV를 보고 있는 시청자 자신이다. 어쩌면 그 순간 전혀 낯선 이름의 평범한 시청자를 찾아나선 <무한도전> 멤버들이 TV를 보고 있는 자신을 찾아온 듯한 착각마저 느꼈으리라.

 

하기는 <1박 2일>에서도 멤버들은 항상 평범한 일상들을 찾아나선다. 어디에나 있는 일상들을 찾아 그 속에서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경험들을 만들어간다. <남자의 자격>이 성공한 것도 주시청자층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공감할 수 있는 멤버들의 캐릭터를 통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들려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TV속의 멤버들은 연예인이나 예능인이 아닌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래서 리얼리티다.

 

과연 <무한도전>이라고나 할까? 더욱 시청자들의 강한 관심과 참여가 <무한도전>을 끌어간다. <무한도전>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지금 무엇의 위에 있는가를 상기시킨다. <무한도전>에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는 시청자가 있다. <무한도전>이 벌이는 이벤트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참여하려는 애정표현에 인색하지 않은 많은 시청자들이 있다. 이번에 멤버들이 찾아 나선 그 수많은 낯선 이름들이 <무한도전>을 보고 있는 시청자 자신들인 것이다. <무한도전>이 <무한도전>인 동안에는 달력이 아닌 어떤 미션과 이벤트를 가지고 TV를 통해 찾아가도 이번에 그러했던 것처럼 반겨주리라. 그런 믿음도 있다.

 

가장 리얼버라이어티스러웠다. 그래서 가장 <무한도전>스럽기도 했다. 이래서 <무한도전> 마니아들이 생겨나는구나. 아니 마니아 수준을 넘어 그들은 이미 한가족이다. 때로 그드르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거리란 없이 예능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이루어지는 그들만의 끈끈한 유대와 소통의 방식은 이미 TV프로그램을 넘어섰다. 그것을 보여준 이벤트였다.

 

리얼버라이어티란 어째서 리얼버라이어티인가? 리얼버라이어티가 말하는 '리얼'이란 무엇에 대한 '리얼리티'인가? <무한도전>이 여전히 최고의 예능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서 군림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무엇이 <무한도전>을 강하게 하는가? 그러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그러한 자신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무한도전>은 강하다. 김태호PD는 강하다.

 

'나름 가수다'라니 이건 또 무슨 패러디인가 했었다. 하지만 역시나 전문적이다. <무한도전>의 또다른 매력이기도 할 것이다. 하나같이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아니 일반적으로 말하는 가창력과는 거리가 먼 멤버들이다. 길이며 하하며 박명수며 나름대로 자기만의 색깔이 있고, 자기만의 감수성으로 노래를 들려주는 이들이지만, 고음이라는 퍼포먼스에서는 약하다. 그래서 얼핏 노래를 못 부르는 것으로 비쳐진다. 나와 같다.

 

그런데 그런 한 편으로 그들은 연예인이다. 연예계에 발이 넓다. 작곡가 김광진을 찾아가고, 다이나믹 듀오와 노라조에 함께 작업할 것을 제안한다. 당장 보이는 얼굴만 윤일상, 돈스파이크, 신사동호랭이, 길과 리쌍을 이루고 있는 개리와 피처링작업도 함께 했던 정인, 그들의 부족함은 그렇게 그들의 연예인으로서의 인맥이 대신한다. 일상의 소박함과 무대 위의 화려함이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 화려할 때는 화려하게, 소박할 때는 소박하게, 화려한 그대로 무대에서 내려와서도 화려하다. 그래서 친근한 화려함이다. 그 이중적 모습들이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와 같으며 다르다.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냥 <무한도전>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한도전>이란 단지 하나의 프로그램의 이름이 아닐 것이다. 김태호 PD나 국민MC 유재석, 혹은 다른 멤버들 개인이나 그들 자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한도전>이란 <무한도전>을 시청하는 시청자를 아우르는 이름이었다. <무한도전>을 자신의 이야기처럼 여기는 팬들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무한도전>을 보려면 그 시청자들까지 함께 봐야 한다. 그것을 확인했다. 이것이 <무한도전>이다.

 

새삼 강하다는 생각을 했다. 예능이란 무엇인가? 과연 예능으로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세트가 있다면 세트마저 시청자의 현실 속에 던져 함께 어우러지도록 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가운데 자신들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다. 바로 옆에 앉은 그 사람이 바로 연기자다. 일상이 연극이 되고, 연극이 일상이 된다. 일상이 즐겁다.

 

재미있었다. 재미보다는 <무한도전>을 본다는 것이 더 흥미롭고 즐거웠다. 과연 <무한도전>이란 이런 프로그램이었구나. 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열광하며 보는구나. 아마 <무한도전> 스스로가 놓아 버리지 않는 한 시청자들이 먼저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무한도전>이다. 새삼스런 깨달음일 것이다. 나는 지금 대단한 것을 보고 있다. 훌륭하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