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 - 유방의 캐릭터에서 '뿌나' 정기준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다!

까칠부 2012. 1. 4. 10:13

확실히 드라마의 주인공 유방(이범수 분)과 역사속의 한고조 유방과는 큰 공통점이 있다. 아마 작가가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만들었을 것이다. 뻔뻔하다. 한 마디로 자기완결적이다.

 

유방은 우리사회에서도 말하자면 한참 비주류다. 아버지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공사장 용접공이고, 어머니는 전혀 아무런 대단할 것 없는 전업주부다. 대학이라고 이름도 없는 지방 삼류대학에, 이른바 말하는 스펙 또한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다. 처음 천하그룹의 전략사업본부에 배치되었을 때 사수인 번쾌(윤용현 분)이 말한 그대로 처음부터 그와 천하그룹, 나아가 천하그룹과 진초그룹이라는 쟁쟁한 기업간의 전쟁이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그러한 현실에 대해 그다지 주눅들거나 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그에 반발하거나 억지로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적당히 비굴하고 적당히 영악하다. 적당히 순수하면서 적당히 성실하다. 그야말로 마이페이스다. 현실이 그러한데 어찌하는가? 그래서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만을 쫓는다. 가치를 두지 않고 오로지 그 한 가지만을 보고 그에 자신의 전력을 투구한다.

 

아버지의 뜻을 쫓아 대기업에 취직하려 하니 학벌이 걸린다. 그러자 그는 웨이터로 일하며 우연히 알게도니 천하그룹 회장의 아들 호해(박상면 분) 앞에 무릎을 꿇고 개짖는 소리를 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호해가 요구하는 스파이짓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최항우(정겨운 분)의 사주를 받은 한신의 꼬임에도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 판단하니 전혀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고 만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자랑한다. 대기업인 천하그룹에 취직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문득 그 장면에서 전작인 <뿌리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이 세종에게 한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백성은 어리석으나 그래서 속일 수 없다.

 

학벌이 무엇인가? 스펙이 무엇인가? 대기업이란 또한 무엇인가? 그들이 세운 룰과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다. 그보다 어머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위해 대학등록금을 벌어보겠다고 엄동설한에 공사장에서 일하다 돌아간 아버지다. 그것만이 중요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 아프신 어머니로 하여금 마음놓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 그에 비하면 그에 방해가 되는 학벌을 따지고 스펙을 따지는 세상이란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그러한 세상이 요구하는 정직과 순수, 성실이란 귀찮기만 한 것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 아버지의 기뻐하는 얼굴이, 어머니의 건강한 웃는 모습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원래의 유방이 그랬다. 항우와 유방이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었다. 유방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주의였다. 낙천적이었다. 현실이 어떻고 조건이 어떻든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만을 쫓았다. 최선이라 말하는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많은 중국인들이 한고조 유방을 두고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였다 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원장은 자신의 출신을 부끄러워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이었고, 먹고 살기 위해 출가하여 중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떠돌이 도적이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출신을 부정하고자 많은 이들을 죽였다. 자신의 출신을 아는 자들을 죽이고, 그 출신을 언급하는 이들을 죽였으며, 출신을 언급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자들을 죽였다. 그러나 유방은 아니었다. 유방의 출신에 대해서는 그래서 달리 꾸미거나 한 흔적이 없다. 그는 농민의 자식이었으며 마을의 정장 출신이었다. 그 전에는 한량에 건달이었다. 무슨 부끄러움이 있던가?

 

그래서 그는 오만했다. 그리고 무례했다. 명문의 후예인 명사들이 찾아왔을 때도, 천하에 이름을 떨어울리는 영웅에 호걸들이 그를 찾아와 만났을 때도, 뛰어난 선비인 역이기가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시녀들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다. 주눅들 일이 무엇이던가? 출신이 어떻고 신분이 어떻고 그보다는 지금 자신의 위치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중요하다.

 

항우는 다르다. 항우는 항상 쫓기고 있었다. 할아버지 항연의 명성에, 초나라의 귀족이었던 항씨가문의 이름에, 무엇보다 진나라에 복수해야 한다는 당위에 쫓겨 주위를 보지 못했다. 정작 함양을 함락하고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항우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그래서다. 한 가지만 보며 살았고 그 한 가지가 이루어지자 더 이상의 목표를 찾지 못했다. 그러한 집요함이 그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닮지 않았는가?

 

유방의 캐릭터에 대해 더욱 관심이 가게 되는 이유다. 과연 유방이라고 하는 인물은 드라마상에서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비주류이기에 더욱 순결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더 순수하고, 더 정직하고, 더 성실하고, 더 도덕적이고, 더 바르고, 그러나 어차피 비주류인데 주류가 바라는 미덕을 지켜가며 공정하게 경쟁해봐야 그들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방 역시 올곧게 정직하게만 천하그룹에 입사하려 했다면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했을 지 모른다. 적당히 기회가 오면 이용한다. 설사 그것이 악이고 죄이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자기를 위해 이용할 수 있다. 거리낌이 없다. 더욱 뻔뻔하게 그리고 낙천적으로 자기가 가진 조건 앞에 눈앞의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을 철저히 이용하려 든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 뿐. 어쩌면 갈수록 계급이 고착화되어가는 요즘에 있어 중요한 화두가 될 수 있는 캐릭터일 것이다.

 

착한 유방을 바라지 않는다. 정직하고 성실한 유방을 바라지 않는다. 정의로운 이가 승리한다는 교훈도 바라지 않는다. 더 뻔뻔하게 더 탐욕스럽게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오로지 한 가지만을 바라보는 이가 승리한다. 비주류라면 비주류 나름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들과 싸워 승리하게 된다. 그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이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중에는 결국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 순간에만은 승리에 충실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제대로 초한지가 될 것 같다. 첫회를 보고 너무 속단한 것 같다. 유방은 유방이었다. 항우는 항우였다. 박범증(이기영 분)의 범증 역시 항상 초조해하며 쫓기던 초한지의 범증을 떠올리게 한다. 장량(김일우 분)은 냉철한 장량 그대로였다. 장량도 그렇게 좋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호해는 어차피 바보였다. 그렇게 다시 눈을 돌려 보니 한 편의 초한지가 펼쳐진다. 유방이 가져다 준 변화였다. 작가가 허투루 작품을 쓰지는 않았다. 작품의 제목을 붙이지도 않았다.

 

이범수의 연기를 기대한다. 뻔뻔하고 낙천적이며 결코 밉지 않은 악역일 것이다. 악역인데 어쩐지 그의 악행에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바로 같은 시간 KBS에서 방영하는 경쟁드라마 <브레인>의 주인공 이강훈의 코믹버전이다. 덜 심각하고 덜 진지하다. 대신 더 유쾌하다. 이강훈에게서 마음졸이게 만드는 비극이 보이고 있다면 유방에게서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대리만족이 있다. 그리고 물론 그의 라이벌이 되는 항우가 제대로 그러한 유방의 캐릭터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명문대 출신에, 잘생긴 외모, 무엇보다 유방에게는 없는 처절한 비극과 비밀이 있다. 그러한 대립구도 속에 얼마나 설득력과 대리만족을 주는가에 드라마의 성패가 달렸을 것이다.

 

아무튼 재미있다. 웃긴다. 다른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 때로 억지스러운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어차피 그런 드라마다. 이것은 드라마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픽션이고 오로지 시청자의 재미를 위해서만 봉사한다. 원칙에 충실하다. 그런 드라마를 좋아한다. 드라마란 단순히 논리와 구조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긴장과 피로를 푸는 청량제와 같은 것이다.

 

첫 회보다 더 재미있다. 다음주 3회는 2회보다 더 재미있을까? 무척 의미있게 보았던 작품 <뿌리깊은 나무>와도 어떤 부분에서 이어진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 하필 후속드라마에서 정기준이 말한 뜻이 유방에게서 나타난다. 의도한 것이었을까? 더욱 기대하게 된다. 좋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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