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이것도 웃기는 것이다. 고작해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만나서 서로 반하고 좋아해서 사랑에 빠지는 흔한 이야기다. 그런데 뭐 이리 비장한가?
하기는 작년 크게 인기몰이를 했던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김승유라는 한 남자가 있고 이세령이라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래서 우연찮게 서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새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민폐가 되고 패륜이 되었다. 한없이 무거운 시대의 짐을 한몸에 짊어지고 버둥거리며 발버둥쳐야 했었다. 차라리 김승유의 눈이 먼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그저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대단한 집안의 자식도 아니다. 자신이 어떤 대단한 존재인 것은 더욱 아니다. 그냥 평범한 개인들이다. 과거 순양에서 알아주던 부잣집 아들로 '빛나라 쇼단'이라는 작은 쇼단의 단장을 맡고 있고, 전직 쇼단 가수에서 이제 겨우 배우로서 첫발을 딛으려는 별 것 없는 신인에 불과하다. 그런 그들의 사랑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어 저리 심각해지고 비장해지는가? 마치 절대 범해서는 안 되는 금기를 범하는 양 서로 지키네 지켜주네 무겁기만 하다. 시대가 그러하니.
제대로 된 사회에서는 권력에 인격이란 없다. 인격이 있을 수 없다. 하다못해 공적인 업무로 항공기를 이용하면서 쌓인 마일리지를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한 것을 가지고도 바로 비판이 이루어진다. 권력자가 권력을 이용해 사적인 목적을 이루려 할 때 제도에 의해 그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고 바로 엄정한 법에 의한 제제가 가해진다. 권력이란 오로지 그 권력이 존재하는 이유, 공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공적인 수단으로서 사용되어질 수 있다. 권력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따라서 개인의 삶과 권력의 공적인 영역이 서로 겹치는 제한적인 경우에 한해서다. 어떤 경우에도 권력이 자의적인 이유로 개인의 삶에 개입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안 되었으니까. 드라마에서도 이미 너무나 훌륭하게 묘사된 바 있었다. 단지 자신이 선거에 승리할 수 있도록 정치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가진 바 권력을 이용해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었다. 간첩이 되어 억울하게 고문받다가 죽임을 당했는데, 그 재산마저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모두 빼앗아 가로채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작 그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사실을 알리기는 커녕 혹시나 그로 인해 위해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정구(성지루 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감옥에 갇힌 노상택(안길강 분)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소속연예인인 최성원(이세창 분)과 유채영(손담비 분)을 빼돌린 것은 어찌되었거나 신정구가 잘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그것이 간첩이 되어 조사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협박을 받을 일도 당연히 아니었다. 그러나 권력은 단지 말 한 마디만으로도 얼마든지 무고한 개인을 간첩으로 만들어 사회로부터 매장시켜버릴 수 있다.
단지 드라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경우가 무수히 많다. 전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권력의 필요와 의지에 의해 죄인이 되어야 했다. 죄인이 되어 사회로부터 매장당하고 심지어 목숨마저 잃어야 했다. 자신만 그랬으면 그나마 덜 억울할 텐데 가족에게까지 연좌의 책임이 씌워졌다. 정상적인 삶이란 불가능할 정도로 모든 것이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다. 아직도 그 억울함을 호소하며 진실을 밝히기를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 시대였다. 권력이 의지를 가졌다. 권력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권력이 탐욕을 가지고 원초적 욕망과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권력이었으니까. 국가공무원을 사적으로 불러 폭행을 가하고 법이 허락하지 않는 특혜를 강요할 수 있는 것이 권력이었으니까. 단지 권력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을 범죄자로 만들고 하나의 사업장을 문닫게 만든다. 권력의 눈치를 보며 권력 아래 굽히고 숨죽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드라마란 곧 판타지일 것이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과연 당시 서슬퍼렇던 유신정권 아래에서 강기태(안재욱 분)과 같이 권력의 실세에 뻗댈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권력의 실세 가운데 하나인 중앙정보부의 장조차 몸을 사리는데 강기태는 도무지 가리는 것이 없다. 사실 장철환(전광렬 분)이 지금 강기태에게 많이 참아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 강기태의 아버지 강만식이 전혀 뜻하지 않게 고문받던 도중 죽은데 대한 나름의 미안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만식 때와는 달리 극단적인 수단을 자제하고 있다. 그것이 강기태의 목숨을 살린다.
어쩔 수 없이 강기태가 송미진(이휘향 분) 사장과 만나고 그 뒤의 중앙정보부 김재욱(김병기 분) 부장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그나마라도 없으면 강기태는 파리목숨이다. 조태수(김뢰하 분)가 조금만 힘을 써도 강기태는 노상택이 보낸 하수인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던 것처럼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른다. 그런 시대에 과연 권력의 실세가 눈여겨 보고 있는 여성과 권력의 실세가 눈에 거슬려 하는 남성이 만나 사랑을 하는데 비장해지지 않을 턱이 있을까? 당장 권력에 의해 앞날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더욱 그들의 삶을 간절하게 절박하게 만든다. 너무나 슬픈 - 그것이 실제 있었던 현실이었기에 더 슬픈 코미디라 하겠다.
결국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대이기에 가능한 드라마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라면 조선총독부가 있을 것이다. 구일본제국의 조선총독부와 그를 등에 업은 일본인이거나 친일파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불의한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정권이 있을 것이다. 독재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던 하수인들이 있었다. 설마 지금에 와서 그런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 지금 청와대 비서실장이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개인의 삶에 개입하려 한다면 과연 그때처럼 아무런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런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도 하나의 역설일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내 답답한 웃음을 흘리고 마는 이유다.
하여튼 그런 점에서 조명국과 차수혁(이필모 분)은 그 시대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안다. 장철환이라는 권력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그러한 권력에 의해 휘둘리는 세상이 얼마나 정상을 벗어나 미쳐 돌아가고 있는가를. 그러나 조명국은 단지 권력의 단맛에 취하고 있었다. 손에 권력이 쥐어진다면 그러 것은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차수혁은 그러한 권력으로부터 입은 수혜를 기억한다. 미친 권력이지만 내게는 도움을 주었다. 권력을 그리워하고, 그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지 못한다. 정작 피해자는 강기태지만 그들은 강만식에 이어 강기태에 대해서마저 그를 공격하려는 장철환과 같은 편에 선다. 그들 또한 평범한 개인들일 터임에도.
미쳐 돌아가던 시대, 그러나 그것이 미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당연히 그러는 것으로 알았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전혀 문제 없이 그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있는 것을 문제삼고 있었다. 그런 시대 한 남녀가 있었다. 권력의 눈에 들었고, 권력의 눈밖에 났다. 권력과 상관없이 권력의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 비극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이 문제가 되어 그들을 옭죈다. 법도 원칙도 상식도 없이 권력과 권력의 의지만이 존재한다.
아무튼 유채영의 변화가 흥미롭다. 강기태와 이정혜의 관계를 직접 목격했다. 더 이상 노상택이 시키는대로 스폰서에 끌려다니기를 거부한다. 그런 그녀가 마침내 궁정동 안가의 연회까지 염두에 두게 된다. 그녀가 살아온 세계는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세계였다. 폭력과 금력과 권력이 개인의 의지마저 꺾고 마음대로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강기태를 얻고자 해도, 노상택과 고실장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도 더 큰 힘을 등에 업을 필요가 있다. 궁정동이라면 충분히 그렇나 배경이 되어 줄 터다. 그녀는 어쩌면 타락한 시대에 가장 순수한 영혼일 것이다. 너무 순수헤서 올곧게 시대에 물들고 만다. 어떤 모습이 되어 나타날지 무척 흥미롭달까?
하필 강기태가 동대문의 한기평을 찾아간 자리에 조태수가 습격해 온 것도 공교롭다. 충분이 예상하고 있었다. 신정구와 조태수의 입에서 동시에 동대문을 장악한 주먹 한기평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을 때 분명 한기평을 중심으로 두 사람이 만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조태수의 습격으로부터 강기태가 한기평을 구해준 것이 강기태와 빛나라쇼단에게 돌파구가 되어 주지 않을까? 딱 필요한 상황에 필요로 하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그래서 드라마이기는 하다.
양태성(김희원 분)의 변화도 주목해 볼 만하다. 의외로 양태성은 드라마의 등장인물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가장 속물적이면서도 그러면서도 가장 올곧다. 중심이 있는 기회주의자이며 양아치라고나 할까? 이정혜를 이용하면 장철환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를 등에 업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정혜가 원하지 않기에 그녀를 노리는 장철환은 기분나쁜 거슬리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정혜에 대한 의리를 지킬까? 아니면 현실적인 이익을 쫓을까? 노상택과 강기태 사이에서 그의 행보도 결정될 것이다. 뜻밖에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쥔 인물이 어쩌면 양태성이 아닐까. 최성원과 더불어 강기태와 노상택의 대립구도 가운데 중간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들로 인해 드라마는 질감과 양감을 갖는다.
그나저나 역시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자꾸만 궁금해진다. 조명국과 차수혁이 만나는 자리에서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 것이 '추억들국화' 앨범을 통해 전인권이 '사랑한 후에'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했던 알 스튜어트의 원곡 'The Palace of Versailles'였던 까닭이다. 이 노래가 실린 'Time Passages' 앨범이 1978년에 나왔다. 1974년쯤이라 생각한 필자의 추측이 틀렸던 것일까? 하기는 그다지 시대적 고증에 신경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김씨성을 가진 중앙정보부 부장이 나올 쯤이면 또 그 무렵이 맞기도 하다. 장철환의 최후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한데 과연 그렇게 되려는지. 흥미로운 부분이다.
솔직히 진부하다. 너무 뻔한 구도다. 이와 비슷한 유형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아 왔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그런 시대였다. 다른 어떤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 또 그런 드라마를 만들자면 그런 시대여야 한다. 필연이라 할 것이다. 이런 드라마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납득할 수밖에 없다. 그런 시대였노라고. 저 우습지도 않은 코미디가 당시에는 절박한 현실이었노라고.
생각보다 중정의 김재욱 부장과 장철환 사이의 싸움이 부각되지 않아 좋다. 그것은 단지 배경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틈바구니를 살아가는 개인들이다. 조태수와 노상택과 송미진과 유채영과 이정혜와 차수혁과 조명국, 양태성, 빛에 가려진 그림자들. 아마도. 더욱 흥미롭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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