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허연우(한가인 분)는 굳이 원작에서와는 다르게 드라마에서 기억을 잃은 것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의도로 성인이 된 허연우에게서 기억을 지워버린 것이었을까?
답을 찾았다. 찾은 것 같다. 너무 평범하다. 평범한 또래의 현대여성을 보는 것 같다. 자신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속에 느끼는 바 말하고 싶은 바를 전혀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만다. 신분의 굴레조차 없이 현실의 제약조차 무시한 채 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하고자 한다.
원작의 허연우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드라마에서도 아역시절의 허연우라면 결코 그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대부가의 여식이란 결코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다. 그녀는 사대부이며 여성이다. 사대부이기에 강요되어지는 지배층으로서의 품위와 여성이기에 강요되어지는 가짐이 있다. 허연우는 어려서부터 무척 영민하고 조숙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허연우가 아무일 없이 성장했을 때 지금의 허연우처럼 자신의 감정과 충동에만 솔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을까?
실제 원작에서도 그래서 허연우란 인내 그 자체였다. 무녀가 되고 나서는 철저히 무녀가 된 자신에 충실했다. 이훤(김수현 분)과 만나는 순간에도 그녀는 비천한 무녀로서 행동하려 노력했다. 무녀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 한 가지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그녀의 감정과 충동이 더욱 그녀를 애처롭게 만들었다. 무녀인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그래서 어떻게든 억누르려 하지만 그럼에도 비집고 나오는 짜투리가 있었다. 그에 비하면 할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려는 지금의 허연우에게서 어디에 그와 같은 안타까움이 남아 있을까?
더구나 그렇기 때문에 원작의 허연우에게서는 어떤 기품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야 말로 진정한 왕후감이다. 당장 허연우와 중전 윤보경(김민서 분)을 비교해 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허연우를 질투하고 이훤을 원망하면서도 중전인 윤보경은 결코 자신의 말이나 표정을 허물지 않는다. 눈물조차 함부로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도 높이지 않고 표현에 있어서도 철저히 중전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맞는 어휘만을 골라쓰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에게서는 기품이 느껴지고 있다. 비록 악역이지만 그녀는 중전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허연우의 경우는 어떤가?
이훤 역시 마음 내키는대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철없는 왕의 모습을 곧잘 보이고는 있지만, 그러나 정작 허연우와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그의 말이나 행동은 철저히 왕으로서의 그것을 쫓고 있다. 제아무리 밉고 싫은 윤대형(김응수 분)이라 할지라도 그의 앞에서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허물지 않는다. 그래서 절묘하다. 왕으로서의 품위는 지키면서 그러면서도 아픈 독설을 날리려는 솜씨가 자못 훌륭하다. 그것이 정치일 터다. 그에 비하면 허연우의 경우는 신분마저 잊은 채, 자신이 있는 장소, 자기가 놓은 처지따위 아랑곳 없이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있으니. 그래서 이훤은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왕다운 기품이 보이고 허연우는 나이에 비해 한참 어린 아가씨같다.
어쩌면 한가인이라는 배우를 염두에 둔 것일까? 확실히 지금의 한가인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그녀에게서 김민서와 같은 왕후로서의 품위를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다못해 민화공주를 연기하고 있는 남보라마저 어색한 가운데서도 철은 없지만 귀하게 자란 공주로서의 모습을 상당히 설득력있게 연기해 보여주고 있다. 결국은 발성의 문제가 아닐가. 한 음절음절을 또렷하게 구분해 발음하고자 하는 노력이야 말로 말에 있어서도 신분에 어울리는 격조와 절제를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양명군(정일우 분)의 경우는 바로 그런 점에 신분의 굴레를 버거워하는 양명군의 캐릭터와 어울리고 있기도 하다. 결국 그것이 허연우로 하여금 기억을 잃게 만들고 평범한 현대의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서 살아가도록 설정하게 만든 것이다. 만일 다른 배우였다면, 그래서 원작에서와 같은 왕후에 어울리는 품위를 연기해 보일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무튼 문제일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이란 드라마는 궁궐이라고 하는 특별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를 그 주된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말 그대로 로열 패밀리다. 왕족이다. 왕과 그에 어울리는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이야기다. 그 끝도 왕후라고 하는 가장 고귀한 신분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왕후가 되어야 할 이가 왕후로서의 귀품을 보이지 못한다. 왕후가 되어야 하는데 전혀 왕후로서의 특별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악역인 중전 윤씨가 더 왕후답다. 철없는 민화공주마저 왕궁의 일원답다.
허연우의 캐릭터에 그다지 몰입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녀에게서는 시대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녀는 무녀조차 아니다. 왕후로서의 모습도 보이지 않지만 무녀로서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가 판타지라서 현대사회로부터 타임슬립하여 그 시대로 넘어갔다 해도 충분한 설득력을 가질 정도로 그녀의 말이나 행동은 배경과 전혀 동떨어져 있다. 머리스타일로 문제삼는 김재운(송재림 분)이나 잔실(배누리 분)조차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는 그 시대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그녀 혼자만 다른 시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한가인이라는 배우에게 주어진 숙제다. 허연우에게 장차 왕후가 될 고귀한 이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하기는 과연 허연우만의 문제인가. 원래 '신의 한 수'란 말은 고스트바둑왕(일본제목 히카루의 바둑)의 한 대사에서 유래한 유행어였다. 어디에도 없던 말로 만화의 스토리작가가 임의로 만들어 쓰면서 유행하게 된 말이었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라고 하는 말도 지극히 현대적인 언어일 것이다. 굳이 퓨전임을 드러내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부분에서는 시대에 맞는 어휘를 신중하게 골라 쓰는 쪽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한가인이 허연우의 격을 떨어뜨린다면 저와 같은 무신경한 대사들이 드라마의 격을 떨어뜨린다. 아무리 퓨전이고 판타지라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시대를 무시해서는 그저 장난밖에 되지 않는다. 코믹드라마는 아니지 않은가?
마침내 왕과 중전 윤씨가 침소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그토록 피하고 피했건만 왕이기에 어쩔 수 없이 중전과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코 윤대형의 딸에게 다음대 왕의 어미의 자리를 넘겨주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왕이기에 왕실의 안녕을 위해 후손을 남겨야 하는 의무가 그에게는 주어져 있다. 중전 윤씨를 맞아들이는 것은 왕권을 능멸하는 윤대형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될 테고, 중전을 거부하는 것은 왕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딜레마다. 그래서 중전 윤씨는 무존재이거나 아니면 악녀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연 중전 윤씨가 악녀인가면, 직접 왕을 찾아가 독한 말을 퍼붓고 있음에도 그녀의 눈가에는 서러운 눈물이 고여 있다는 것이다. 눈물이 고여 한이 되고, 한이 고여 독이 된다. 독이 쌓여 사람을 해치게 되면 그것을 악이라 한다. 윤대형의 잘못이라기에는 이훤의 외면이 야속하고, 그녀가 못돼서라기에는 이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너무 무정하다. 가장 슬픈 캐릭터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악녀가 될 수밖에 없는. 왕에 의해 그녀는 악녀가 아니더라도 악녀가 되어야 한다.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녀를 눈여겨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양명군의 솔직한 고백을 허연우는 끝내 거부한다. 양명군을 거절하고 힘들고 아프지만 이훤을 쫓으려 한다. 물론 현재의 허연우로서는 결코 이훤과 함께 할 수 없다. 비장해야 하는데 아름답기만 하다. 하기는 워낙 슬픈 사연들이 많은 드라마이다 보니 매번 비장해서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허연우의 캐릭터가 저리 바뀐 데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너무 비장하기만 해서는 시청자 입장에서 피곤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이훤이 허연우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캐려 한다. 가장 긴장이 고조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미 시청자들에게 그 내용이 상세하게 모두 보여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더한다. 아직 알지 못하는 비밀을 쫓을 때 긴장이 있고 재미가 있다. 과정에 대한 묘사가 중요할 것이다. 이미 아는 사실인데도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재미있어야 한다.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허구라 해서 마냥 허구에만 의지해서는 사상누각에 불과할 수 있다. 허구가 그럼에도 탄탄한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것이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은 진실 속에 숨긴다. 아쉬운 부분이다. 재미있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91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신 - 여자노예들이 옷을 벗는 까닭, 노비가 아닌 노예라 불리는 이유... (0) | 2012.02.13 |
---|---|
무신 - 최충헌과 최씨정권, 그 불의한 시대에 대한 무모한 왜곡과 미화... (0) | 2012.02.12 |
난폭한 로맨스 - 저조한 시청률의 이유, 로맨틱 코미디의 코미디란 판타지의 코미디다! (0) | 2012.02.10 |
난폭한 로맨스 - 마침내 드러난 범인의 정체, 김동아와 강종희의 사정... (0) | 2012.02.09 |
해를 품은 달 - 호조판서에게 호통치는 허연우, 조선시대 무녀가 신분을 잊다! (0) | 2012.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