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웅박이라는 것이 있다. 박을 켜지 않고 속만 파내 마치 항아리처럼 쓰는 바가지의 하나다. 아무거나 넣으면 된다. 쌀을 담으면 쌀통이 되고, 물을 넣으면 물통이 되고, 거름을 넣으면 거름통이 된다. 정해진 용도가 없다. 과거 여성들의 삶이 그러했다. 그래서 뒤웅박팔자라는 말이 나왔다.
동서양이 따로 없었다. 민족과 국가의 구분이 없었다.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사는 사회라면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다. 여성에게 있어 가장 큰 성공이란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것이었다. 남성에게 있어 성공이란 그런 아내에게 있어 좋은 남편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그저 아름다울 뿐이지만 그녀를 얻기 위해 마녀가 준비해 놓은 함정을 뚫어야 하는 왕자의 의지는 눈물겹다. <해를 품은 달>에서 이훤(김수현 분)이 왕이어야 하는 이유였다.
허연우(한가인 분)는 상관없다. 사대부의 딸 허연우였을 때도 비천한 무녀 월이었을 때도 그녀는 항상 한결같았다. 그녀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녀의 신분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가진 능력도 아니었다. 사대부의 딸 허연우나 무녀 월이나 그다지 내세울만한 능력은 갖고 있지 못했다. 대신 아름다웠고 현숙했으며 사랑스러웠다. 그것이면 족했다. 그것이면 이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양명군(정일우 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왕의 사랑을 받았고 왕의 형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에 비하면 중전이라는 지고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하는 윤보경(김민서 분)의 처지란 얼마나 가엾은가?
윤보경이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였다. 악녀 아닌 악녀가 되고 마는 이유였다. 윤보경이 지금 있는 자리는 원래 허연우의 것이었다. 허연우에게 허락된 허연우의 자리였다. 왕이 허연우를 선택했다. 허연우를 사랑하여 그녀를 세자시절 세자빈으로 선택했다. 왕이 허연우를 인정한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허연우를 왕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이었다. 왕과 가장 가까운 중전이라는 위치는 그런 그녀에 대한 보상이며 증명이었다. 선택받지 못한 이가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어긋난 것들이 다시 제 자리를 찾는다. 그녀는 바로 그 어긋난 조각이었다. 그녀를 제자리로 되돌림으로써만이 허연우는 자신의 가치를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 그것은 존엄이다.
허연우가 존재감을 잃어가는 이유였다. 미스캐스팅이라 할 것이다. 한가인이라는 배우는 오롯하게 남자를 바라만 보는 지고지순한 이미지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배우다. 왕을 앞에 두고서도 하고 싶은 말은 일단 하고야 마는 모습이 한가인에게는 어울린다. 한 나라의 판서를 앞에 두고서도 무녀라고 하는 비천한 신분조차 잊은 채 꾸짖을 수 있어야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허연우란 한가인이 아니었다. 허연우란 오로지 왕만을 바라보는 존재이며 왕의 사랑만을 갈구하는 존재다. 왕의 사랑만 있다면 굳이 중전의 자리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왕의 사랑만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자신의 죽음과 관련한 억울함을 풀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녀는 달이다. 세상을 비추는 이훤이라는 해의 빛을 받아 빛나는 달. 이훤의 사랑을 받는 순간 달은 햇빛 아래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다.
그녀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무녀 월이 원래 허연우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왕이 그녀를 다시 온전히 사랑하게 되면서, 더 이상 허연우의 역할은 없다. 자신의 죽음과 관련한 진실을 쫓기 위해 기울인 노력조차 한 순간의 신기루와도 같다. 진실을 쫓아 밝히려는 의지와 노력은 왕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는 순간 봄을 맞은 고드름처럼 그대로 녹아 사라질 뿐이다. 이미 예정된 결론이었기에 그래서 그동안의 허연우가 그렇게 어색했다. 한가인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아니 허연우에게 한가인이란 맞지 않는 옷이었다.
솔직히 기대도 했었다. 비천한 무녀의 신분으로 조정의 관군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왕이 앞에 있다고, 한 나라의 판서를 앞에 두고 있다고, 심지어 고문을 받으면서도 왕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권신 윤대형(김응수 분)에게조차 그녀는 두 눈 똑바로 뜨고 또렷이 하고자 하는 바를 전한다. 그런 그녀가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진실을 찾아 나섰을 때 원작에서와는 다른 또 다른 허연우에 대한 기대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왕과 반대편에서 왕과 다른 경로를 진실을 찾아 밝히고 그것을 풀어내려 하는 당당한 한 인간으로서 왕 이훤과 마주하게 되지 않겠는가? 단지 왕이 내미는 손을 잡으려 하는 것만이 아닌 스스로 왕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원작이 로맨스소설이었듯 드라마 또한 아예 원작에 있던 미스테리의 요소마저 배제한 철저히 로맨스의 원칙에 충실한 궁정로맨스 드라마였다. 허연우가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매우 불쾌한 드라마일 수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성이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으로서 가장 존귀한 중전의 자리에 있는 윤보경이나 비천한 무녀의 신분으로 전락한 허연우나 그녀들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녀들 자신이 아니었다. 왕인 이훤이었다. 남자인 이훤에 의해 그녀들의 존재와 가치는 결정되었다.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윤보경은 허깨비가 되고 왕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허연우는 누구보다 빛이 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정작 여성지향의 로맨스 드라마이면서도 드라마에는 이훤 한 사람밖에 없다. 바로 이훤에 의해 모든 존재와 가치가 결정된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로맨스다. 멋진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것. 멋진 남자에게 사랑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성공을 이루는 것. 남성은 성공을 통해 사랑을 얻고 여성은 사랑을 얻음으로써 성공을 이룬다. 그 법칙이 깨지면 더 이상 로맨스는 로맨스가 아니게 된다. 로맨스에서의 여성은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 가장 약한 존재가 된다. 드라마의 성공에 있어 그런 점에서 김수현의 존재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동경할 수밖에 없는 멋진 왕의 모습을 그는 훌륭히 연기해 보이고 있었다. 아마 왕으로서 가장 매력적인 '남성'이 아니었을까.
물론 아역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결국 드라마가 무려 40%를 넘나드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인기드라마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아역들이 초반에 그 기초를 잘 닦아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역들의 애닲을 정도로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이후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전개되어 갈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만들었다. 저리 가엾고 예쁜 사랑을 하는데 과연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마무리지어지겠는가. 운명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행복한 사랑을 이루는 정해진 운명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운명의 사랑을 믿는다. 정해진 행복한 결말을 믿는다. 그것이 자기 것이었으면. 구경꾼이면서 또한 자기 자신이 된다.
윤보경의 처지가 더욱 가엾어진 것이 그래서다. 차라리 아버지가 자신을 저버리고 친척아이를 대신하려 함을 알면서도 그녀는 차마 원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택받지 못한 때문이다. 선택할 수 없는 이가 선택받지도 못했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 뿐이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녀의 체념어린 무덤덤함이 그 어떤 설움보다 더 서럽게 느껴진 것은 그래서다. 양명군은 체념을 선택했고 그녀는 선택을 체념했다. 그녀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한 가지였다. 아버지로부터도 명색이 남편인 이훤으로부터도 선택받지 못한. 달은 해를 받아 저리 빛나지만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해는 고작 작은 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일 터다. 가려지고 잊혀진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뒤웅박처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여성의 운명이다.
아무튼 여성취향의 로맨스라고 하는 장르가 갖는 공통된 특징일 것이다.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지만 작품 속에 여성이란 없다. 오히려 남성이 두드러진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 오히려 사랑하기보다 동경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그런 남성이다. 남성 취향의 이야기에서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강조되는 것과 다른 점일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면 로맨스가 아니게 된다. <해를 품은 달>은 그런 로맨스 드라마다.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은 그같은 현실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아쉽다. 허연우의 캐릭터가. 한가인이라는 배우도 무척 아깝다. 한가인이 허연우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허연우가 한가인이 되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허연우는 허연우일 뿐이었다. 이훤은 해고 허연우는 달이다. 해가 뜨면 달은 잊혀진다. 안타깝게도.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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