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불후의 명곡2 - 전설 이은하, 박재범 몸으로 노래하다.

까칠부 2012. 4. 8. 08:26

아주 오래된 기억이다. 여닫이문이 있던 나무외장의 거창한 TV 아닌 테레비만큼이나 흑백으로 채색된 희미한 어린시절의 기억이다. 주인집 안방에는 커다란 TV가 있었고 그 작은 잿빛 화면 속에 어느 여자가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찔러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멀리~~ 기적이 우네~~"


'밤차'였다. 아마 그 전이었던가 그 뒤였던가 역시 이은하의 '아리송해'를 따라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 한참 어렸을 적이었기에 '아리송해'라는 제목의 뜻도 모르고 마치 주문처럼 반복되는 가사에 노래가 온통 제멋대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워낙 어릴적이라 지금도 그때 각인된 가사가 마치 본능처럼 그대로 튀어나오곤 한다. 따로 가사를 보며 긴장해 부르지 않으면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참으로 필자에게는 어려운 노래다. 그나마 '밤차'는 어렴풋이나마 가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70년대 대마초파동에 이은 가요정화운동은 그때까지의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을 철저히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많은 음악인들이 타의에 의해 음악에 대한 열정을 내려놓아야 했었고, 그들이 고심하여 일구어 놓은 많은 음악적 성과들이 무도한 권력의 억압과 통제에 의해 사라질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암흑기라 할 수 있었다. 80년대 또다른 권위주의 정부에 의해 3S정책의 일환으로 족쇄가 풀리기까지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은 긴 침체기를 겪어야 했었다. 그때 바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맥을 이으며 고단한 서민의 삶을 위로해주던 이들이 조용필과 윤수일, 그리고 여자가수로서는 혜은이와 이은하였다. 


아마 그들이 있었기에 70년대까지 많은 선배음악인들이 일구어 놓은 음악적 성과들이 사라지지 않고 80년대의 르네상스로 이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80년대의 르네상스를 거쳐 90년대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은 또 한 차례의 빅뱅을 경험하게 된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전성기였다. 21세기 한류를 이야기하는 지금은 바로 그같은 앞선 시대에 빚을 지며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중심에 바로 이은하가 있었다. 90년대초반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지형이 급격히 바뀌며 대중들 앞에 그 모습을 감추기까지 그녀는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이 대중과 만나는 최전선에 있었다.


창인 것 같았다. 샤우트인 것 같았다. 그보다는 그녀의 밴드인 '이은하와 호랑이들'이라는 이름 그대로 호랑이의 포효와도 같았다. 누구보다 힘이 넘쳤으며 그러면서도 짙은 호소력을 자랑했다. 가장 흥겨운 음악과 가장 슬픈 음악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며 춤을 추었고, 눈물을 흘리며 애절한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아직 한글도 깨치기 전인 어린시절의 흐린 기억에서부터 제법 자라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기 시작하기까지 필자의 기억속엔 그래서 이은하의 당시의 히트곡들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 그 시절 필자 역시 어린시절을 그녀와 함께 보냈다.


'전설'이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다. 아니 누구보다 잘 어울린다. 이은하의 뒤에 김완선이 있었다. 이은미가 있었고, 이소라가 있었다. 혜은이는 아이돌이었다. 이지연과 강수지가 혜은이의 뒤를 잇는다. 춤을 추든 발라드를 부르든 여자가수라면 이은하의 뒤를 잇는다. 동시대 수많은 경쟁자가 있었지만 항상 그녀는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그동안도 때때로 반가운 만남을 가지기는 했지만 이제 후배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래서 그립고 뿌듯하다. 여전히 그녀는 내게 최고의 가수다.


과연 박재범은 최고의 퍼포머라 할 만했다. 춤이란 몸으로 부르는 노래다. 가사를 몸으로 표현하고, 멜로디와 리듬, 악기의 연주를 몸짓으로 전달한다. 음악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독특한 그루브에 호소력짙은 그의 목소리는 노래의 가사를 전달하고 있었고, 그의 몸짓은 노래로 다 전하지 못할 멜로디와 리듬을 들려주고 있었다. 악기같았다. 미디어플레이어의 그래픽 이퀄라이저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마 '아리송해'라는 노래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형태를 이루지 않을까. 목소리마저 힘이 실리며 더욱 강하게 와닿는다. 아이돌로서의 매력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그야말로 최고의 무대였다.


어쩌면 성훈이 보여준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은 그같은 박재범의 무대와는 정반대편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쉬웠다. 마치 막 이별을 하고 슬픔에 잠겨있는데 화려한 성찬을 대접받는 느낌이었다. 박재범이 몸으로 노래를 표현했다면, 성훈은 자신의 목소리로써 퍼포먼스를 들려주고 있었다. 색색의 다채로운 목소리의 향연이 성훈의 미성에 실려 코스요리처럼 귀를 가득 채워온다. 하지만 정작 노래가 의미하는 바는 짙은 슬픔이었다. 이별한 슬픔과 아픔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로지 성훈의 목소리만이 남아 들리고 있었다. 물론 성훈은 최고의 탁월한 보컬리스트였다. 단지 결과에 대한 지적을 굳이 하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린은 참으로 단단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섬세하게 풀어낼 줄 안다. 디테일한 감정의 선을 쫓으면서도 그 안에 굳은 심지를 놓치지 않는다. 이은하와 다르면서도 또한 이은하와 닮아 있다. 직설적으로 후려쳐오는 이은하에 비해 조이며 스며든다. 노래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그녀는 충실히 가수가 되어 청중에 전한다. 전혀 다른 스타일로 전혀 다른 감정을 담아 전혀 다른 '겨울장미'를 부른다. 원래 노래를 잘하는 가수였다. 린만의 '겨울장미'를 듣는다.


임태경은 과연 노래로써 드라마를 들려주는 탁월한 배우일 것이다. 어느 깊은 밤 홀로 어두운 하늘을 보며 고백하는 남자를 떠올린다. 아니 고백이 아닌 독백이다. 자기 안의 누군가에게 그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들려주려 한다. 고음에서 오히려 여력을 남겨 살짝 눌러 지르는 모습에서 외사랑에 빠진 남자의 억눌린 감정을 그대로 느끼게 된다. 차라리 고백하지도 못할 홀로 삭이는 더욱 간절한 사랑이다. 다만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와 같은 형태의 사랑은 일그러진 채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찌르는 듯한 가성은 그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누르고 누르고 또 누르다 마침내 비져나오는 그 견디지 못할 격정을.


에일리는 또 그와는 다르게 섬세한 내면의 감정을 넘치는 외연의 격정으로써 표현해낸다. 기교에 의한 디테일보다 고음과 성량에 실린 직설적인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고자 한다. 임태연이 독백이었다면 에일리의 '봄비'는 고백에 가까웠다. 그것이 누구이든 그녀는 자신의 속엣말을 거침없이 직구로써 전하려 한다. 가장 부담이 되는 첫번째 순서였음에도 자기만 잘하면 된다던 당당함 만큼이나 오히려 이은하에 비해서도 더 과격할 정도로 과감한 힘있는 무대였다. 대담하다. 어리지만 멋지다.


아마 태민의 경우는 특유의 미성이 편곡과 어울리는 힘을 들려주지 못한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다. 편곡도 훌륭하고 태민의 퍼포먼스 또한 훌륭했지만 그러나 노래가 그것을 받쳐주지 못했다. 차라리 태민의 미성을 살릴 수 있는 발라드의 편곡이었다면 어땠을까? 태민이라면 느린 노래에서도 얼마든지 몸으로써 그 노래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태민의 춤은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선이 무척 곱다. 예쁘다는 말은 가장 어울리는 칭찬이다. '밤차'는 말했듯 필자에게 특별한 의미로 기억된 노래다. 그런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알리의 '돌이키지마'는 특유의 바운스를 살리며 강렬하며 경쾌한 힙합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다만 후반부 알앤비스런 애드립에서 조금은 어색하지 않았을까? 어떤 장르 어떤 음악에서도 단단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알리는 말 그대로 믿고 보는 가수일 것이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항상 완벽할 수는 없지만 완벽에 가까운 무대를 선보이려 한다. <불후의 명곡2>의 기준이 되고 있을 것이다. 알리보다 더 공감하는 무대를 보여주는가? 그렇지 못한가? 알리에 에일리, 그리고 박재범, 임태경, 라인업이 참으로 화려하다. <불후의 명곡2>의 자랑이다. 이렇게 멋진 가수들이 있다.


대기실의 분위기는 항상 좋다. <불후의 명곡2>를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김구라가 주도하는 가운데 대기실에서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가수들의 모습이 좋다. 시시한 농담과 하찮은 잡담들이 TV화면 넘어까지 가수들을 단단히 엮어준다. 에일리와 임태경이 서로 경쟁할 때 대기실의 가수들이 하나같이 임태경의 편을 들어도 그것이 에일리에 대한 비토라는 느낌은 없다. 단지 가수들 자신도 청자의 입장에서 임태경의 노래에 더 감동을 받았다. 승부를 위해 앞에 나가 있는 상태에서도 뒷순서의 무대를 보기 위해 관심을 집중한다. 경쟁이 아니다. 단지 축제다.


사실 무대가 시작되고 나면 그냥 즐긴다. 굳이 따로 생각하거나 판단하려들지 않는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다. 다른 시대이고 다른 음악이다. 좋은 음악과 더 좋은 음악이 있다. 물론 아쉬운 음악도 있다. 이은하를 다시 본다. 이은하의 음악을 다시 듣는다. 전혀 다른 이은하다. 좋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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