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적도의 남자 - 분노와 이성의 경계, 김선우 진노식을 부정하다!

까칠부 2012. 5. 24. 09:34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드라마 제작환경에 대해 우려하며 비판하는 것이다. 이미 시청자와 약속한 방송시간이 있다.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21시 55분에는 드라마가 방영되어야 한다. 많은 시청자들이 그 시간에 맞춰 TV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방송을 내보내야 할 방송국에서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또 있을까?

 

물론 이해한다. 드라마 한 편을 만드는데는 억 단위의 돈이 기본으로 들어간다. 배우와 스텝과 감독과 작가와 방송국과 스폰서, 무엇보다 드라마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시청률이라는 지표가 있다. 얼마나 많은 시청자가 드라마를 호의로서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는가에 따라 각각의 입장과 이해가 갈리고 만다. 드라마가 성공하면 모두에게는 막대한 이익이 돌아간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그동안의 모든 시간과 돈과 노력들이 의미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신중하다 못해 소심해질 수밖에 없다. 시청자의 반응을 일단 보고 그에 맞춰 조금씩 드라마의 내용을 맞춰간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대신 시즌을 단위로 해서 그때그때 시청자의 반응을 보아 연장 혹은 조기종영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인기있으면 하염없이 늘어나는 것은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런데 작가나 제작진의 욕심만 챙길 수 있을까?

 

그나마도 그런 가운데서도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조금이라도 대본을 잘 써서 넘기고 싶고,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대본이 넘어오는대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완성도를 높여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한 장면이라도 더 찍고, 단 일 분이라도 더 시간을 들여 편집을 하고, 그래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한정된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삐끗하게 되면 다시 되돌릴 여유마저 사라진다. 만일 조금만 일찍 방송을 내보낼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면 사소한 문제가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과 같은 상화잉 벌어졌을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그러한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대한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시청자들이 TV앞에 앉는 21시 55분 전까지는 방송을 내보내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시청자들과 함께 조정실 앞에 앉는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체계적인 계획과 엄격하고 치밀한 실천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촬영을 마치고 방송을 내보낼 수 있을 것인가만을 고민한다. 최소한 그만한 준비를 마치고서야 비로소 시청자와 함께 촬영일정을 꾸려나갈 각오를 다질 수 있다. 도저히 능력에 미치지 못한다면 포기하는 과감한 용기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도저도 아니게 정해진 시간 안에 너무 욕심을 부린다. 프로로서의 자각이 없다. 시청자와의 약속이라고 하는 어떤 프로로서의 책임의식이 없다.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보다 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보다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완성도 높은 좋은 드라마를 시청자들에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보여주었는가? 정작 드라마를 보기 위해 TV 앞에 기다리고 있던 모두를 황당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리 사전제작을 주장해 보아도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다면 기존의 일정 가운데서도 충분히 체계적으로 완성도를 높여갈 방법은 있을 것이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부지런하다. 머리가 게으르면 손발만 분주하다. 손발이 분주해지면 결국 사람은 넘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드라마는 재미있었다. 항상 대한민국의 드라마제작환경에 비해 그 종사자들에 대해 감탄하며 존경의 마음까지 갖는 이유일 것이다. 일주일만에 무려 150분이 넘는 어지간한 영화 한 편 분량의 드라마를 촬영하고 방송에 내보내야 한다. 작가는 대본을 써야 하고, 감독은 그것을 연출해야 하고, 배우는 그것을 다시 연기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런 완성도다. 한류란 그런 점에서 기적이다. 그것이 또한 대한민국 드라마만의 장점이며 노하우이기도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역시 놀라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마침내 김선우(엄태웅 분)가 진노식(김영철 분)이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바로 그 아버지 진노식으로 인해 그를 낳아준 어머니와 어머니의 가족이 모든 것을 잃은 채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김선우의 어린시절 기억 속에 있던 그의 외할머니는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를 길러준 김경필마저 진노식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저주라 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진노식이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라는 사실을 거부해 버리겠다. 인정하고 싶지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어쩌는가? 어느새 김선우는 그토록 거부하고 싶은 아버지 진노식을 닮아간다. 물론 아무도 그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차라리 솔직하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를 찾아와 미안해하거나 사과하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들을 응징하려 했건만 어느새 자신마저 그들에 대한 증오에 더렵혀져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진노식으로 인해서였을 것이다. 진노식에 대한 분노와 거부감이 어쩌면 자기 안에 남아 있을 진노식의 모습을 찾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의 아버지다. 더 이상 김선우가 이장일(이준혁 분)을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때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였던 사람이다. 물론 죄를 지었다.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를 죽였다. 바로 그로 인해 이 모든 비극과 고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죽어간다지 않은가? 그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러 있다고 하지 않던가? 과연 사람으로서 아무리 한이 깊고 원망이 크다고 하더라도 죽어가는 사람에게까지 증오를 내보이고 조롱을 가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가? 비록 오해이지만 바로 그같은 증오로 인해 진노식은 약혼녀를 죽이고 그녀의 가족을 파멸시켰으며, 친형제같은 아우들을 절망으로 내몰았다. 저들이 비록 사람같지 않은 짓을 저질렀을지라도 자신마저 사람이 아니게 될 수는 없다.

 

김선우가 굳이 병실에 누운 이용배를 찾아간 이유다. 아니 검사 신준호(강지섭 분) 앞에서 이장일의 죄를 덮어준 이유였다. 이용배가 증오스럽다. 이장일이 원망스럽다. 최수미(임정은 분)을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한 편으로 과연 그런 자신이 옳은가에 대한 회의가 있다. 과연 자신의 복수는 옳은가? 과연 자신이 복수하려는 방법에 문제는 없는가? 한지원(이보영 분)이 그의 양심이 되어 준다. 진노식은 바로 그같은 김선우의 양심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있었다. 결코 그와 같은,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와 같은 자신은 되지 않겠다. 다만 그럼에도 절대 이대로 용서할 수는 없기에 모순된 연민과 분노를 드러내고 만다. 도저히 그들을 이대로 용서할 수는 없다는 인간적인 분노와 함께 그럼에도 그같은 분노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첨예한 이성이 그의 안에서 서로 대립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용배가 부탁했었다. 그에게 잘못을 사죄하며 간절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자기의 죄로 해달라. 모든 것을 자신의 죄로 돌리는 대신 아들은 용서해달라. 말이란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 있다. 어떤 물리력도 갖지 못한다. 어떤 직접적인 위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들어야 한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스치고 지나가는 말이란 잠시의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과연 이장일을 상처입히는 것은 김선우의 말인가? 아니면 이장일 자신의 김선우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는 알량한 양심인가? 죄인이 되어 처벌받는 것을 구해주는 대신 김선우는 그가 도망치지 못할 말로써 그를 상처입히려 한다. 어쩌면 그런 순간에조차 김선우는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장일이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해오기를. 자신을 채워오는 섬뜩한 증오로부터 자신을 구해내기를.

 

김선우가 최수미가 이장일이 저지른 죄의 증거가 되었던 자신의 그림을 불태우는 모습에 마치 아이처럼 화를 내는 것이 바로 그래서였을 것이다. 오히려 최수미가 자신의 출구를 막고 있다. 오히려 최수미로 인해 자신이 빠져나갈 길이 막히고 있다. 여전히 그는 이장일에 분노해야 하고 이장일을 증오해야 한다. 이장일과 이용배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혀 살아야 한다. 반드시 그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최수미가 자신을 망치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복수는 얼마나 사소한가? 크다면 크지만 유치하도록 직접적이다. 자신의 그림을 불태웠으니 자신의 그림을 상처입히겠다.

 

그래서 아이러니인 것이다. 아니 그 또한 필연인 것이다. 그같은 혼란 가운데 진노식은 김선우를 지탱해주던 이성이며 양심인 한지원을 납치해 감금한다. 한지원을 납치해 감금하고는 김선우를 협박한다. 한지원을 찾기 위한 김선우의 모습은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괴물의 그것이었다. 폭력을 서슴지 않고 협박을 마다치 않는다. 그것은 진노식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김선우에게 한지원은 진노식이야 말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그래서 드라마는 마지막 대단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이장일이 마침내 진노식을 찾아와 아버지와 자신의 분노를 전하며 그에게 잡힌다. 진노식과 함께 마지막을 위한 장소로 떠난다.

 

아무튼 그래서 친구일 것이다. 그래서 부자이고 그래서 친구다. 그렇게 닮았다. 솔직하지 못한 서툰 점까지도. 안다. 자신의 죄를. 그리고 아버지의 죄를. 떠나는 아버지에게 이장일은 용서를 구하라 말한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라고. 때리면 맞으라고. 나머지 모든 죄는 자기가 받겠다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장일은 김선우가 그리 간절히 바라는데도 쉽게 용서를 구하지 못한다. 용서를 구하기에는 죄가 너무 크다. 차라리 원망을 듣기를. 차라리 증오의 대상이 되기를. 자신의 아버지이기에.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다.

 

조금은 아쉽다. 과연 진노식을 찾아가서 그 뒤는 어떻게 되었을까? 중요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김선우가 분노하던 죄와 그토록 경계하던 악이 그 순간 서로 만난다. 악으로 인해 죄를 지었다 하고, 죄를 지었으니 악이라 한다. 그래서 함께 가자고 말한다. 죄는 악에 먹힌다. 김선우의 의지는 결국 증오에 먹히고 말 것인가? 하지만 김선우에게는 문태주(정호빈 분)또 있다. 그 또한 진노식을 증오하기보다 차라리 연민하기를 선택한다. 그럼에도 진노식은 그가 형이라 부르던 사람이었고, 사랑하는 여인이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김선우의 아버지였다.

 

돌이킬 수 없다. 모든 진실을 듣고서도 진노식은 흔들림이 없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차라리 진노식에게 복수했어야 했다고 문태주가 읊조리는 이유다. 조금 더 일찍 그렇게 서로의 죄와 진실과 마주했다면 조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길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서로 부딪혀 깨지면서도 진심으로써 진실과 마주했다면 더 큰 파국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용서아닌 용서였다. 오히려 용서가 아닌 더 큰 저주였다. 진노식이 더욱 독기를 드러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자기만 몰랐다. 자신만 버려졌다. 모든 원인은 자기자신이었음에도.

 

그나마 이장일에게는 김선우가 있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문은 버겁지만 언제나 열려 있다. 단지 이장일의 자존심이 그것을 거부한다. 그의 양심과 이성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때 문태주도 그랬었다면. 그럼에도 사죄와 반성 없는 용서란 용서가 아니다. 아무런 단죄도 응징도 없는 용서란 용서일 수 없다. 용서를 뼈에 새긴다. 용서를 영혼에 새긴다. 다행히 김선우는 문태주가 아니었다. 이장일도 진노식이 아니게 된다. 김선우에게는 한지원과 문태주가 있다. 진노식에게는 이제 아무도 없다. 아내 마희정(차화연 분)마저 배신한 가운데 그나마 의붓딸 박윤주(김혜은 분)가 남았다. 하지만 역시 너무 멀리 왔다. 그것은 차라리 절망일 것이다. 돌아갈 곳이 없는 그는 그저 앞으로 달려가는 수밖에 없다.

 

단순한 복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후련하게 원수를 갚고 원한을 푸는 이야기였다면 얼마나 명쾌하고 단순했을까? 하지만 드라마의 중심은 어느새 이준혁에게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다시 김선우에게로 넘어간다. 죄와 악에 대해서. 그를 응징하는 복수에 대해서도. 용서와 관용에 대해서 또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무엇이 복수이고 무엇이 응징인가?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른가? 철학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혼란스런 시대 하나씩 마음에 마음에 새겨둘 이야기일 것이다. 아버지와 맞서야 하는 그 첨예한 이성과 정의는 어쩌면 그토록 잔인하기까지 하다. 용서라는 것이 그저 쉬워서 용서이겠는가?

 

아무튼 그래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다. 거기서 방송사고만 나지 않았다면. 만일 그 순간 방송사고만 아니었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오늘로 하루 미뤄지게 되었다. 하기는 결국 오늘 마지막회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될 것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이 마지막 순간을 위해 모이게 된다. 고작 하루. 긴 하루지만.

 

어쩌면 지나치게 나가는 것일수도 있다. 단지 김선우의 복수가 치졸하도록 집요할 뿐이다. 참혹하도록 야비하게 잔인할 뿐이다. 단순히 이장일을 처벌받게 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아버지까지 모욕을 주어야 한다. 아버지를 모욕줌으로써 이장일마저 시궁창에 쳐박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순간에조차 자신을 경계하는 김선우가 있었다.

 

결국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답습하고 말 것인가? 한지원은 안티고네가 되고 마는가? 하지만 어쩌면 김선우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은 김선우 자신도 주체치 못할 분노이며 증오였을 것이다. 진노식을 죽여 눈이 멀거나. 아니면 진노식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올바로 앞을 볼 수 있게 되거나. 대신 최수미가 눈을 잃었다. 그녀는 자신을 부정했다. 잔인한 이야기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