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적도의 남자 - 용서와 화해, 죄와 양심에 대해 묻다!

까칠부 2012. 5. 25. 09:02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사랑받으며 자랐구나. 아버지 김경필로부터 진정 아낌없이 사랑받으며 자랐었구나. 그래서 김선우(엄태웅 분)는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구나. 누군가를 증오하고 원망하는 것은 김선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평생에 맺힌 한을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언제고 반드시 그 억울함을 풀리라. 그 원통함을 갚아주리라. 하지만 그같은 깊은 한이야 말로 끝내는 자신을 해치는 독으로 자라나고 만다. 다른 누군가를 해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해치거나. 때로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바로 그같은 원한이 갖는 독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용배(이원종 분)가 김경필을 죽이고 살인의 죄를 지은 것도 결국은 그같은 한이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난이 한이 되었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남들만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진노식(김영철 분) 역시 어린시절 춥고 배고팠던 한이 그를 편협한 외골수로 만들고 말았다. 약혼녀를 믿지 못했고 아우라 부르던 이들을 믿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지 못했다. 자기에게 씌워진 불운과 불행을 벗어던지고자 했던 그의 억척스러움이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인간의 길을 벗어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조차 한으로 여기고 만다.

 

균열이 일어난다. 평생을 자식을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다. 자식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작 자식을 망치는 길이었다. 확실하다고 믿고 저지른 일이건만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터무니없는 오해일 수 있다. 혹시나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억지로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잡아 왔는데 정말 터무니없는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 도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 과연 아무리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당사자라고 그들을 불행으로 밀어넣고 김선우는 행복할 수 있을까? 한때는 친구였고 친구의 아버지였다. 이장일(이준혁 분)이 자신의 죄와 마주하듯 어느 순간 김선우 또한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였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행복하기 위해서였다. 더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그들의 죄가 크고 자신의 원한이 깊더라도 그로 인해 자기를 함부로 내던질 수는 없다. 그것이야 말로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다. 자신만을 사랑하며 지켜봐주는 한지원(이보영 분)에 대한 배신이다. 인간의 양심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의 선의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하기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장일 또한 김선우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용서한다고 했다. 이미 용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장일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얼마나 이기적인가? 벌써 모두 용서했다고 친구라 말해주는 김선우 앞에서 목숨을 끊다니. 자신을 살리려 바다로 뛰어둔 김선우 앞에서 이장일은 그가 내민 손을 잡기를 거부한다. 그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김선우의 상처는 생각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김선우의 상처를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죄가 스스로 감당하기에 너무 아프고 무겁다. 그래서 진노식을 죽이려 했고, 진노식을 죽이려는 의도가 좌절하자 정신을 놓았으며, 김선우의 용서를 느끼고 정신을 차린 뒤, 끝내 자신의 죄를 감당 못하고 목숨을 끊고 만 것이다.

 

차라리 미안하다고 했으면. 차라리 내가 잘못했다 용서를 구했더라면. 하지만 그조차 이장일은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 자신 같아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용서받을 수 없기에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기에 차라리 그로부터 미움받기를 바란다. 이 역시 이기다. 자신을 향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려는 것이다. 오롯이 스스로 기쁘고 즐겁기 위해서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쫓는다. 아들을 위한다면서도 결국 자신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용배처럼. 그래서 김선우는 이장일을 용서할 수 있고, 이장일은 그런 김선우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 증오스러운 아버지지만 그런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 앞에 마지막 정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후회는 남기지 않는다.

 

결국 차이라면 마지막 순간 김선우에게는 김선우 자신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이장일에게 자신이란 그다지 큰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김선우는 자기를 지키려 했다. 그리고 이장일은 자신을 지키려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그렇게라도 지키려 했던 무엇이 아직도 그에게는 남아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아낌없는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자신을 최고라 여기고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지켜준 아버지였다. 그리고 자신을 마냥 신뢰하고 위해주는 친구 김선우가 있었다. 마지막 그를 구원해 준 것도 다름아닌 친구 김선우에 대한 우정이었다. 김선우의 진심어린 애정이었다. 하기는 바로 그래서 지금껏 진노식 회장을 꽁꽁 싸매고 있던 불신과 탐욕, 증오라고 하는 갑옷을 낱낱이 풀어헤치는 것도 아들 김선우와의 만남 아니던가 말이다.

 

아버지의 회사를 빼앗고 실의 속에 죽게 만든 진노식 회장에 대한 원망과, 그럼에도 그의 아들 김선우를 사랑하는 마음,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기에 김선우는 아버지를 찾아갔고, 돌아간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 앞에서 한지원 또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쫓는다. 항상 투정을 부리며 몰아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자기 앞에서는 작아지고 약해지는 아버지 최광춘(이재용 분) 앞에서 최수미(임정은 분) 역시 어린 시절의 솔직한 자신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아버지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이장일 역시 조금은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금은 뻔뻔하게 자기를 위하려 할 수 있었으리라.

 

아들이 자기를 부정한다. 이장일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아들인 김선우는 자신에게 아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도 수십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마희정(차화연 분)이 집을 나간다. 그녀의 딸 박윤주(김혜은 분) 역시 그녀를 따라 나서며 집에는 진노식 혼자 남아 있다. 문태주(정호빈 분)이 보내온 친지확인결과는 그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기에 진노식이 죄를 지을 수 있었다면 그에게도 아직 하나 남은 것이 있기에 그를 참회하도록 만든다. 그렇게나마 진노식이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어쩌면 드라마의 제목이 <적도의 남자>인 이유일 것이다. 적도야 말로 가장 뜨거운 경계다. 열대의 우림과 광활한 사바나와 매마른 사막이 그곳에 있다. 김선우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왔다. 적도로 갔다가 돌아온 뒤 다시 적도로 떠난다. 한지원이 그를 찾는다. 모든 고민이 사라진 채로. 김선우 역시 모든 번뇌가 사라져 있었다. 남은 것은 오롯한 서로에 대한 진심 뿐. 행복하려 했기에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찾아 마침내 기쁨을 얻는다.

 

죄란 무엇인가? 악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용서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 양심이란?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나타나는가? 인간은 이기적이다. 모두는 이기적이다. 죄와 악은 바로 그로부터 비롯된다. 선과 양심 또한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과연 그 경계에서 김선우를 지탱해 준 것이 무엇인가? 이장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고 끝내 죽음으로 속죄하도록 만든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결국은 무엇이 자신을 위하는 것인가? 누구보다 자신을 위해 죄를 짓고, 악에 물들고, 바로 그런 자신을 위해 용서하고 속죄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그렇자면 무엇이 진정 자신을 위하는 것인가?

 

마침내 자신의 죄를 감당하지 못하고 놓아버린 이장일이 과거를 거슬러간다. 모든 것이 시작된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려 한다. 많은 이들이 시간이 지나고 후회하며 하는 말이다. 혹시 게임에서처럼 현실에도 리셋버튼이 있지는 않을까?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어쩌면. 아마도. 분명히. 그것들이야 말로 이장일의 솔직한 진심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면. 최수미와의 인연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최수미의 노력이 아주 의미없지는 않았다 말할 수 있겠다. 위로가 되어 주었을까? 아니 아버지와 함께 느긋하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는 아마도 그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서 다시 이장일은 김선우와 만난다.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죄와 함께.

 

김선우의 실명 역시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할 것이다. 하필 김선우가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진노식을 찾아간 교도소 면회실에서였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와의 앙금을 풀었다. 죄는 죄, 사람은 사람이다. 진노식이 지은 죄는 밉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신을 낳은 아버지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죄는 죄대로,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은 인연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마침내 혼란이 사라지고 빛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분노에 휩싸임으로써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증오에 휘둘리면서 주위를 전혀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장일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비로소 김선우는 지금껏 자기가 무엇에 사로잡혀 있었던가를 깨닫고 만다.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그는 다시 빛을 되찾는다. 김선우는 한지원 앞에 자신에 대해 고백한다.

 

어쩌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호쾌한 복수의 이야기를 기대했다. 속이 후련한 복수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보았었다. 하지만 정작 드라마의 주제는 복수가 아니다. 그래서 답답하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어째서 저들은 저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만들을 하는가? 하지만 마지막회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복수인가? 무엇이 진정한 의미인가? 용서조차 아니었다.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무엇이 인간을 진정 자유롭게 만드는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마지막회였을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은 결론나 있었다. 더 이상 새로운 여지란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첨예한 주제의식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적도로 돌아갔던 김선우는 마침내 자신을 쫓아온 한지원과 만난다. 최수미 역시 환상 속에 이장일고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나눈다. 진노식의 안타까운 몸짓 속에 김선우는 빛을 찾고 진노식은 아들을 되찾는다. 그러나 진정한 김선우의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김경필이었다. 문태주조차 그 순간 한 발 물러선다. 시간을 거스르지는 못하지만 운명은 거스를 수 있다. 그들은 벌써 행복해진다.

 

일관되다. 그러면서 완결된다. 하지만 19화에서의 방송사고가 그같은 반가움을 해친다. 한국드라마제작의 어두운 현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재미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최선의 결과를 내놓고 있다. 아쉬움도 잠시 접는다. 단지 최고가 아닐 뿐이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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