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각시탈 - 기무라 겐지의 폭력과 이강토의 폭력, 무도한 시대를 기억하다.

까칠부 2012. 6. 1. 09:41

권력이란 폭력이다. 힘이란 무언가를 바꾸는 근원이다. 움직이는 것을 멈추게 하고, 멈춘 것을 움직이게 하고, 방향을 바꾸었다가 더 빨라지거나 느려지기도 한다.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 물론 자발적으로 그리 한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럴 수 없기에 권력이라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필경 그것은 폭력이라는 형태를 띄게 될 터였다.

 

근대 일본의 근대화과정도 그러했다. 일본인들은 당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 여전히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전근대적인 전통사회에 머물러 있었고, 단지 소수의 권력자와 지식인들만이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열강에 의한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침략기에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서구화는 지상의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근대 일본의 군부에서 나타나는 야만적인 폭력의 경향은 그같은 일본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어차피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누가 지배자가 되든 크게 상관할 바란 없는지도 모른다. 그냥 잘하면 된다. 지배자는 지배자로서 잘하고 피지배자는 피지배자로서 잘한다. 이강토(주원 분)이란 그 접점이다. 수많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에 우호적이던 조선인들이야 말로 그를 대변할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일본제국주의의 지배 아래에서 그들은 최소한 살 만했고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어찌하는가?

 

과연 일본제국주의라서 문제였을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한탄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조선을 무너뜨린 것이 조선인 자신들이었으면. 조선을 무너뜨리고 왕과 왕비를 죽여 낡은 시대를 끝낸 것이 조선인 자신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더라면. 조선이라서 우호적인 것이 아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많은 제주도민들이 해방된 조국을 떠나 일본인들의 나라를 찾아 망망대해를 떠돌기도 했었다. 일본에서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도 가혹했지만 그보다 더 가혹한 현실이 해방된 조국 대한민국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이 불타고 아이들이 살해당하고 여성들이 유린당했다. 이때 제주도민의 3분의 1이 해방된 조국에서 같은 민족의 정부와 군대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었다.

 

같은 민족인 군사정권에 의해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도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그에 항거하며 싸우고 있었다.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당하기 때문이다. 옳지 못한 부당한 폭력이 개인의 일상에까지 미치고 만다. 자유롭고 싶다. 당당하고 싶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한 삶을 누리고 싶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한다. 당시는 일본제국주의가 적이었고 군사독재정권시절에는 독재정권이 적이었다. 일본이라서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우의 불의하고 부당한 폭력이 문제다.

 

아마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기무라 켄지(박주형 분)에 의해 이강토에게 가해지던 무도한 폭력과 그런 기무라 켄지에게 가하던 이강토의 보복에 대해서. 이강토를 위해 울어주던 아베 신지에게 가해지던 또다른 일본 경찰들의 폭력 또한 마찬가지다. 이유가 없다. 이유가 있다면 단 하나, 일본인인가? 아닌가? 권력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 지위가 높은가? 아니면 낮은가? 그것은 단지 권력을 확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서로가 타자였으니까.

 

인간은 결국 자기들끼리만 대화를 한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자기들만이 말을 만들어 공유하기도 한다. 합리란 바로 그 대화가 통하는 그들 사이에서나 유효한 가치인 셈이다. 일본제국주의만이 아닌 이성과 합리를 내세운 서구열강의 식민지지배 역시도 따라서 식민지인들에 대한 이같은 무도하고 야만적인 폭력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러한 무도한 폭력 속에 폭력을 배우고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려 한다. 더 약하거나, 더 못났거나, 더 못하거나, 그렇게밖에는 살아가지 못하게 되어 버리고 만다. 해방이후 우리의 역시는 어째서 그렇게 잔인했을까? 말이 통하지 않던 무도한 권력의 끝은 야만으로의 회귀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목담사리(전노민 분)의 재판정에서의 일갈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일 게다. 분노해야 하는 것은 부당한 지배이며 불의한 폭력이다. 진정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은 자유이며 존엄이다.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단지 일본이라고 하는 대상에 대한 증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범하고 있는 잘못에 대한 분노 때문이어야 하는 것이다. 목적없는 증오는 고작 기무라 켄지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이강토의 비루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뿐이다.

 

다만 과연 그런 의도였는가? 그래서 의도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말하고 있다. 목담사리의 연설은 인상깊었지만 아직 각시탈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어진 바 없다. 하지만 야비하게도 목단(전세연 분)을 이용해 각시탈을 잡으려 하던 이강토의 모습에서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게 된다. 존엄을 지키려 하는가? 단지 일본을 증오하려 하는가? 자유를 쟁취하려 하는가? 단지 일본을 증오하고 싶을 뿐인가?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는 화해를 상징한다.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과 일본제국주의의 불의하고 부당한 권력과 지배에 항거한 이들도 있었다. 대개는 사회주의자이거나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조선인들에게 그들이 불의하고 부당한 권력이듯 일본인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인류보편의 가치란 인종이나 민족을 따지지 않는다. 드라마로서는 차라리 기무라 슌지가 악역이 되는 쪽이 재미있을 테지만 21세기에 어울리는 보편의 가치에는 <쇠퉁소>에서의 우에하라의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참고로 우에하라의 캐릭터 또한 이전 <각시탈>의 한 에피소드에서 일본 고관의 자식으로서 각시탈과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주의의 불의한 폭력에 항거하던 어느 라이더에서 이어졌을 것이다.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가?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과연 그 저항은 불의하며 부당한가? 어떤 때는 무고한 이가 희생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결국 또다른 한과 증오를 낳기도 한다. 그럼에도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목단의 과거와 이강산(신현준 분)의 기억이 이어진 듯하다. 어려서 목단에게 칼을 건넨 그 사람이 어쩌면 이강산이 아니었을까? 배경이 유사하다. 풀이 우거진 벌판과 마적에 쫓기던 소년과 소녀와 그리고 헤어짐. 아니면 그는 이강토였던 것일까? 순수를 지키지 못하는 시대라는 것도 참으로 서글프다. 이강토를 저리 만든 것은 이강토 자신인가? 아니면 시대인가?

 

진부한 예전의 일본이니까 싫다는 류의 반일드라마는 지양한다. 반일이 아닌 항일이다. 일본이라서가 아니라 일본이 불의한 지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당한 폭력으로 조선인을 길들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들여진 이들이 피폐해진다. 사람이 사회가 피폐해진다.

 

비극이 다가온다. 안타깝게도 이강토가 주연이다. 스포일러 없이도 앞으로 전개가 어떻게 될 지 대충은 예상할 수 있다. 비극 속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다. 절박함이 인간을 일깨운다. 이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만 처절함일 것이다. 비장하고 비감했건만 이제는 그 흔적조차 없다. 무의미한 증오란 얼마나 가치없는가. 흥미롭다. 재미있다. 액션이 아쉽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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