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본능일 것이다. 모든 필멸의 존재는 불명을 꿈꾼다. 찰라의 존재이기에 영원을 꿈꿀 수밖에 없다. 수명은 유한하지만 후손은 무한하다. 당장 자신은 죽어도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들이 이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것이다. 그것은 특히 번식의 주체인 유전자를 중심에 놓고 봤을 때 지극히 타당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개체는 죽지만 유전자는 영원히 살아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사실 어디나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도 가업의 전통이 남아 있다. 자신의 일을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준다.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 직업, 재산 등을 자식에게 물려주어 이어가도록 한다. 아니 심지어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이가 오히려 자식을 대신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은 친자식보다 모든 것을 물려받은 타인이 더 자식같다. 서양에서도 상속이라는 것이 있고 계승이라는 것이 있다. 나를 대신해서. 혹은 나처럼. 아니면 반대로 나와는 다르게.
그러나 과연 자식은 나의 대신인가? 자식이란 부모의 대신에 불과한가? 본질적인 물음이다. 자식이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떤 이유로 태어나고 어떤 의미로서 살아가는가? 투사란 자식을 부모인 자신에게 종속시키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대상에 투사함으로써 상대를 자신의 욕망에 종속시키려 한다. 자신의 희망과 미련, 만족을 그 대상을 통해 대신 채우려 한다. 더욱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그같은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자신이 겪어야 했던 좌절과 분노를 자신의 분신인 자식으로 하여금 대신해서 해소하도록 강제하려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자식의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는 깡그리 무시되어 버린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그래도 좋은가고. 자식이란 단지 부모의 소유에 불과한 것인가? 자식을 위해서라는 말은 기만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식에게 물으려 하지 않는가 말이다. 묻지도 않고 대답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직 어리다. 아직 어려서 세상을 모른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아는 자신이 대신해 판단해주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인간이 위대한 것은 본능을 거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본능은 그렇게 시키지만 어느새 인간은 자식에게서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개인을 보았다. 자신이 그렇다. 자신 또한 자신의 부모의 자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은 부모에게 속하는가? 자신이 부모에게 속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는 어떻겠는가? 단지 태어나주는 것으로 족하다. 자신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살아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미 충분히 유전자는 자식을 통해 후손에게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또한 본능을 쫓는 것일 게다.
자식을 자신의 대신이라 여긴다. 더구나 깊은 열등감과 상처까지 자신의 안에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사회가 그렇게 강요한다. 학벌과 부와 직업으로 서열을 나누면서. 인간을 판단하려 하면서. 승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패자다. 승자가 된 나머지는 모두가 열등한 패배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 자식은 최고가 되어야 한다. 승자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은 전통사회의 인습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잔재일 것이며, 우리 사회의 가혹한 경쟁문화가 만들어낸 폐해일지도 모르겠다. 성을 물려주듯 자신의 일도 물려주고, 자신의 좋은 일이나 안 좋은 일도 모두 물려주고, 어떻게 해서든 자식을 경쟁의 지옥으로부터 살려내야 한다는 부모로서의 본능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이 명령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자식을 위한다고 더운 여름날 포대기로 아이를 지나치게 감싸다가 질식해 정신을 잃는다. 아이를 위하는 것이 아이를 죽이고 만다. 결국 성적을 비관한 아이가 자신의 눈앞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아야 했던 어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결코 죽이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부모 자신이었다. 사회의 책임도 있기야 하지만 마지막에 자식과 마주한 것은 부모 자신이었다.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였을 것이다. 극적으로 조금 - 아니 상당히 과장된 것은 있지만 어디엔가는 분명 존재하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익숙하다. 드라마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내 주위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항상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항상 그대로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전히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해졌으면 더 심해졌지. 경쟁사회는 더 심화되어가고 있다.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자식의 부모로써 낳았다. 그래서 천륜이다. 사람이 함부로 끊을 수 없는 하늘의 인연이다. 책임도 당연히 무겁다. 자식이 어른이 되어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돌본다. 홀로 선다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가 되어 자식을 돌본다는 것은 그런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하여튼 섬뜩한 이야기일 것이다. 요즘 <사랑과 전쟁2>가 무섭다. 현실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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