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각시탈 - 종군위안부=일본군성노예,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능욕...

까칠부 2012. 8. 10. 08:45

원래 전시를 위한 종군위안부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먼저 모집되고 있었다. 물론 그 대상은 직업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지원자만 가지고는 필요한 만큼의 위안소를 운영하는데 한참 부족하여 특히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 가운데 위안부를 조달하려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종군위안부 - 아니 일본군성노예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모두가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계획 자체는 무척 합리적이었다. 러시아혁명 당시 일본은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무려 7만 5천에 이르는 병력을 러시아로 파병했다가 그 가운데 무려 1만에 이르는 병력을 전투도 아닌 성병 '매독'에 의해 잃는 황당한 경험을 한다. 점령지에서의 무분별한 성행위를 방치한 결과 정작 적과 싸워야 할 병력이 채 싸워보기도 전에 전선에서 이탈하고 마는 아픈 경험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만일 다시 일본이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일본이 갖고 있는 한정된 자원과 인구를 감안할 때 그 손실은 어떻게해서는 최소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도 지휘부의 엄격한 관리와 통제 아래 안전한 성행위를 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바로 드라마에서도 언급된 '군수물자'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군의 전투력 유지를 위해 민간으로부터 조달한 '보급품'이었던 때문이다.

 

얼마나 합리적인 계획인가? 경험을 통해 막대한 비전투손실이 발생하는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대책을 마련한다. 병사들의 점령지에서의 무분별한 성행위가 원인이니 그것을 지휘부에서 알아서 미연에 감독하고 통제한다. 더불어 전장의 긴장과 피로를 성행위를 통해 해소할 수 있도록 조절한다. 성병으로 인한 비전투손실을 막는 동시에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효과도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의 식민지와 점령지의 민간인 여성의 희생이야 보다 큰 목적을 위해서는 사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단, 인간이라고 하는 존엄과 그 존엄이 가리키는 도덕적 판단을 배제한다면. 점령지 여성에 대한 성폭행까지 예방할 수 있으니 차라리 인도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것이 바로 근대인 것이다. 합리와 효율. 1+1은 2다. 2에서 1을 빼면 1이 남는다. 세계란 그와 같다. 하나의 답이 존재한다. 그 답을 찾아가는 가장 빠른 길이 존재한다. 문명의 발달이 그것을 입증해주고 있었다. 보편적인 원리와 체계적인 질서 속에 인간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란 없는 완벽한 구조를 보게 된다. 인간조차 그 완벽한 구조 안에서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설사 그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이가 적지 않다 하더라도 덕분에 경제가 발전하고 모두가 잘상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소수가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손해를 보더라도 모두를 위해 기꺼이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더하고 빼고 계산하고 나니 그래도 이익이 남는다. 그래서 옳다. 사람마저 계량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차라리 종군위안부=일본군성노예는 나치독일의 살인공장과 닮아 있을 것이다. 나치독일이 보다 효율적으로 유대인을 비롯한 열등한 인종들을 배제할 방법을 찾았듯, 일본 역시 보다 효율적으로 병사들의 성욕을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나치독일은 유대인들을 자신들이 고안한 살인공장으로 보냈고, 일본인들은 병사들의 성욕을 관리할 수 있는 섹스공장을 운영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인간을 수단화, 사물화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이란 없다. 단지 인간의 형상을 한 유기물 덩어리만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결과가 말해준다. 효율과 효과가 말해준다. 그것이 이성이고 논리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덕적 판단을 배제했을 때 그것은 극도로 단순하고 효율적인 아름다운 구조를 이룬다. 오죽하면 해방되고 나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서도 한국전쟁 당시 위안소가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었겠는가? 기지촌이란 미군을 대상으로 한 위안소였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될 때 어떤 모습이 되어버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일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양국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민족의 문제만도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문제도 아니다. 인간의 문제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문제다. 현대에 이르러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문제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어야 하며 누구도 그것을 훼손하거나 박탈할 수 없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며 항상 목적으로서 대우받아야 한다. 하지만 또한 여전히 많은 경우 그같은 원칙이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기에 더욱 스스로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 당사자가 아닌 우리 자신들조차 아우슈비츠의 참상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와 같다. 우리가 스스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수단이 된다. 인간이 대상이 된다. 인간이 사물이 된다. 조선인만이 아니다. 일본인조차도다. 말했듯 위안소가 설치되었을 때 가장 먼저 모집대상이 되었던 것을 일본인 직업여성들이었다.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을 위한 도구가 되어 징집되고 전장으로 보내졌다. 무라야마 요시오(김명수 분)가 다짜고짜 이강토(주원 분)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그 모습 그대로 철저히 수단으로서 다루어지고 있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대한민국 군대에 오랜 전통으로 남아있던 비인간적인 구타와 가혹행위란 바로 일제강점기 일본으로부터 배워온 것이다. 기무라 타로(천호진 분)가 오랫동안 자신의 집안일을 돌보아 온 노파의 손녀를 마치 물건을 품평하듯 훑어보는 모습은 그래서 섬뜩하도록 적나라하다.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그리고 여성이니까. 더구나 직업여성이니까. 심지어 식민지의 여성이니까. 달리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국익을 위해서. 경제를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그는 목적이 아니다. 그는 존엄하지조차 않다. 그 너무나 당연한 희생을 발판삼아 남은 이들은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고마움과 미안함이란 고작 악어의 눈물에 불과한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스스로 원해서 자처한 사람은 없다.

 

어쩌면 그래서일 것이다. 종군위안부라고 하는 무게에 비해 그 묘사가 서운할 정도로 간략한 것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감정마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탐욕조차 보이지 않는다. 혐오나 멸시의 감정조차 없다. 그저 기계적으로 말 그대로 '군수물자'의 조달을 결정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모습만이 보여질 뿐이다. 의도한 것이거나, 아니면 현실적 여건의 문제로 의도한 만큼 나오지 않은 것이거나. 하지만 덕분에 보다 사실적인 의미심장한 '종군위안부'를 보게 되었다. 어째서 그들을 일본군성노예라 부르는가. 노예란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단지 수단이며 도구에 불과하다. 그래도 여성의 경우는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이 더 크게 도움이 된다.

 

채홍주(한채아 분)가 이강토의 정체를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 키쇼카이의 회장 우에노 히데키(전국환 분)의 양딸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스스로 기생으로 전락해 있던 것을 우에노 히데키의 구함을 받아 지금의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누구보다 조선을 증오하고 조선인을 혐오한다. 뼛속까지 일본인이기를 바란다. 그런 그녀임에도 막상 이강토가 각시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주저하고 만다. 핏줄의 이끌림은 아닐 것이다. 인간과 인간, 그 가운데서도 여성과 남성의 이끌림일 것이다. 더구나 채홍주는 이미 이강토가 목단(진세연 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미 정체를 알고 난 뒤에도 이강토를 지키려 하는 채홍주와 목단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면서도 끝내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드는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 하기는 채홍주가 아직 미약하던 처지일 때 이강토의 구함을 받았었던 반면 기무라 슌지는 처음부터 일본인 - 그것도 총독부의 요직에 있는 인사를 아버지로 두고 조선인 목단을 만났다. 바라보는 눈의 위치가 다르다. 채홍주는 이강토를 우러러봤고 기무라 슌지는 목단을 내려다보았다. 형인 켄지가 이강토의 어머니를 죽인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그 사실에 미안해하거나 안타까운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혹시나 이강토가 각시탈이 아닐까 하는 의심만 드러낸다. 자신의 형은 이강토의 어머니를 죽일 수 있지만 이강토는 자신의 형을 죽여서는 안된다. 아니 조선인인 이강토가 일본인을 해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 더욱 그의 진심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예민한 소재일 것이다. 널리 알려진 만큼 정면으로 다루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간략하지만 그 본질을 짚어내는 감각을 높이 산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면 한계이거나 실수에 의한 것이든, 그러나 바로 그것이 종군위안부=일본군성노예의 본질인 것이다.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분노할 수밖에 없는, 아니 본능적인 섬뜩함과 두려움마저 느끼게 만드는 그 서늘함. 그래서 이 땅의 수많은 이들은 저들에 의해 수단이 되고 사물이 되었다.

 

너무 길다. 그리고 읽기도 난해하다. 미안함을 느낀다. 그만큼 생각이 많다. 나는 인간인가? 본질적인 물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한국인인가? 여성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한국인이기에 분노하고, 남성으로서 여성에 가해진 폭력에 분노하며, 인간이기에 인간의 존엄에 대한 폭력과 능욕에 분노한다. 분노하기에 자신은 인간일지 모르겠다. 무겁다. 그리고 화난다. 슬프다.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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