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상 오로지 군인이나 군인에 준하는 신분을 가진 자만이 교전권을 부여받는다. 제네바협약의 보호도 받는다. 전쟁이란 주권적 판단과 결정이 가능한 당사자 사이에나 일어나는 것이다. 주권적 판단과 결정이 가능한 주체를 따로 정부라 부른다. 그 이외의 모든 행위는 단지 범죄일 뿐이며, 교전이 아닌 토벌이고 진압일 뿐이다. 그들이 테러리스트이며 폭도인 이유다.
나라가 망했다. 정부가 사라졌다. 자신을 대신하여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바를 전할 공식적인 창구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직접 전해야 한다.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일본정부와 일본인들에 대해 하고자 하는 말을 들리도록 직접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정부요인도 군인도 아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을까? 공무원도, 관료도, 정치인도 아닌 그들이 일본정부와 일본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그런데 민간인으로서 무기를 들고 폭력까지 행사하려 하니 그들을 또한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는가?
자식을 잃은 어미가 있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갖춘 상대에 의해 자식을 잃어야 했던 어머니가 한 사람 있었다. 그래서 몸에 폭탄을 둘렀다. 폭탄을 두르고 저들의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스위치를 눌렀다. 언론에 그렇게 보도되었다.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다. 자살폭탄테러라고. 인명을 중요시여기지 않는 야만적인 폭거라고. 폭력은 무엇도 낳을 수 없으며, 불의한 테러는 마땅히 근절되어야 한다고. 만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평화적으로, 공식적인 수단을 통해 당당히 전하라. 혹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투쟁만이 인정받을 수 있다. 그와 똑같은 논리로 담사리(전노민 분)를 살리기 위해 처형장으로 뛰어든 지사들을 이야기해보라.
하지만 바로 그것이 국제질서다. 앞서도 말했듯 바로 그것이 국제사회에 통용되는 규범인 것이다. 국제사회란 말 그래도 주권을 갖는 정부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리킨다. 주권을 갖는 그들에게 주권을 갖지 못한 이들까지 아우른 질서를 정의하라 한 것이다. 당장 한국정부조차 한국정부의 의사에 반하여 가해지는 개인적인 모든 저항이나 폭력을 용인할 생각이 없다. 그리고 당시 일제강점기의 구일본제국은 세계의 열강 가운데 하나로써 이미 국제사회로부터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던 중이었다. 국제사회의 용인이 있었기에 일본은 조선을 - 아니 대한제국을 당당히 자신의 일부로 편입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나서서 그같은 완고한 질서를 흐트리려 한다면 그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겠는가?
당연한 것이다. 당장에 내가 귀찮으니까. 내가 성가시니까. 나 자신이 피해자가 되니까. 생존권을 두고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의 시위로 인해 약속시간에 늦는 것에 분노하여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몸도 불편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보다 약속시간에 10분 일찍 도착하는 것이 개인으로서도 더 중요한 것이다. 하물며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는 그런 폭도들로 인해 자신의 형 켄지마저 잃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의지와 존엄을 지키고자 혀를 깨물어 보았자 지독스럽고 야만스런 모습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테러리스트다. 범죄자다. 폭도이고 불령한 조선인들이다. 그렇게 대우받았다. 우리가 위인이라 떠받드는 그들의 실상이다. 일본제국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질서 아래 그들은 단지 질서를 해치는 범죄자들에 불과했다. 차라리 각시탈이며 담사리를 비난하는 조선인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 것은 드라마이기에 보여지는 바람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로 인해 세상이 온통 시끄럽고, 더구나 독이 오를대로 오른 경찰들로 인해 일상이 침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불만을 가진 조선인 하나 보이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싸웠다. 왜?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하고자 하는 말이 있었다.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간절히 소망하는 말이었다. 별 것 아니었다. 그저 내 땅에서 내가 뜻한대로 차별받지 않고 억압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너무나 당연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일본인들은 그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억지로 돌려세워 들려주어야 했었다. 듣지 않으려는 것을 억지로라도 그 귀에 들어가도록 해야 했었다. 고작해야 구일본제국이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에 작은 상채기나 하나 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조차도 마침내 성가셔서라도 귀를 기울이는 시늉이나 할 수 있도록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했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서 우리 힘으로 독립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의 결과 열강들의 선택에 의해 한반도는 비로소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호를 갖는 주권국가가 되었다. 인간의 의지란 그렇게 강한 것이다. 더구나 존엄에 대한 의지란 무엇으로도 꺾을 수도 굽힐 수도 없다. 다분히 신파조인 장면들에도 새삼 마음이 울컥하고 마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처절했고, 그렇게 비참했다.
드라마 <각시탈>이 갖는 미덕이다. 독립운동이란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멋지지도 대단하지도 않았다. 이강토(주원 분)의 형 이강산도 경찰서 유치장에서 고통과 공퐁 짓눌린 나머지 짐짓 미친 척 벽에 배설물을 바르고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실제 일제강점기 국내 좌익계열 독립운동을 대표했던 박헌영이 1927년 경찰에 체포되어 겪었던 실화이기도 하다. 조단장(손병호 분)과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주의 폭력과 강압에 못이겨 변절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저 평화로운 후대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뒤늦게 그것을 평가할 수 있을 뿐.
고작 담사리 한 사람을 살리려 두 사람의 동지를 잃고, 그 전에도 호송중인 담사리를 구출하려다가 한 사람의 동지가 목숨을 잃었다. 애써 세운 계획자저 바로 코앞에서 들통나 한참 어린 경찰에게 그야말로 뭐맞듯 비참하게 구타당하고 있었다. 기무라 슌지에게 구타당하고, 심지어 고문까지 당하는 담사리 어디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영웅으로 여기는 독립투사의 모습이 보이고 있던가? 무력하고, 나약하고, 비루하고 비참하다. 그런데도 굽히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역시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영웅들인 때문일까? 인간의 자유의지야 말로 인간이 존엄한 이유라 할 때 그들이야 말로 인간이 존엄한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우리 자신이 존엄한 이유다.
더러운 것을 좋아한다. 비루한 것을 좋아한다. 한심하고 못난 것을 사랑한다. 진정한 존엄함은 그런 가운데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고귀한 뜻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이름없이, 존재조차 없이 스러져가고 있었겠는가? 그런 역사의 가려진 작은 편린을 보게 된다. 각시탈이라는 가면에 가려진 진실한 영웅들이다. 그래서 영웅은 각시탈을 쓴다.
상징적일 것이다. 콘노 코지(김응수 분)가 키쇼카이의 회장 우에노 히데키(전국환 분)가 보낸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일본의 수상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1932년 5월 15일에 있었다. 통칭 5.15사건이라 부른다. 군부의 비대화와 폭주를 저지하려던 수상에 대한 암살은 이후 구일본제국이 급속히 군국화하는 계기가 된다. 극단적인 과격파들이 득세하며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결과 구일본제국은 마침내 파멸에 이르고 만다. 역시나 제국주의자지만 합리적이던 콘노 코지의 죽음과, 군부를 견제하려다 암살당한 수상 이누카이 쓰요시와, 그리고 이누카이 쓰요시를 암살한 해군과 육군의 젊은 장교들에 대해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부르짖는 비밀결사 키쇼카이의 회장 우에노 히데키가 있었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일본을 패망케하고 우리에게 독립을 가져다 준 이들이다.
무섭기로는 콘노 코지가 더 무섭다. 그런 식으로 합리적으로 조선인을 대하려 했다면 어느새 조선인들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고 일본인들에 동화되어가고 있었으리라. 힘으로 찍어누르려 했기에. 폭력을 사용해 억지로 강요하려 했기에. 차라리 콘노 코지를 대신해 기무라 타로(천호진 분)가 총독부 경무국장의 자리에 오르고, 경무국장으로 승진한 기무라 타로를 대신해서 그보다 더 무라야마 요시오가 종로경찰서장이 된 것이 조선으로서는 다행스러울 수 있었다. 하기는 드라마이다 보니 드라마속 조선인들은 누구보다 민족의식까지 투철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죽은 사람을 기리는 자리에까지 나타나 상복에 먹물을 뿌리는 폭거야 말로 일본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할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되고 있을 것이다.
미남계가 사용된다. 총독을 유혹하여 미인계를 쓰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 우에노 주리 - 채홍주(한채아 분)를 상대로 오히려 이강토가 먼저 접근하며 키노카이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혹해온다. 얽히는 감정과 감정들. 여전한 목단(진세연 분)에 대한 기무라 슌지의 집착과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 목단과, 그리고 서로의 속내를 감춘 채 또다른 진심으로 엮이는 이강토와 채홍주가 찐득한 비극을 만들어낸다. 통쾌하다기에는 그들을 그렇게 몰아간 현실이 더 안타까운 때문이다. 기무라 슌지는 선량한 소학교 선생님이었고, 채홍주 역시 꿈많은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이강토와 목단도 더 행복해도 좋았다.
스케일이 커진다. 그런데 결국 그 커진 스케일이 각시탈 하나에 집중하고 있다. 영웅물의 한계다. 그래서 영웅물을 즐겨본다. 보다 단순하고 명확하다.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가 그 한 가지로 수렴된다. 일제강점기와 구일본제국의 역사가 각시탈 하나로 수렴되어 버린다. 그래서 얼마든지 판도 키울 수 있다. 쉽게 볼 수 있음을 감사한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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