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골든타임 - 최인혁의 일갈, 우리는 신도 법관도 아니야!

까칠부 2012. 8. 15. 08:48

아이러니일 것이다. 살아야 할 사람은 죽고, 죽어도 좋을 사람은 산다. 누구나 그리 생각할 것이다. 아동유괴범을 쫓던 경찰과 그 경찰에 쫓기던 유괴범 가운데 한 사람을 살려야 한다면 당연히 경찰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의사라는 직업의 엄중함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살린다. 그 말은 곧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는 죽도록 내버려둔다는 말과 같다. 선택이란 그런 것이다. 둘 모두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이라 부르지 않는다. 둘 모두를 살릴 수 없기에 선택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한 사람은 산다. 최소한 다른 한 사람에 비해 우선해서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기회로부터 멀어진다.

 

판단을 내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선택을 한다.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 것인가? 그것은 자칫 심판과도 닮아 있다. 누구에게 더 가치가 있는가? 누구의 목숨에 더 가치가 있는가? 누가 더 가치없는 삶을 살았는가? 이번에는 형사와 유괴범이었지만, 다음에는 대기업 오너와 일개 환경미화원 가운데서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누구를 살려야 하는가? 누구를 죽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그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그것을 판단하는가?

 

바로 그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것이 바로 의사인 것이다. 의사의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삶과 죽음이 갈릴 수 있다. 그런데 자의적으로 우선권을 부여한다. 가치를 부여하고 계량하여 판단한다. 의사 앞에서 모두는 한 줄로 서서 자신의 삶과 존재의 가치에 대해 묻게 된다. 평가받게 된다. 그저 감정적으로 한 번 쯤 해 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실제의 현실이다. 실제 삶과 죽음이 갈리는 현장이다. 의사가 판단을 내린다. 선택을 한다. 의사가 신이 된다.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무소불위의 존재가 된다.

 

물론 그럴 수 없다. 당연히 그래서도 안된다. 재판정에서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공적규범인 법에 근거해서다. 판사가 자의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도 아니다. 판결의 내용 또한 법이 규정한 바에 따른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이고, 그에 따라 주어진 권한이다. 하지만 의사는 무엇으로 판단을 내리는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무엇을 근거로 의사는 판단하고 선택을 하는가? 심판을 내리는가?

 

유괴범이라 했다. 아이를 유괴하여 아마 부모에게 협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사실인가? 범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재판부에서 판결을 내린 피의자 가운데서도 뒤늦게 무고함이 밝혀진 예가 현실에서도 적지 않다. 아예 죽고 난 다음에 피의자의 억울함이 밝혀진 예도 상당하다. 더구나 유괴를 했다는 것이 죽을 죄인가? 아이가 살아 있다면 단순유괴인데 현행법상 단순유괴범에게 사형까지 구형하지는 않는다. 어디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권리다. 그런데 지금 이민우(이선균 분)는 그 권리를 행사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선택하고, 살아야 할 자와 죽어도 되는 자를 나눈다. 그래서 죽은 이가 유괴범이 아니었다면? 유괴범이더라도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면?

 

판단은 재판부가 한다. 수사는 당연히 경찰과 검찰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행형은 관계당국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단지 의사는 사람을 살린다. 경찰과 검찰에서 수사를 할 수 있도록, 재판부에서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법이 정한 바에 따라 처벌할 수 있도록,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닌 이상 의사로서 사람을 살리는 임무에만 충실한다. 판단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는다. 심판하려 하지 않는다. 그만큼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치열한 현장에 의사는 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천부인권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보다는 의사로서 과연 그같은 판단을 자의적으로 내리는 것이 정당한가?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무거운 주제 앞에 의사에게 그같은 자격이 있는가를 묻는다. 결국 유괴범을 잡으려던 형사는 죽었고, 형사의 총에 맞은 유괴범은 살았다. 형사에게는 이제 갓태어난 아이까지 있었다. 그렇다고 최인혁(이성민 분)의 판단이 잘못되었는가? 최인혁은 처음부터 형사부터 살리려 했어야 했는가? 그래서 더 무겁다. 차라리 형사까지 모두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역시 담담하다. 결국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오히려 더 상태가 위중했던 형사가 끝내 목숨을 잃었는데 여전히 최인혁은 침착하기만 하다. 오히려 그 죽음에 원통해하며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민우 한 사람 뿐이다. 강재인(황정음 분) 역시 뜻밖의 형사의 죽음에 당황하는 눈치이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이런 억울한 죽음에 이처럼 냉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만큼 많은 환자가 죽어나가는 것이 중증외상센터인 것이다. 죽은 이를 동정하거나 연민할 여유조차 없다. 그것은 그들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생명이라는 무게일 것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묻는다. 유괴범과 형사가 있다. 누구부터 살려야 하는가? 감정이 시키는대로라면 형사다. 필자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따라서 그에 따른 아무런 책임도 없으니까. 그러나 의사는 다르다. 그들의 판단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린다. 그것은 어느 개인이나 직업군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린다. 당장 치료라 필요한 환자부터 손을 써서 살린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바만을 한다.

 

차라리 어떤 도덕적 의무라기보다는 의사로서 보다 편해지고자 하는 선택인지도 모른다. 굳이 죄를 판단하고 그를 심판하는 무거운 짐까지 의사가 짊어질 필요는 없다. 조금 더 이기적이 되어도 좋다. 의삭 되어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들만을 한다. 그 밖의 판단은 판단을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그 결과야 어떠하든. 할 수 있는 바만을 최선을 다해 한다. 형사의 죽음이라고 하는 결과에 짓눌린 이민우에 비해서도 그래서 최인혁은 한결 자유롭다. 자신은 의사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다. 무슨 미련이 남겠는가? 판단이란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하는 것이다. 그 순간 그의 판단은 최선이었다.

 

아무튼 이민우와 강재인이 냉전을 끝내고 다시 화해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환자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둘다 똑같았다. 이민우라고 유괴범이니까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강재인이야 당연히 형사 역시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강재인은 유괴범 쪽이 더 위급하다 판단했다. 이민우는 형사의 목숨 쪽이 더 가치있다 생각했다. 그리고 형사의 죽음이라고 하는 결과에 오히려 이민우보다 더 큰 마음의 짐을 짊어지게 된다. 이민우는 유괴범으로부터 유괴된 아이의 행방을 알아내 무사히 구출했다는 말에 구원을 얻는다. 이민우가 이익을 봤다. 그래서 웃는다. 의사란 어쩌면 참 잔인하고도 가혹한 직업일 것이다.

 

어째서 황세헌(이기영 분) 같은 의사도 현장에서는 필요한가? 정형외과에 견실한 후배가 있다. 3년째 펠로우를 하고 있는데 성품이며 실력이 무척 쓸만하다. 자리를 만들어주어야겠다. 직접 기조실장인 김호영(김형일 분)에게 넌즈시 이야기를 건네보고, 여의치않자 이번에 새로 만들어질 중증외상외과의 TO를 넘본다. 흔치 않은 않은 자리다. 많은 이들이 바라지만 쉽게 주어지지 않는 기회일 것이다. 그것을 황세헌은 자신의 정치력과 인맥으로 어떻게든 처리해 보려 한다. 이제 3년차 펠로우인 박성진(조상기 분)이 직접 나설 수는 없을 테니.

 

각각 자신의 과에 주어진 TO를 챙기고, 새로운 과가 생기게 된 데 따른 예산이나 다른 문제를 알아서 고민한다. 다시 말하지만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의사다. 그러나 의사로 하여금 환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병원행정가다. 과장들은 행정가도 겸한다. 중증외상환자들을 위한 트라우마 센터로 보내질 방성진의 반응과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해 본다.

 

드디어 중증외상센터가 생긴다. 아직 모든 것이 미흡하다. 하지만 출발이 중요하다. 이사장의 전폭적인 지원도 있다. 꿈을 향해 한 걸음 나간다. 함께 꾸어온 꿈이기에 매니저 신은아(송선미 분) 역시 잔뜩 들떠서 직접 최인혁에게 가운을 입혀주려 한다. 남녀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일 것이다. 고난을 함께 해 온 동지다. 러브라인은 너무 흔하다. 사랑보다 더 깊은 신뢰와 유대라는 것도 존재하는 법이다.

 

재미있다. 더구나 메시지까지 있다. 굳이 연설하려 하지 않는다. 주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맡긴다. 그래서 담담하다. 냉정하고 침착하다. 오히려 지켜보는 시청자가 스스로 나서서 생각하게 한다. 많은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머리가 상쾌해진다. 즐겁다.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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