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각시탈 - 인간이 존엄한 이유, '죽어도 그만둘 수 없어!'

까칠부 2012. 8. 16. 09:04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후회한다.

 

"몰랐어, 몰랐다구! 너랑 그런 사이인 줄 알았다면 죽이진 않았을 거야!"

 

죽이지 않았어도 되었다. 굳이 죽이기까지 하지 않았어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아예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풀어주는 것도 지금의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이라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였다. 담사리(전노민 분)의 처형현장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시위하던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쏘아 죽였다.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하지만 정작 그의 손에 죽은 오동년(이경실 분)은 그런 후회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이미 죽었으니 당연한가? 오동년의 양딸인 목단(진세연 분)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친아버지이기 이전에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해 싸우는 민족의 영웅일 것이다. 그런 영웅을 무참하게 광장에서 공개리에 처형한다고 한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저항하거나, 아니면 체념하고 지켜보거나, 저항하려 해도 모든 판단과 결정을 기무라 슌지와 일본제국주의의 경찰에게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그것이 권력인 것이다. 권력이 갖는 비대칭성이다. 일제강점기 식민지조선의 현실이기도 했다. 선택은 없다. 복종이냐? 아니면 저항이냐? 복종을 강요하는 일본제국주의 앞에 굴복할 것이냐? 아니면 끝까지 저항할 것이냐? 저항조차 사실 자신의 선택이라 할 수 없다. 굴복할 수 없어서 저항하는데 그것을 어찌 선택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당신도 언젠가는 바른 선택을 할 것이라고 믿어!"

 

그래서 연민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을 체포해 일본제국주의의 법정에 세운 이강토(주원 분)에 대해서조차 담사리는 연민하고 있었다. 키쇼카이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채홍주(한채아 분)에 대해서도 그래서 이강토는 연민의 감정을 드러내고 만다.

 

조선인으로서 조선과 조선인을 증오하고, 키쇼카이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과 조선인에 해를 끼치려 하는 그녀의 선택이 과연 그녀 자신의 선택이었는가? 과연 녀가 스스로 원해서 그런 길을,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겠는가? 이강토 자신도 다른 선택이란 없었기에 차라리 저항하기보다 굴종하여 출세하는 삶을 선택했었다. 그렇다고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느라 아버지와 형처럼 자신마저 죽거나 병신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니던가. 이미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일본인과 일본제국주의인 것이다.

 

조선인들이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여 무력투쟁을 시작하고, 그 와중에 채홍주의 아버지에게까지 찾아갔다가 거절하는 그를 무참히 살해하고, 졸지에 어려서 고아가 된 채홍주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기생의 삶을 선택한다. 그 기생의 삶에서 채홍주를 구해낸 것이 바로 양아버지 우에노 히데키(전국환 분)다.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증오 이전에 다시 이전의 비참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모든 비극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가? 채홍주는 과연 진정 자신이 원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기는 어느 시대에든 마찬가지다. 어느 사회에서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선택한다. 누군가는 판단하고 결정한다. 나머지는 단지 그에 따를 것인가의 여부만을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소시민이라는 말이 나온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고, 따라서 책임 또한 한정되어 있다. 다만 그렇더라도 폭력과 강요에 의해 그 선택 아닌 선택에 대해서마저 강제되지는 않는다. 소심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당장 기무라 슌지만 하더라도 그렇다. 일본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지배하는데 있어 아무런 선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는 일본인이었고, 무엇도 하지 않았음에도 일본은 이미 조선을 식민지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그는 선택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거역하고 형에게 반항하며 조선과 조선인에게 우호적인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주위의 조선인들이 종로경찰서장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기무라 슌지의 배경의 도움을 받고자 했었다.

 

다시 기무라 슌지가 대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 돌아와 조선과 조선인 위에 군림하는 삶을 선택했을 때에도 누구도 그를 제재하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기무라 슌지에게 주어진 권리였다. 조선인에게는 그와 같은 선택의 권리가 처음부터 주어져 있지 않았다. 복종과 그를 거부한데 따른 처벌만이 조선인에게 주어진 전부였다. 과연 조선인 가운데 기무라 슌지처럼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선택을 바꾸었다면 그 끝은 어떠했을까?

 

각시탈을 잡으라 한다. 각시탈을 잡지 않으면 채홍주 자신이 죽는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각시탈을 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바로 그 각시탈이 그녀가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이강토였다. 비록 이강토의 마음이 자신이 아닌 목단에게 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사랑을 위해 자신이 죽을 것인가? 아니면 자기가 살자고 사랑을 희생할 것인가? 그 배후에는 키쇼카이의 회장인 양아버지 우에노 히데키가 있다. 공포다. 밀려나는 것에 대한 공포. 그리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다. 심지어 죽을 수 있다. 그녀는 계속 절망이라는 이름의 벼랑으로 내몰리게 된다. 차라리 그나마 만만한 이강토를 붙잡고 사정하고 말 정도로.

 

그렇더라도 멈출 수 없다. 현실을 깨달아 버렸다. 자신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오로지 일본제국주의와 일본인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선택마저 결정되어 버린다고 하는 사실을.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니가 기무라 켄지에게 죽고, 형마저 기무라 켄지와 싸우다가 자신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이강토 자신이지만, 이강토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도록 한 것은 바로 그같은 참혹한 현실이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선택하고 만다. 꿈에서 깬 자는 꿈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매트릭스의 세계로부터 벗어난 네오는 다시 그 안에서 적응해 살아갈 수 없다.

 

매트릭스의 선택일 것이다. 이미 타인에 의해 결정된 평온함을 관성처럼 계속해서 누릴 것인가? 아니면 그 안으로 적극적으로 편입될 것인가? 그도 아니면 스스로 그 꿈으로부터 깨어나 싸우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차라리 죽기를 결심했다. 차라리 채홍주에게 정체를 들켜 끝끝내 일본경찰들에 의해 체포당해 죽임을 당하더라도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존엄이다. 살아있는 인간의 선택이다. 담사리와 상해 임시정부의 사실상 수반인 양백(김명곤 분)이 위험을 무릅써가며 조선으로 들어오려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싸우는 삶을 살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존경받아 마땅한 삶을 그들은 스스로 선택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들이 있었다. 일본을 배워야 한다. 일본과 타협해야 한다. 일본을 설득해야 한다. 물론 그 또한 선택의 하나였다. 너무 강했다. 만주를 침략하고, 중국과 전쟁을 일으켜 한순간에 중국대륙의 상당부분을 차지해 버린 일본의 저력은. 많은 이들이 절망했다. 그리고 그 절망에 굴복했다. 일본이 이처럼 강하니 정면으로 부딪혀 싸우기보다는 일본의 온정과 배려에 기대야 한다. 그리고 일본이 강한 비결을 배운다. 그래서 민족지도자라는 이들이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자원해서 일본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장으로 나가라 선동하고 있었다. 일본의 전쟁에 기여함으로써 일본의 인정을 얻어내자. 그리고 일본이 강한 이유를 그 과정에서 배우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기까지 상해임시정부는 사실상 와해상태나 다름없었다. 자금도 부족하고 세력도 없었다. 영향력은 더더욱 없었다. 해외의 독립운동은 뿔뿔이 흩어져 구심점이 없었고, 국내에서도 일본제국주의의 압력이 더욱 거세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역시 선택 아닌 선택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끝까지 저항하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폄하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전범이라는 것과 별개로 그들 역시 나름의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당시는 옳다고 믿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보는 듯하다. 차라리 직접적이다. 세계챔피언이 된 권투선수를 총독부에서 내선일체의 상징으로서 선전하고자 카퍼레이드를 열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일어나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그때 카퍼레이드를 하던 선수는 가슴의 일장기를 떼어낸다. 선수와 그것을 보도한 언론 모두가 고초를 겪는다. 일본의 국적을 가지고 챔피언이 되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조선인이다. 역시 현실에 순응하기보다는 싸우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사소한 것인데 비장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당시의 현실을 말해준다. 정말 사소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기무라 슌지가 마침내 이강토의 정체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이강토의 연기가 너무 지나친 것이 화가 되었다. 이강토가 그렇게 아무일없이 굽히고 순종할 인물이 아니다. 기무라 슌지는 그런 이강토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런데 고이소(윤진호 분)의 거짓말과 무라야마 요시오(김명수 분) 서장의 폭력에도 이강토는 너무나 쉽게 자신을 굽혔다. 목단과의 만남 또한 그의 의심을 부추긴다. 채홍주 역시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데 서툴렀다. 각시탈을 잡기 위해 모두가 출동한 경찰서에서 급하게 들어오던 이강토와 기무라 슌지가 마주친다.

 

스케일이 커진다. 실제 역사에서 보자면 백범 김구일 것이다. 백범 김구가 조선으로 들어와 일을 꾸미려 한다. 아마 동진은 여운형이기 쉬울 것이다. 각시탈이 백범과 만난다.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차라리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크게, 화려하게 한 번 터뜨려 보았어도 의미가 있었으련만. 역사와 다르더라도 통쾌함이라는 것이 다르지 않는가 말이다.

 

서로를 보며 글썽이는 채홍주의 눈물과 이강토의 눈물, 그리고 목단의 눈물 앞에 혼자서 후회하는 기무라 슌지, 그런 시대를 살아갔다. 지금으로서는 차마 상상조차 되지 않는 참혹한 시대다. 그래서 재미있다. 비극이 드라마를 만든다. 비극이 재미를 만든다. 하루가 길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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