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아랑사또전 - 전통적이지만 색다른, 새로운 한국적 판타지를 향하여...

까칠부 2012. 8. 16. 10:09

아마 고려말 처음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던 유학자 안향이 상주판관으로 있으면서 유교의 관점에서 괴력난신을 섬기던 무속인들을 일소하던 과정이 민중들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이었다. 무속인들과 영합하던 지방관들은 귀신의 위세에 눌린 것으로, 그리고 그런 무속인들과 맞서던 안향은 그 위세를 이겨낸 것으로. 실제 안향은 무속인들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들의 위세를 꺾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어느새 민간을 거치며 부임하는 첫날 귀신에 놀라 목숨을 잃는 지방관들과, 그런 지방관들의 죽음으로 인해 아무도 부임하려 하지 않는 고을로 스스로 자원해서 마침내 귀신과 마주하여 억울함을 풀어주는 목민관이라는 전통적인 설화의 구조로서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당장 모르는 사람이 드물 고전소설 <장화홍련전>만 하더라도 비슷한 구조를 통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장화와 홍련의 한을 풀어주고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만 다를 뿐 비슷한 이야기를 필자 자신도 여럿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확실히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이야기구조와 드라마 <아랑사또전>은 기본적인 전제가 다르다. 일단 <아랑사또전>의 사또 은오(이준기 분)는 유학자라기보다는 무속인에 더 가깝다. 귀신을 볼 수 있고, 귀신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만지는 것까지 가능하다. 다른 지방관들과 다르게 그가 귀신을 보고서도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귀신의 존재 자체가 그의 일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귀신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을 넘어 귀신인 아랑(신민아 분)과 지속적으로 소통해야 하는 은오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원래 유교적 가치에서 귀신이란 매우 부정한 것이었다. 살아있는 것이 아닌데 산 사람 사이를 떠도니 그것이 온전할 리 없다. 그래서 괴력난신이다. 괴이하고 이상한 것이다. 부정한 것이다. 다만 아직 사람이던 시절의 억울함이나 원한 같은 것은 대신해서 풀어주어 제 갈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 한다. 그렇더라도 귀신과 벗하여 그와 소통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치관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은오는 유학자가 아니다. 심지어 서얼이기까지 하다.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 귀신 또한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

 

이야기는 일단 자신을 저버리고 떠난 어머니를 찾으려는 은오와 얼떨결에 죽어 귀신이 된 자신의 사연을 밝히려는 아랑이라는 두 개의 큰 줄기를 중심으로 얼개를 짜가려는 듯하다. 전국을 떠돌며 어머니의 뒤를 쫓던 은오가 밀양고을에 사또가 되어 머물고, 은오를 밀양의 원님으로 만든 아랑이 그를 통해 자신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려 한다. 아마도 아랑의 죽음과 인근의 세도가인 최대감의 아들 주왈(연우진 분)이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랑의 혼령을 쫓는 저승사자들과 아랑이 쫓고 있는 죽음의 진실, 그리고 사또가 된 은오의 활약, 더불어 주왈과 그 배후의 최대감과의 대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소하지만 맛깔나는 에피소드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두 개의 기둥줄거리만 가지고는 나머지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한다.

 

전통적이지만 전통적이지 않다. 신선하지만 결국 익숙한 것이다. 드라마는 바로 지금 21세기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요구와 21세기의 가치관, 그리고 21세기의 방식, 단지 그것이 담기는 형식이 바로 익숙한 전통적인 것이다. 아랑도 은오도 그래서 무척 현대적이다. 굳이 현대가 아니더라도 어느 시대에 갖다 놓더라도 어색하지 않을 그런 캐릭터들이다.

 

판타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의도다.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하는가다. 무엇보다 허구의 판타지를 대중이 납득할 수 있도록 현실에 밀착시키는 시도 역시 중요하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아랑에 비해 은오의 캐릭터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조금 더 지켜본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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