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을에 원님들이 연이어 죽어나가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부임한 원님마다 첫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가니 나중에는 나중에는 아예 가겠다는 사람마저 나타나지 않아 고을이 원님조차 없이 텅 비어버릴 지경에 놓이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원님이 되겠다 자청한 사람이 있어 불안반 기대반으로 그에게 맡겨놓았는데,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원님으로 부임해 첫날밤을 보내려는 그의 앞에 귀신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원래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여전히 사무치는 억울함을 어떻게든 풀어보고자 원님들을 찾은 것이었는데 그만 담이 약한 원님들이 지레 그 모습에 놀라 죽어나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같은 귀신의 사연을 들은 원님이 그 억울함을 풀어주자 더 이상 원님이 죽어나가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이야기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드라마 <아랑사또전>에서와 같이 길가던 선비를 납치해서 억지로 원님이 되어 하룻밤을 보내도록 하는 것도 있는가 하면, 원님이 아닌 왕이 그 억울함을 듣는 주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천 리나 떨어진 임금의 꿈에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임금이 그 억울함을 풀어주더라는 이야기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나타나는 귀신이야기의 유형일 것이다. 요즘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강도를 만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가 자신이 죽은 이유를 경찰서장을 찾아가 하소연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검찰을 찾아가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설명하고 자신을 죽인 이를 처벌해달라 요구한다. 귀신이 민원인이 된다. 고소인이 되고 고발인이 된다. 원래 귀신이란 가진 한 만큼이나 복수심도 강해 자신이 직접 모든 원한을 풀려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전통적인 이야기속 귀신들은 오히려 공권력에 의지하려는 경우가 많다.
하기는 그와 비슷한 구조가 현대의 창작물에서 제법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특히 헐리우드의 작품 가운데 아주 그와 유사한 구조가 곧잘 보인다. 이를테면 미군이다. 군대다. 어지간하면 군대가 출동한다. 어떤 재해나 치명적인 위협에 대해서도 미군은 항상 가장 첨단에 서서 그것을 해결하려 노력한다. 미국인의 군대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필요한 상황이 발생되면 미군은 반드시 미국인을 지키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같은 이유다. 어째서 원님인가? 어째서 귀신은 고을의 수령을 찾아가는가? 몇 사람이나 되는 수령들이 귀신으로 인해 놀라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어째서 끝까지 수령들을 찾아가 억울함을 하소연할 마음을 먹게 되었는가? 결국은 그것이 귀신에게도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고을의 수령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하면 수령이 반드시 그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그것이 귀신이 개인적으로 억울함을 풀려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적일 것이다.
죽은 사람만이 아니다. 산 사람의 억울함에 대해서도 다른 문화권에서와 같이 길가던 나그네가 우연히 사연을 듣고 대신해서 억울함을 풀어주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는 그다지 찾아보기 힘들다. 탐관오리의 패악을 징치하는 것도 역시 조정에서 파견한 암행어사의 역할이다. 굳이 개인이 직접 실력을 키워 복수에 나설 필요 없이 그 역할을 충실히 공권력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당시 조선사람들에게 있어 공권력이란 가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19세기까지 조선은 세계에서도 가장 치밀한 행정조직을 갖춘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의 역대왕조에서도 불가능했던 행정단위의 말단에까지 지방관을 파견했던 몇 안 되는 나라가운데 하나였다. 더구나 조선에는 성리학이라고 하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있었다. 목민관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고을에 파견된 지방관에게는 사법과 행정, 군사에 있어 거의 무소불위의 강력한 권한이 주어지고 있었다. 유럽의 동화에서 왕자님과 공주님을 만나는 것처럼 조선사람들에게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지방관이야 말로 그들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말했듯 미군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가 바로 그와 아주 유사하다.
항상 가까이에서 지방관의 존재를 느낀다. 지방관을 통해 중앙정부의 존재를 느낀다. 중앙정부의 수장인 왕의 존재를 느낀다. 역시 사회의 말단에서까지 왕의 존재를 느끼고 그에 대한 충성심을 자각하고 있던 근대국민국가가 나타나기 전까지 매우 드문 경우 가운데 하나였다. 오죽하면 19세기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말미암아 여러차례 민란이 일어나고 있을 때조차 문제가 된 지방관에게 제제를 가하기보다 고이 풀어줌으로써 조정에 자신들의 뜻을 전하고자 시도하고 있었겠는가 말이다. 프랑스대혁명이나 러시아혁명에서도 물론 마찬가지였지만 동학혁명 당시에도 농민들은 왕에 대한 충성을 가장 앞에 내세우고 있었다. 부패한 관리들이 왕의 총명을 해치는 것이지 왕이 자신들을 저버린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왕이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몽진하는 사이에 경상도초유사로 파견된 김성일은 경상우도의 행정력을 거의 복원하고 있었다. 세금을 걷고, 왕명을 전하며, 백성들을 병사로 징집했다. 이듬해인 계사년에 이르면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마저 거의 관군에 편입되고 있었으니, 사실상 일본군의 진격로였던 경상도마저 온전히 조선조정의 통제 아래 있었던 셈이었다. 심지어 의주에 몽진해 있는 그 순간에조차 각지에서 올라온 장계를 통해 조정에서는 조선이 보유한 병력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으니 그 수가 물경 17만 4천에 이르고 있었다. 다만 그같은 밀도높은 행정력에 뛰어난 지방관만 파견되어 와 준다면.
아니 실제 어느 정도 부정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지방관 자신들도 원래 유학자로서 선정을 베풀려 제법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정당히 부패했고, 적당히 청렴하고 강직했다. 수백년을 이어온 성리학적 가치에 기반한 도덕적 지배의 성과였다. 지배계급은 사대부에게는 강력한 도덕적 책임과 의무과 강제되었고, 그에 따른 사대부의 도덕적 우위는 민중을 지배하는 명분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것이 백성들의 기층에까지 파고든 결과가 바로 지방관에 대한 강력한 신뢰와 의존이었다. '장화'와 '홍련'이 굳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려 지방의 수령을 찾아간 이유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을의 원님이라면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다.
다만 드라마 <아랑사또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라면, 아랑(신민아 분)이 은오(이준기 분)를 만나는 것은 그가 아직 사또가 되기 전이었다. 관리로서 그를 의지하여 찾아간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귀신인 자신을 볼 수 있고 자신의 말 또한 들을 수 있으니 그를 의지하려 찾아간 것이었다. 오히려 아랑에 의해 은오는 사또가 되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라고나 할까? 예전처럼 전적으로 사또를 믿고 귀신이 찾아가 하소연하는 구조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요즘에는 차라리 귀신에 의해 사또가 되어 개인적으로 문제를 푸는 한량의 모습이 더 어울린다.
흥미로울 것이다. 어째서 귀신은 고을의 수령을 찾아가는가? 원님을 찾아가 사또를 부르는가? 몇 번이나 원님들이 죽어나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찾아가 사또를 부르는가? 개인적인 복수가 없다. 그래서 액션활극이 없다. 무림의 고수가 출현하기에는 가장 말단의 단위에까지 관리가 파견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귀신조차 조정이 파견한 수령들을 믿었다.
드라마는 물론 다르다. 시대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 사고방식이 다르다. 재미있어하는 것이 다르다. 이야기는 시대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창작이란 그같은 무의식의 투영이다. 전승은 집단에 의해 가다듬어져왔다. 드라마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유일 것이다. 21세기가 그려내는 전통은 또 얼마나 달라져 있는가? 재미있다.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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