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 가족이라고 하는 인연에 사로잡히다.

까칠부 2012. 8. 20. 07:59

인연이란 비롯됨이다. 말미암음이다. 비롯됨으로 말미암고, 말미암음으로 비롯된다. 그렇게 켜켜이 쌓이고, 알알이 얽힌다. 정이라는 것이다. 정이란 시간이다. 쌓여 온 시간이다. 그로 인해 비롯되고 말미암은 모든 것들이 기억속에 자신을 옭아맨다. 자르려야 자를 수 없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바로 그것이 가족이다. 그렇게 함께 지나온 세월이 그들을 가족으로 만든다.

 

"엄마"라는 한 마디. 그리고 그로부터 떠오르는 기억. 이제껏 방귀남(유준상 분)은 단 한 번도 엄청애(윤여정 분)를 엄마라 부른 적이 없었다. 어머니라고만 불렀다.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필자가 어려서 어디서 들었는지 엄마라 부르면 안된다고 어머니라 부르기 시작한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리 서운했더란다. 마치 자기 자식이 아닌 것 같다고. 자식은 부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고 떼를 쓰는 것이다. 자식에게 필요한 존재일 때 비로소 부모는 부모가 된다. 그런데 방귀남에 대해서는 그같은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억이 돌아왔다. 아들이라 불리우던 남자에서 아들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다 싫다고 놓아두고 떠나왔다. 다 성가시고 귀찮아서 버려두고 떠나왔다. 그런데 놓아둔 것들이 자꾸 자신을 찾는다. 버려둔 것들이 자꾸 자신을 찾아온다. 역시나 막내가 찾아온다. 큰 딸도 찾아온다. 남편도 찾아온다. 하필 남편의 손에는 막내를 가졌을 때 그토록 먹고 싶었던 딸기가 들려 있었다. 그것이 그리 미안했었던 모양이다. 그 마음을 알 것 같다는 것이 어쩌면 더 억울하고 화가 난다. 익숙해져 있다. 남편이라는 남자에게. 떠나는 것조차 이제는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굳이 떠나려 한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굳다는 것일까? 얼마나 날이 서도록 시린 사연이 있다는 것일까?

 

사람의 관계란 더구나 마음의 빚을 쌓아가는 것이다. 미안해하고,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그러면서 마음의 한 자락을 건넨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마음을 붙잡는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서로 무에 그리 그립고 안타까울까? 아무런 죄지은 것이 없다면 무엇이 그리 아쉽고 간절하겠는가?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는 서로 구속할 아무 것도 없는 법이다. 미안할 일이 없는 사이라면 헤어짐 역시 쿨하고 깔끔한 법이다. 미안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럼없었다는 뜻이다. 미안할 정도로 그동안 거리없이 대해왔다는 뜻일 것이다. 새삼 시어머니 엄청애(윤여정 분)는 차윤희(김남주 분)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어떤 깊은 동질감을 나눈다. 엄청애의 시어머니(강부자 분)가 엄청애에 대해 느끼는 어떤 간절함이다. 미안하니 불쌍하고, 죄스러우니 마음이 쓰인다. 그것이 또한 엄청애 자신에게도 미안하고 죄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굴레다. 훌훌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다면. 그래서 자유롤 수 있다면. 자유가 결코 자유가 아니다. 여전히 그곳에 구석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곳에 마음의 큰 부분을 놓아두고 온 것을 느낀다. 오히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온 지금이 엄청애에게는 더욱 외롭다. 굳은 결심을 하고 야멸차게 등돌려 떠나왔음에도 그것이 더 서럽고 아프게 느껴진다. 그리 밉고 꼴보기 싫어도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자신도 역시 완전해짐을 느낀다. 마음이 놓이고 비어 있던 것이 가득 차는 것을 느낀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녀도 자유롭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그녀에게 가족이란? 남편과 시어머니란? 둘을 따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남자란 아들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만희(김영란 분)의 아들 차세광(강민혁 분)에 대한 집착이나 엄청애가 방귀남에게 느끼는 거리감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다. 딸 또한 자기의 딸이며 남편의 딸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결국 찾아와 의지하는 것은 자신의 동생들이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돌아간 부모다. 모든 연락을 끊은 자신으로 인해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을 하는 한심한 남자가 그녀의 남편이다. 온전히 미워할 수조차 없는 그런 남자다.

 

엄청애가 결국 찾은 곳이 교회라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종교란 말 그대로 거대한 가부장적 구조다. 가족이다. 그래서 종교는 용서를 가르친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신은 아버지이며 어머니다. 같은 신도들은 형제이고 자매이며 자식이다. 그 품에서 엄청애는 온전히 기대며 기도한다. 용서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기를. 가족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기에 자신이 아닌 신에게 대신 용서를 구한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용서를 신이 대신 해주도록 부탁한다. 문득 짐작해 본 엄청애의 기도의 내용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기도는 그녀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한 것이었을 게다. 모두가 자신을 위한 기도였을 것이다.

 

남자란 동물이다. 그래서 남자는 동물이다. 철들면 염한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철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뭐 좋은 술이라고. 몸에 좋지도 않은 술을 가지고 누가 더 잘 마시네 많이 마시네 내기까지 한다. 짐짓 허세까지 부린다. 와인 한 병에 저리 인사불성이 되어 버리는 모습이 차마 귀엽기까지 하다. 하기는 남자치고 그렇게 술 가지고 객기 부리다가 사고 한 번 쳐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 않을까?

 

한국사회가 유독 술에 관대한 이유다. 술로써 아이가 되고 술로써 사람을 사귄다. 다만 그 때문에 사고도 치고 사람도 잃는다. 차윤희야 법적인 부부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그런 추태를 보였는데도 가만 있는 것은 방이숙(조윤희 분)의 마음이 그만큼 천재용(이희준 분)을 향해 각별하다는 뜻일 게다. 남자가 보기에도 추해 보였다. 방이숙의 열등감을 위해서도 그의 대단한 배경같은 건 그 순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방귀남과도 함께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셨으니 돈독해진 것이 있을 것이다. 봄날은 천재용에게도 찾아온다. 벌써 늦은 여름이다.

 

방일숙(양정아 분)도 많이 달라졌다. 당당해졌다. 자신감이 넘친다. 다만 그것이 오버스럽다. 갑작스레 윤빈(김원준 분)에게 말을 놓기 시작한다. 더 이상 윤빈은 그녀에게 스타가 아니다. 아이돌이 아니다. 인간이다. 남자다. 비로소 두 사람 사이에 로맨스가 생겨날 여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스타로서의 윤빈이라면 여전히 거리를 두어야겠지만 남자라면 가까이 있는 시간 만큼 그 거리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하필 방일숙이나 윤빈이나 서로에게 첫키스의 상대다. 윤빈에게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방일숙으로서는 무척 아쉽기만 하다.

 

남남구(김형범 분)에게도 이제는 당당하다. 하고 싶은 말을 당당히 한다. 처음으로 어른이 되었다. 처음으로 어른이 되어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마냥 의지하며 그것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던 이전의 방일숙은 없다. 명함이란 어쩌면 그런 의미다. 자기 이름이다. 이름이란 존재다. 그 존재를 각인한다. 자신감이란 바로 그같은 자존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시 어떤 상황에 내몰리더라도 절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순간 방일숙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그다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윤여정의 오열하는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자연스럽지 않다. 그 자연스럽지 않은 부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실제의 격정하는 오열을 그대로 보여준다. 절로 꾹꾹 눌러 쌓은 서러운 한을 느끼게 된다. 그 무거움을. 그 서러움을. 그 단단함을. 장용은 단지 무뚝뚝할 뿐이다. 자신도 모르게 남자는 여자에게 죄를 짓는다. 남편은 아내에게 죄인이 된다. 그것을 자신만 모른다.

 

이제는 방귀남이나 차윤희나 완전히 가족의 일부가 되어 있다. 더 이상 주인공과 조연의 구분이 없다. 모두가 주인공이다. 방귀남과 차윤희가 속한 가족 전부가, 그들과의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이 곧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넝쿨이 두 부부의 주위를 타고 조이며 자란다. 떼려도 뗄 수 없을 만큼 모두는 하나가 되어 있다.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다. 재미있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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