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 네러티브가 아닌 내레이션, 마음이 급하다.

까칠부 2012. 9. 3. 10:09

묘사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사람은 서술을 하고, 그 서술이 바닥에 부딪혔을 때 주장을 한다. 네러티브와 나레이션의 차이다. 네러티브란 기술이다. 표현이다. 풍부함이고 깊이다. 나레이션이란 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노골적인 의도다. 선전이고 선동이다.

 

필자가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라는 드라마를 무척이나 좋아한 이유였다. 노골적이지 않았다. 선동적이지도 않았다. 일상의 언어들을 통해 전해지는 전혀 가벼지 않은 메시지가 있었다. 그 어쩌면 심각할 수 있는 메시지들이 일상의 가벼움 속에 아무렇지 않게 녹아들어 스며들고 있었다. 절묘하다. 사람을 편하게 이완케 하면서도 항상 가벼운 긴장 속에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훌륭하다.

 

하지만 역시 그조차 한계에 이른 모양이다. 같은 제작사 여성PD들을 모아놓고 왕언니 차윤희(김남주 분)가 말한다. 어떻게 하자. 이렇게 하자. 이렇게 해야 한다. 여성PD들은 마니 마네킹마냥 그저 차윤희가 하는 말에 일방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다. 어떤 상호작용 없이, 그를 통한 어떤 이야기나 장면 없이, 그저 차윤희를 통해 들려지는 메시지만이 존재한다.

 

더 이상의 여유가 없다. 드라마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간단히 몇 마디 말로써 압축해서 일방적으로 시청자들에 들려주려 한다. 그것은 드라마가 아니다. 연설이고 강의지. 선전이고 선동이다. 공감과 감동의 드라마는 아니다. 하기는 그래서 지환이를 입양하기로 결심했을 때도 차윤희는 어느 자원봉사를 온 학생의 어머니를 향해 일장연설을 들려주고 있기도 했었다. 지환이와 차윤희 사이에 어떤 유기적 공감이 그를 아들로 맞아들이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차윤희의 일방적인 선택이고 결심이었다.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가엾다. 불쌍하다. 위해주고 싶다. 정작 입양될 지환이의 입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의 역할이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지환이를 자신의 아이로 맞아들이는 것이 기쁘다. 자신이 지환이의 엄마가 되고, 지환이가 다시 자기의 아들이 되는 것이 무척이나 참을 수 없이 행복하다. 그같은 기대가 있다. 지환이가 있어 행복하다고. 그것이 자식 아니던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쁘기 때문이다. 그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늙으신 어머니에게 발을 씻기는 효자의 이야기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자식을 위한 것이 또한 부모의 기쁨이고 행복이기도 하다. 그러면 차윤희에게 지환이가 자식이 되어 돌아오는 기쁨과 행복이란 무엇인가?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관계라는 것이 진정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입장에 놓인 지환이는 어떨까? 그저 일방적으로 차윤희 부부로부터 받기만 하고 있다. 지환이는 진정 차윤희 부부의 자식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의지나 신념이 엿보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굳이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가족이다. 가족이란 서로 믿고 의지하며 기쁨과 행복을 얻는 관계다. 가족을 만들고 싶다. 다른 이를 행복하게 만듦으로써 자신도 기쁨을 얻고 싶다. 차라리 방이숙(조윤희 분)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많이 낳고 싶어한다. 아이들로 북적대는 그런 가정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녀라면 새삼 지환이와 같은 아이를 보고 가족으로 맞아들이고 싶다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차윤희에게는 그만한 최소한의 계기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단지 불쌍하다. 가엾다. 길거리 애완동물을 거둬들이는 차원이 아닌 것이다.

 

섣부르게 입양을 결심하고는 이내 파양하고 돌려보내는 예가 현실에서도 적지 않다. 파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가족이 되지 못하고 겉도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시기에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결국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동기를 부여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이제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자연스럽게 동기가 될만한 사건을 짜맞추기에는 너무 여유가 없다. 다행히 드라마는 이후의 내용은 보여주지 않고 이제 다음주면 끝이 난다.

 

자신들의 아이 대신이 아니다. 태어났어야 할 아이를 대신해 들이는 것이 아니다. 굳이 방귀남(유준상 분)과 닮을 필요도 없다. 굳이 닮은 점을 찾아 혈연의 정을 끌어냈어야 했을까? 그만큼 부담스럽다. 그렇게 어렵다. 입양이 쉽지 않은 이유다. 가족이란 혈연에서 멈춘다. 그를 깰만한 동기를 차윤희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다. 방귀남의 양부모들은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 미묘한 불균형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을 해친다.

 

방이숙과 천재용(이희준 분)의 사이가 위태위태하다.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해 버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치러야 할 통과의례일 것이다. 서로의 예민한 곳을 건드린다. 부딪히고 충돌한다. 갈등한다. 인연이 한 번 쯤 서로 싫어서 헤어져 보지 않고는 연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싫은 부분까지도 사랑한다. 불편한 부분까지도 끌어안는다. 천재용은 방이숙을 더 이해해야 한다. 방이숙은 천재용은 물론 그런 자신까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를 위해 싸운다. 그를 위해 다툰다. 서럽게 눈물도 흘려본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도 되어본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런 서로를. 그런 자신을. 그렇게 조금씩 서로에게 맞춰가며 자신을 바꾸어간다. 천재용은 방이숙의 열등감을 이해하고, 방이숙은 천재용의 다른 환경을 받아들인다. 서로 다른 방식을 맞추어간다. 그것이 바로 흔한 행복한 결말이 아니던가. 헤어지거나, 아니면 결혼하게 되거나.

 

윤빈(김원준 분)과 방일숙(양정아 분)의 관계는 지금 이대로도 좋을 듯 싶다. 남녀관계란 반드시 서로를 이성으로서 인식하는 관계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대 인간의 신뢰로도 좋다. 팬과 스타, 매니저와 연예인, 오히려 사랑이 식으면 끝나버리는 흔한 연인사이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보다 더 굳고 단단하게 이어지는 인간적 유대가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남자에 의지하지 않는 여성 방일숙으로서. 그리고 그런 방일숙의 스타 윤빈으로서. 사랑에 빠지는 결말은 너무 흔하다. 값싸 보인다.

 

차세광(강민혁 분)과 방말숙(오연서 분)의 관계는 오히려 주변으로 밀려나 버렸다. 누구도 그들의 사이에 대해 전혀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충격적인 고백을 하려 하지만 그때마다 주위에 밀려 버린다. 원래부터 그런 설정이었을 테지만 그동안 너무 드라마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너무 떠밀려나 있는 모습이 차마 애처롭기까지 하다.

 

방정배의 실직에 이은 가족의 반응들이 너무 도식적이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원래 동떨어져 있는 가족이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당장 중요한 수입원이 사라졌는데 어쩌면 저리들 걱정없다는 표정들일까? 그것이 가족이기는 하지만 현실의 가족은 아니다. 조금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나마 방장군(곽도연 분)으로 인해 적지 않은 수입이 생겼다. 학교에서는 열등생인 방장군이 드라마의 이미지를 이용해 학습지 광고모델을 한다.

 

힘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는 한계다. 나름 연장까지 해가며 넉넉하게 분량을 꾸렸지만 그래도 채우다 보면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다. 남거나 급하다. 남으면 남아서 늘어지고, 급하면 급해서 허술하다. 수미일관하기가 그래서 무척 어렵다. 아쉽지만 인정한다. 슬프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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