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 부른다. 미혹됨이 없다는 뜻이다. 허투루 흔들리지 않는다. 좋은 뜻이기만 한가면 사람이 둥글어진다는 뜻이다. 깎이고 깎여 더 이상 모난 구석 없이, 그래서 더 이상 깎이고 부서질 부분 없이 둥글게 완성된다는 뜻이다.
어차피 중증외상센터따위 자기와 인연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 중증외상센터 없이도 다른 과의 눈치를 보아가며 지금껏 많은 외상환자를 치료해 왔다. 아니 아예 병원을 그만두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위험한 전장으로 자원해 가려 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중증외상센터가 생기든 말든. 해운대세중병원에 헬리콥터가 지원되든 말든. 그래서 신은아(송선미 분)가 떠난다고 해도 감히 말릴 생각조차 갖지 못한다. 그녀를 위해 약속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지는 있다. 의지도 있다. 무엇이 옳은가를 안다. 무엇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가도 안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어낼 의욕이 이미 사라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인간에게도 에너지란 결국에는 소모되고 마는 한정자원에 속한다. 언젠가는 고갈되고 만다. 지칠대로 지쳐 메말라 있는 최인혁(이성민 분)의 표정이 그것을 말해준다. 차라리 울음을 토하는 것 같다. 어린아이처럼. 사정하듯. 떼를 쓰듯. 그럼에도 결국에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사람은 어른이 된다. 원망하게. 아무 문제없이. 부딪히거나 부대끼는 일 없이. 성실하고 착한 어른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어디서나 아이들이란 되바라지다. 건방지고 버릇없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대들고 사고치고 문제를 일으킨다. 아이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돌아볼 뒤가 없다. 그래서 앞만을 바라본다. 오로지 위만 바라본다.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무엇을 진정 하고 싶은가를. 어른들이 이미 경험하고 마침내 포기하고 만 그것들까지 아이들은 경우없이 들추고 들쑤신다. 피곤하고 불편하다. 다만 과연 그 피곤함과 불편함을 참고 인내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미연에 그 싹을 잘라 버리는가.
구르기를 멈춘 돌에는 이끼가 낄 수밖에 없다. 더 이상 흐르지 않고 고인 물은 조금씩 썩어가기 시작한다. 더 이상 위도 보지 않는다. 앞도 보지 않는다. 주위만을 본다. 자신만을 본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최인혁도 다른 과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차이라면 다른 과장들의 경우 그같은 체념과 좌절이 현실과의 타협으로 나타났다면, 최인혁의 경우는 현실에 대한 냉소와 외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할 것이다. 그의 중증외상에 대한 집요함도 어떻게 보면 절망스런 현실에 대한 나름의 응석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차피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을 것을 아는.
의사로서, 그리고 병원행정가로서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그 길을 찾아가는 이민우(이선균 분)와 강재인(황정음 분), 그리고 어느새 자포자기하게 되어 마지막 아집만이 자존심처럼 남은 최인혁, 더불어 더 이상 의사로서보다 인간이기를 원하는 과장들과 그들의 욕망을 들쑤시는 강재인의 친척들까지. 그래서 군상이라 하는 것일 게다. 그런 가운데 젊은 인턴들도 조금씩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최소한 그 자리에서 이민우처럼 최인혁의 이름을 입밖에 내서는 안된다는 사실 정도는 그들도 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인턴 가운데서도 가장 나이가 많을 텐데도. 드라마를 많이 봐서일까? 오로지 환자를 살리는 일만을 생각하는 이민우의 모습은 어린시절 꿈꾸던 의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정형외과 팰로우 박성진(조상기 분)이 인턴으로서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이민우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내비치는 이유일 것이다. 죽은 이를 안타까워하고, 살아난 이를 다행스럽게 여기고, 남은 가족들을 가엾이 여겨 보살핀다. 어느새 환자의 사인조차 잊어가는 최인혁과 다른 부분이다. 그도 언젠가는 최인혁처럼 되고 말까?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권력이란 아주 많은 일들을 가능케 해주는 마법과 같은 것이다. 과연 그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하려 하는가? 어느샌가 멈추고 나면 권력 그 자체에 도취되고 만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간절히 하려 해서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를 탐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병원재단의 이사장 자리를 노리는 이와 중증외상센터의 센터장 자리를 노리는 이가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또다시 막히게 될 지 모른다 하는데 그저 물색없이 기뻐하고 있다.
마모되기는 최인혁과 마주한 소방공무원들 또한 마찬가지다. 소방공무원들이 평소 접하는 목숨이란 얼마나 될까? 죽어가는 환자마다 일일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다가는 의사노릇따위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 없는 과로 가겠다 같은 인턴 유강진(지일주 분)는 벌써부터 마음을 정한다. 어느새 죽음이 당연해지고, 사람의 목숨을 계량하기 시작하고. 시간과 노력과 비용으로 사람의 목숨을 저울에 달기 시작한다. 관료주의란 바로 그들이 그 분야에 가장 전문가이기에 나타나는 오류일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운 놀라움이나 감동다위 없이 익숙한 일상 속에 매몰되다 보니 자기 안에 갇혀 더 이상을 보지 못한다.
이제까지는 아이의 이야기였다면 이제는 어른의 이야기다. 강재인의 말이 정답이다. 노력으로도 되지 않는 일이란 있다. 노력으로부터 오히려 배반당하는 일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어째서 노력을 하는가? 노력 말고는 할 것이 없으니까. 어려서의 노력이 희망을 바란다면 나이들어서의 노력은 절망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발버둥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과연 짧은 시간 안에 어른이 되고 마는가. 어른이 되어 익숙한 삶속에 묻혀버리고 말 것인가.
이제 2회 남았다. 2회 안에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일단락되어야 한다. 시즌2가 만들어지든 아니든 일단 지금까지 벌려놓은 이야기들은 이번 방송회차에서 마무리짓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어른이 되는가? 아니면 아직은 아이인 채로 남는가? 그리고 어른들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아이들이 안쓰럽다. 사람의 목숨값이란 그런 것이다. 감상이 아니라 바로 그 감상이 정답일 것이다. 아프고 안타깝다. 그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계량하려는 것일까? 자신들과 함께 있다 사고를 당한 교통사고 환자를 앞에 두고 자신의 과에서는 전문가이지만 교통사고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과장들이 혼란에 빠진다. 어째서 중증외상센터가 필요하고 최인혁이 필요한가. 이민우의 눈은 천진한 아이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진실일 것이다. 중증외상센터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 아니다. 살릴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곳이다. 중증외상환자들이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와 같은 곳이다. 그럼에도 죽을 환자는 죽는다. 너무 많이 죽었다. 의학드라마로서. 그것이 바로 현장이고 현실이다.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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