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전우치 - 도술과 주문, 말이 기적을 이루다

까칠부 2012. 12. 15. 08:39

필자도 도술을 부릴 줄 안다. 길을 가다가 실수로 지갑을 흘리고 말았다. 돌아보니 저 앞에 지갑이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고서도 지갑을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아주 간단하다.

 

"죄송하지만 그 앞에 제 지갑이 떨어져 있는데 제게 가져다 주시겠습니까?"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친근한 표정과 정중한 몸짓으로.

 

어쩌면 말장난이라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도술이란 무엇인가? 아니 마법이란 무엇인가? 내 힘을 쓰지 않고도 -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인 것이다. 위의 경우에도 필자는 굳이 직접 지갑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집어들지 않고도 지갑을 다시 자기 손에 쥘 수 있다.

 

물론 그냥은 안된다. 무심하게 그저 가져다달라고만 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대로 무시하고 돌아서고 말 것이다. 때로 어떤 사람은 화를 내기도 한다. 아예 지갑을 들고 도망치는 사람도 잇을 수 있다. 그래서 최대한 공손한 말투인 것이다. 친근한 표정과 정중한 몸짓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의도한대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주문인 것이다.

 

또다른 도술도 보여줄 수 있다. 호감을 가진 이성이 있다. 그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직접 만나서 고백하는 것은 아직까지 쑥쓰럽다.

 

꽃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빨간장미의 봉오리를 주문해 이성이 있는 곳으로 전해달라 부탁한다. 물론 함정은 있다. 이성이 빨간장미의 봉오리에 대한 꽃말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혹은 직접 찾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그같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빨간장미의 봉오리는 는 말을 대신해 자신의 감정을 전하는 수단이 된다. 빨간 장미의 봉오리의 꽃말은 수줍은 고백.

 

사실 단지 꽃에 불과하다. 그것도 완전히 핀 빨간 장미는 '열정'과 '욕망'이라는 다른 꽃말을 갖는다. 말의 힘이다. 누군가 그 꽃을 이름하여 '장미'라 불렀고, 그 색을 일컬어 '빨강'이라 정의하였다. 그리고 빨간 장미에 대해 꽃말을 붙였다. 처음 꽃말을 붙인 사람은 따로 있겠지만 이제 누구나 빨간 장미와 혹은 봉오리를 대하면 그 꽃말을 떠올리고 만다. 그것이 말을 대신하여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기도 한다.

 

눈치챘을 것이다. 결국 말이다. 꽃이 있다. 그저 꽃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 꽃을 두고 장미라 부른다. 누군가 그 꽃을 국화라 부른다. 그저 흔한 들꽃인데 그 꽃들에도 패랭이꽃이니 제비꽃이니 이름이 붙여진다. 그리고 이름이 붙여진 순간 꽃들은 그냥 꽃이 아니게 된다. 아마도 제비꽃에 갑돌이니 갑순이니 하는 고유명사를 붙여준다면 그것은 또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흔한 길고양이라도 '나비'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고양이가 된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고양이는 나를 비롯한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비'라 불리게 된다.

 

드라마 <전우치>에서 정작 도술을 쓰는 세 주요인물 - 전우치, 마강림, 마숙 - 의 주문이란 참으로 단순하다. '천리경'이나 '둔갑술' 같은 알아듣기 쉬운 주문도 있지만 거의 전우치는 '오도일일관지', 마강림은 '천지건곤', 마숙은 '열사천조 파천옹주 지옥도주'의 한 가지 주문만으로 다른 모든 주문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비판도 나온다. 도술주문이 어째서 이리도 단순하고 그나마도 한 가지 뿐인가. 하지만 바로 필자가 <전우치>의 도술에 대한 묘사에 감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도술이다.

 

앞서도 말했듯 길에 떨어뜨린 자신의 지갑을 주워다 주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그것이 항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상대로 하여금 그럴 마음이 생기도록 자신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공손한 말투에는 간절함을 심고, 정중한 태도에는 강한 의지가 깃들도록 한다. 사실 사람이 신에게 기도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간절한 바람을 전하고, 그러면서 그를 향한 자신의 의지를 신이 알도록 한다. 점을 치면서 복채를 내는 것도, 기도를 하면서 고행을 겸하는 것도 결국 그를 위한 것일 터다. 그리고 그 모든 간절한 바람과 굳은 의지를 한 마디 단어로 요약하여 전한다. 기도의 말미에 신자들이 외치는 말일 것이다.

 

그것은 이름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지다. 그 모든 것을 대변하는 한 마디다. 오롯한 자신의 것이다. 그래서 도술의 이름을 살피면 각자의 성격이 드러난다. 전우치의 '오도일일관지'는 아마도 '나의 도는 오로지 하나로써 통한다'는 구도의 뜻을 담고 있을 것이다. 마강림의 '통제건곤'은 하늘과 땅을 자기의 지배 아래 두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다. 마숙의 '열사천주 파천옹주 지옥도주'는 그가 가진 야망의 크기와 음험함을 모두 아우른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주문만 보더라도 각자의 성격과 성향을 얼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시험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 할 것도 없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나는 할 수 있다."

 

힘들 때. 고통스러울 때.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 필자도 그런 주문이 있다.

 

"배고프다..."

 

어쩌다 입에 붙은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있으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져버리고 만다. 굳이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그저 그 순간의 여러 감정들을 그 한 마디에 실어 내뱉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고자 하는 의지와 해야 한다고 하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서. 어떤 말이든 자신의 진심을 담아 전할 수 있는 말이면 좋다. '오도일일관지'든 '통제건곤'이든.

 

도술이란 원래 도를 이루어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유가에서도 그래서 도술이라는 말을 쓴다. 유가에서 말하는 도란 곧 인이며 덕이다.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의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다. 그래서 공자도 군자의 말은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다 말하고 있었다. 도를 이루면 하늘과 땅의 이치에 통하고 모든 것을 자유롭게 행한다. 군자가 죽지 않는다는 것은 수명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말이란 곧 소통이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자기 자신과 소통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과 소통한다. 그 의지를 담는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면 단지 설정을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그리 된 것이든. 도술에 담긴 도를 본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다. 말이며 마음이다.

 

물론 가볍게 보아도 좋은 드라마일 것이다. 단지 도술을 쓰는 주인공들이 온갖 신통한 재주를 부리며 상식의 경계를 넘나든다. 차태현과 김갑수는 믿고 보는 배우들일 것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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