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을 쓰고 죄인이 되어 20년을 감옥에 갇혀있던 남자와, 그 남자에게 누명을 씌워 죄인을 만든 또다른 남자, 일상에서 커피와 우동과 구두를 닦는 여유를 즐기던 또다른 남자는 과연 감옥속의 그 남자에 비해 자유롭기만 한 것일까?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뜻한대로 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벌써 수십년이 지난 아주 사소한 일로도 자다가 깜짝깜짝 놀라 깨고는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다 잊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세월을 거슬러 다시 일깨우고 마는 죄가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든다. 차라리 원한은 잊을 수 있어도 되는 잊을 수 없다. 증오는 잊을 수 없어도 죄로 인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증오마저 잊어버린 남자와 도저히 죄를 잊을 수 없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또 다른 남자.
여지훈은 묻는다.
"너희에게도 죄책감이라는 게 있는가?"
차라리 자신을 피하려는 남예리가 더 두렵고 부담스럽다. 죄를 지은 것은 자신이다. 자신의 양심조차 부정당한다. 죄책감을 느낄 자격조차 없다. 감옥속에서 더 지독한 감옥을 느끼며 범인은 눈물짓고 만다. 누구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조차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죄라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그 죄마저 잊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괴물이 되어 버린다. 다른 것이 괴물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죄로부터 도망치는 그것이 바로 괴물이다. 죄로부터 도망치고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는 더 이상 후회할 수도 반성할 수도 없다. 그저 끊임없는 죄로 빠져들 뿐. 그 죄를 일깨우는 것이 바로 사회의 역할일 테지만. 29만원 받는 그분이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누구 때문이겠는가?
단 한 사람만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원한도 증오도 분노도 그렇게 해소된다. 그러나 죄는 누구에게 맡길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솔직해질 수 없는, 절대의 고독이라는 감옥. 어느새 친구가 되었음에도 친구라고 솔직하게 나설 수조차 없다. 더구나 정의를 가르쳐야 하는 경찰대학 교수로써 양심은 더욱 예리하게 난도질당한다. 자신이 혐오스럽고 환멸스럽다.
과연 감옥과 양심, 감옥이라고 하는 현실의 울타리와 죄책감이라고 하는 양심의 울타리 가운데 무엇이 더 가혹하고 잔인한가? 누가 더 고통속에 자유를 잃고 살아왔는가? 미국으로 도망쳤던 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누구보다 당당한 것은 가장 자유로웠던 그 사람이었다.
지난주 보지 못했다. 이런저런 일로 인해 쓸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다시 별로 쓸 것도 없고 의욕도 없어 얼마 안 된 기억을 끄집어낸다. 누군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서. 이 또한 지독한 감옥일 것이다. 내일이면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방영된다. 재미있었다. 의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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